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 31절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올 여름에 실로 엄청난 홍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릴때 가끔식 이런 비를 경험하긴 했지만 이렇게 긴 장마와 폭우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빙하가 녹아서 지구상에 물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이것이 기후위기의 현상이라면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미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비로 인하여 어려움 당하는 이가 너무 많습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이번 주에는 태풍이 예상되고 게다가 코로나 확진자의 확산이 우리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느때보다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커지는 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를 격려하십시오. 지난 주에 초중고등학교 방학을 많이 했습니다. 코로나 19로 교육이 늦춰지고 온라인에 오프라인까지 교육이 이루어지다보니 선생님들과 학부모에 애들까지 너무나 고생들 하셨어요. 아내가 수업을 준비하는 것 보니 평소에 3-4배가 걸리더라구요. 초중고 선생님들은 온라인도 준비해야하고 오프라인도 준비해야 하고 두배 세배에 가까운 준비들을 하시고 부모님들은 집안에서 거의 교육도우미가 되셔서 애쓰셨던 한학기였습니다. 수고하신 분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 마치시면 온 몸을 만져주세요. 고맙다구요. 그리고 거울보고 고생했다. 애썼다. 고맙다. 사랑한다고 꼭 말씀해 주세요. 비가 많이 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에게 전화한통씩 해주세요. 안부와 격려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격려해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세요. 하느님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어려움을 만난 이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주님의 따뜻한 손과 발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양성과 순환
지난 주에 함께 나눈 주제가 기후위기 시대 생존의 조건으로 다양성, 공존을 위한 절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늘은 순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에 내린 많은 비는 산과 강과 바다 곳곳에 있던 물의 순환의 과정입니다. 물은 이렇게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 비가 되어 내리고 다시 산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흐르고 흘러 지구 전체를 청소하면서 순환합니다.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 걸 보면 어쩌면 지구가 자기 정화작용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지구상의 모든 건 이런 순환으로 그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도 순환하고 흙도 순환하고 자연도 순환하고 생명도 순환하고 사회적으로는 경제도 순환되고 주고 받으면서 관계가 순환되고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몸도 순환되면서 생명과 관계와 공동체와 지구를 살리고 있습니다.
단절과 막힘
문제는 이 순환의 단절입니다. 그 순환이 끊어지고 막히면 죽습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물리적 죽음을 넘어섭니다. 물리적 죽음은 그 조차도 생명 순환의 한 과정이죠. 그러나 막힘, 단절로 인한 결과들은 매우 고통스럽고 파괴적이며 지독한 통증을 동반한다는 사실입니다.
현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는 미세플라스틱입니다. 온갖 합성섬유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옷, 가방, 천으로 된 모든 물건들이죠. 이것은 빨래하는 과정에서 바다로 흘러가 바다생태계를 위협합니다. 문제는 분해되지 않고 썩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분해되면 순환이 되어 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순환이 되지 않으니 생태계의 회생가능성이 없다는 겁니다. 고래 뱃속에 들어간 플라스틱 물통이 소화되고 썩으면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다가 죽으면 고래 몸은 분해되어 순환되는데 그 플라스틱은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가 또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겁니다. 생태계의 암덩어리입니다.
환경만 그런게 아니죠. 경제도 돌고 돌아서 잘 순환이 되어야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책 한 권이 여기 있는 분들 한바퀴 돌았어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한권이 모두의 삶의 질을 높여줍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돈과 물건이 저에게 멈춰서있는 거예요. 움켜쥐고 순환되지 않는 경제는 독입니다. 경제(살림)의 본질은 사람들을 건강하게 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없는 쪽 약한 고리들을 채워서 돌게 하면 되고 쌓이고 고이고 막히는 곳을 뚫어주면 됩니다. 그래서 사회보장 제도가 필요하고 세금을 거둬 순환시키는 것도 필요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사회적 책임의식도 필요한 겁니다.
몸도 마찬가집니다. 혈액이 탁해서 잘 흐르지 않으면 병이 되는데 그냥 죽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장 비인간적이고 존엄성을 위협하는 형식(뇌사, 풍, 식물인간)의 죽음으로 내 몹니다. 변이 안 나오면 변비가 걸리고 변비가 오래되면 몸에 독이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각종 피부병에 온갖 합병증으로 퍼져갑니다.
그래서 자연도 생태계도 사회도 공동체도 가정도 개인도 순환이 중요합니다.
생태적 자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태안에서 서로 순환하며 잘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제가 집사님들하고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제 몸의 순환이 끊긴 기관들과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이 생태계의 수많은 친구들과 함께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제 세계에 빠져서 전혀 집사님을 인식조차 못하면 관계하고 순환할 수가 없지요. 존중은 고사하고 존재자체를 인식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단절입니다. 그래서 “액티브 호프”라는 책을 쓴 생태환경운동가 <조안나 메이시>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아, 다른 말로 생태적 자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극히 개인적 자아에서 우리의 자아가 가족적 자아, 공동체적 자아, 사회적 자아, 국가적 자아를 넘어 생태적 자아로까지 넓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공동체 안에서 아이들끼리 갈등이 일어났어요. 개인적 자아나 가족적 자아만을 가지고 있으면 내 아이 중심적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들겠지요. 우리애에게 왜 그래? 그런데 공동체적 자아로 넓어지면 우리아이도 내 아이지만 공동체의 아이도 내 아이인 거예요. 그러면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갈등을 조정하고 비폭력적으로 어떻게 잘 소통하고 성장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게 되겠지요. 타자를 내 자아의 일부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순환의 시작입니다. “열대 우림을 지키고자 할 때 나는 존 시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열대우림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일부인 저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저는 최근에서야 알았습니다. 내가 열대우림의 일부임을” 열대우림 지킴이 존 시드의 고백입니다. 나무와 강과 숲이 내 몸의 일부임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 즉 이런 생태적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지구 생태계가 지켜집니다.
성서와 선조들안에 있는 생태적 자아
이런 정신이 오늘의 성서안에도 담겨있습니다. 옛 선조들은 사람만 보시기에 좋았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인류는 사람만 최고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요. 자연계의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을 암묵적 묵인하면서 생태계 파괴의 침묵적 동조자가 되고 있지만 성서는 타자뿐만아니라 자연도 창조세계의 동반자로 위대한 영혼들임을 고백합니다.
옛날 인디언들이 고백하며 살았던 돌과 나무와 시냇물과 햇살은 내 친구요 나의 누이요 내 어머니라는 그런 감수성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물을 버릴 때도 식혀서 버렸습니다. 미생물조차도 자연계에서 분해자로써 우리와 연결되어 있고 그들이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자기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런 용어를 몰랐겠지만 선조들은 “생태적 자아”를 지니고 사신 겁니다. “등에 새끼 업은 메뚜기를 잡으면 어머니가 빨리 죽는다.” 옛 속담입니다. 메뚜기조차 씨를 말리면 개구리가 씨가 마르고 그러면 생태계 사슬이 단절되고 결국 누구의 근심걱정으로 와요. 살림을 도맡아 하는 엄마에게 와서 엄마가 스트레스 받아 빨리 돌아가신다는 겁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은 너나 메뚜기나 똑같다는 겁니다. “경칩 날 개구리 죽인 사람은 죽어서 눈알 없는 개구리 된다.” 개구리가 깨어나면 이제 산란해서 새끼낳고 먹더라도 그 때잡아 먹어야지, 겨울동안 단식한 개구리 몸에 좋다고 씨를 멸해버리면 결국 그 불행이 결국은 인간에게 닥친다는 속담입니다. 오래된 미래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태적 자아를 키워내려면 어떤 식으로든 자연과 순환되어야합니다. 관계하고 그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고 체험해야합니다. 아무리 의식이 있어도 몸이 자연과 단절하는 삶을 키워내는 방식으로 존재하면 그것이 결국 종말을 초래합니다.
생태민주주의로
사람만 행복한 시절은 끝을 내야 합니다. 저희가 텃밭을 일구면서 똥도 오줌도 다 작물을 살리는데 순환된다고 했잖아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는 똥과 오줌은 지저분하고 더럽고 없애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생태계 안에서 순환의 질서를 통해 보면 똥도 오줌도 나름 없어서는 안될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중심적 세계에서는 벌레를 유충과 해충으로 나누고 버섯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버섯과 먹을 수 없는 독버섯으로 나누고 모든 게 인간중심적인데 이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환적 세계에서는 저마다 모두 자기 쓸모가 있어 서로 존중되고 순환됩니다. 자연도 생명세계의 동지로 인정하는 생태민주주의를 끌어안는 교육과 삶의 문화를 생활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삶을 통해 생태적 자아를 키워내야 합니다.
기도
이런 생태적 자아를 위해
매일 매일 기도를 하실 때 나를 살리는 것들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작게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부터 직장 동료들, 공동체 식구들, 사람에게서 보이지 않는 공기, 나무와 햇살과 동물들 먹거리, 자연들, 지구촌 반대편의 아마존 숲까지 매일 매일 인식하게 되면, 내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하루하루의 내 소비와 행동과 일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연과 함께
또다른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을 내 삶의 공간안으로 초대하는 겁니다. 존재와의 소통과 관계없이 존재를 깊이 인식하는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작게는 화분을 키우시는 것부터 일상에 작은 텃밭을 일구시는 것까지! 벌레는 단순히 죽여야 하는 대상만이 아닙니다. 저는 텃밭을 시작한 어느날 흙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절대 농약을 치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살리고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한 양식을 내어주고 그 안에는 인류를 살다간 모든 생명체들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 흙, 대지를 생명의 어머니라고 고백했던분들의 고백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자기 느낌이 없는데 닭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후라이드 치킨이라고 인식하는 세상에서 동물권을 보고하고 기후위기를 위한 비상행동의 연대를 해나가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스토리텔링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하셨듯이 성서의 기자들이 하셨듯이 생태적 자아를 가지고 살았던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우리는 책상에서만 교육을 받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것들이 교육입니다. 이미 사라진 속담들이지만 작은 속담 이야기 하나가 얼마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존에서부터 생태적 자아를 가지고 지구 생명체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수없이 많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성서이야기처럼 풍성하게 가꾸어가야하는 시대입니다. 삶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신화가 되고 그 신화가 개인의 삶뿐만아니라 전 지구적 문명전환의 동력이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이야기들을 시작해야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오면서
신경림 시인은 오늘 <홍수>라는 시에서 혁명이 필요한 시대라 역설했습니다. 어쩌면 자연은 이미 혁명중인지도 모릅니다. 내 몸의 혁명으로부터 타자와 세상 그리고 자연을 인식하는 자아의 혁명을 통해 “생명 순환”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우리 모두이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