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랑 요한1서 4장 18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립에 대한 불안,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경제적인 것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 , 바이러스를 옮아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불안 다양한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삶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삶의 연속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삶속에서 겪는 다양한 불안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가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불안입니다. 인정욕구로부터 오는 불안입니다.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사라지는 불안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법륜스님은 매사에 받으려는 마음,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히 사랑하는 마음 모두 마음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안감을 없애는 지혜는 마치 내가 아무런 조건없이 산을 좋아하면 그냥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듯이 내가 아무런 조건없이 바다를 좋아하면 그냥 바다에 가서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좋듯이 그냥 기대 없이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라고 권면하십니다.
두 번째 <속물근성> 권력지향적인 사람이 가지는 불안증을 말합니다. 세 번째 <높은 기대> 자기 완벽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불안증입니다. 네 번째는 <능력주의>인데 오늘날 특히 이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호 비교되고 평가되고 승자만이 살아남는 세계에서 주어지는 불안증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나오는 애벌레처럼 경쟁을 포기하고 그 질서에서 내려와 스스로 저마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 속도로 자기를 채워가는 법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냥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실수도 모자람도, 결핍도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알며 살아가는 지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시대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도 깊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죽음이 집과 가게로 스며들고 있고 건강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자신은 알지도 못한 채 바이러스를 옮기고 다니고 있고 거리의 낯선 사람이 모두 위험인물로 여기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활동성은 위축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으며 줄어들어가는 통장의 잔액을 바라보며 불안감을 키우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동선을 유지한 채 어서 빨리 이 위기가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 달이 두 달되고 두 달이 6개월이 되고 6개월이 1년을 바라보면서 불투명한 미래에 고립은 외로움이 되고 불안감은 절망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불안의 시대 사도바울 선생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톰라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과 팬데믹>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두려움이 앞설 때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들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 앞서서 먼저 <서로의 곁에서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는 사람도 사람이고 반성하고 성찰해야하는 사람도 사람이고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람도 때로는 강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린 거 하셨어요? 네 온 몸을 만져주면서 격려하시라 말씀드렸지요. 매일 매일 잠들기 전에 꼭 하십시오. <어떤 아주머님이 집에서 살림을 하시는데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만두셨어요. 그랬더니 그 사장님이 아주머니, 혹시 일할 생각 없으셔요. 나는 아주머님이 일하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는데>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집에 와서는 일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는 겁니다. 적어도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 마음이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는 겁니다. 내 몸도 마찬가집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시면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면 그게 잔잔히 힘과 위로가 됩니다. 결국 이 모든 어려움, 두려움을 딛고 서야하는 사람은 이 몸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내 자신을 어루만져주십시오. 아침 마다 거울을 봅니다. 요즘은 특별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괜찮아 잘 될거야” “더한 시절에도 사람이 살았는데, 그래도 이게 어디야,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 잊지마!” 먼저는 자기를 향한 충분한 위로와 사랑안에서 하루하루를 맞이하십시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을 때 단순하게 몸을 움직이십시오. 산책을 한다든가 음악을 듣는다든가 화분을 가꾼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불안감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불안감에 계속 자기를 두는 방식보다는 다른 단순한 것들, 자기 행복을 주는 삶의 기운을 바꿀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일들로 그 기운을 바꾸어 주세요.
다음으로는 공동체적인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때입니다. 전염병 시대의 아이러니는 아파죽느냐 굶어죽느냐에 대한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걸리거나 걸리게 해서 아파 병드느냐 고립과 단절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굶어죽느냐라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근이 온 땅을 지배했을 때 왜, 누구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냐 분석하고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고 그런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단순한 질문만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위험에 처하는가? 우리 안에 누가 어려운가? 누가 스스로 고립되어 죽어가는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
초기 크리스챤들은 과거에 대한 논쟁,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마음을 키우기 보다 오늘 여기의 약함과 아픔을 돌보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어려움을 돌보기도 하고 불안감이 엄습할 때 함께 노래부르기도 하면서 공동체 안에 약한 고리들을 연결하고 공적인 시스템을 만들며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넓히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2-3세기 심각한 질명이 마을을 덮치자 부자들은 산을 피신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떠나지 않고 사람을 돌보았고 그러다가 병에 걸려 죽기도 했다.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도대체 왜 그랬죠? 그들은 “아 우리는 이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은 사회가 포기한 사람들이어야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이 전염성의 시대와는 분명 다릅니다. 워낙 시스템이 잘되어 있고 전문가들의 활동영역을 존중해주고 우리는 사회적 거리와 분리를 잘 하면 됩니다. 전광훈 목사식의 혐오를 조장하고 무대포식의 몰상식한 폭력을 주장하고 불도저처럼 타자에 대한 존중과 예의도 없이 몰아치는 건 두려움없는 사랑이 아니라 야만적인 폭력입니다. 타자를 존중하며 상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길들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의 에너지가 가장 극대화되는 경우가 역설적이게도 재난상황이라고 합니다. 물론 참혹한 지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혹한 지옥은 극심한 절망이요 아픔입니다. 적당한 재난상황이겠지요. 레베카 솔닛의 <지옥에 세운 천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2003년 허리케인이 지나간 지역의 이야깁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책임자는 허리케인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는 시속 100마일 이상의 풍속으로 나무, 지붕, 그리고 전봇대를 뽑아 버린 바람이나 거의 3미터 이상되는 파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그 며칠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행복하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집에서 나와 서로 말을 걸고 서로 서로 도우며 임시로 마을 부엌을 만들어 식사를 제공하고 노인들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들은 온종일 함께 있었고 더 이상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려웠지만 서로를 고립시키지 않았고 서로 의지하면서 돈이나 지위가 줄 수 있는 안정감보다 훨씬 더 한 안전망을 느꼈다는 겁니다. 가게가 물이 잠기고 사회체제가 엉망이 되도 이웃들의 도움, 간이 식당의 식사, 공동체적 돌봄이 서로에게 더 큰 위로를 주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위기 안에서 서로의 어려움들을 함께 극복해 나아가고자 움직일 때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생명의지가 활성화하고 그것이 상호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의 존재감이 극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함께 SNS로 연결고리를 시작합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 생각했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아온 현대인들 잠시 멈추라는 신호로 알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서로를 위해서도 쉼의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늘 언제가 자신이 서있는 바로 지금 여기 바로 그 땅에서 온전한 사랑으로 작은 천국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보면 유럽에서 흑사병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웃긴 이야기를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바람피는 이야기도 하고 수도승 뒷담화도 하면서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데 새롭게 연결하는 공동체의 공간이 웃음과 즐거움과 기쁨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약함과 어려움을 돌볼 수 있는 공간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이 코로나의 시대 삶의 보람과 의미를 더 활성화시켜나갈면서 크리스챤의 길들을 모색하는 장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갑이라고 하는 사진 작가가 있습니다. 제주도에 두모악이라는 갤러리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면서도 제주도의 “외로움과 그 평화로움”을 사랑했던 그 분은 어느 날 루게릭병을 진단받으면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던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의 생의 마지막을 위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창고에서 곰팡이 꽃을 피우고 있던 사진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고 또 점점 퇴화하는 근육에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며 마지막까지 고통스런 통증을 견뎌가면서 스스로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갤러리 두모악’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시간들을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으며 그곳에 제주의 영혼을 담아냅니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어떤 이들은 질병으로 어떤 이들은 경제적 고통으로 두려움과 공포 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주어진 한 번의 삶 예수님처럼 삶과 죽음을 초월하며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삶은 못살더라도 지금 이 순간 삶의 매순간 내 삶을 여전히 의미있게 하고 보람있게 하고 가치있게 하는 삶을 열어갈 수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의 자리에 순간에서 영원을 맛보게 하는 아름다운 감동과 사랑이 깃들지 않을까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 쫒나니 사랑으로 가득한 삶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