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드골은 프랑스의 우파 정치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우파라고는 한 번도 안했다고 한다. 좌우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무엇… 그래서 드골을 칭할 때는 드골리즘이라고 하기도. 샤르트르가
알제리 독립을 지지해서 프랑스인들이 생난리를 쳤었다. 알제리 태생인 카뮈는 이 때 침묵했었다고 한다. 모든 원성과 질문이 샤르트르에게 집중되던 시절, 드골이 “그도 애국자다”, 이렇게 쉴드를 쳤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드골 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보수는 드골 보다 ‘더 골’ 때리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을 우습게 보는 것은 우파라서 그런
게 아니라, 뭐 이렇게 무식한 것들이 다 있어, 진짜 아는
게 없고, 사는 게 무식해서 그렇다. 골프에 이렇게까지 목
걸고 있는 정통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드골 멋있어요,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서 아직 점심도 안 먹고
펜을 든 건 아니다. 드골이 오늘의 드골이 된 건, 그가
나치 치하에 영국으로 망명해서 단파 라디오 방송 ‘자유 프랑스’를
송출한 이후부터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의 방송을 듣고 프랑스
전역에서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불꽃 같이 일어났다는데. 좌파 대통령 미테랑도 이런 소년 레지스탕스
출신이다. 레지스탕스는 프랑스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정통성으로는 먹어주고 가는 경력이다.
나, 레지스탕스 했어…
그걸로 설명 끝. 나중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총리 피에르 베레고부아도
그랬고. 그리고 레지스탕의 출발에는 드골이 영국에서 프랑스로 송출한 ‘자유
프랑스’ 방송이 있었더라, 그런 전설 같은 얘기가.
그런데 과연 드골이 송출한 ‘자유 프랑스’ 방송을 들은 사람이 프랑스에 있었느냐? 이게 나중에 질문이 되었나
보다. 단파 라디오로, 없던 방송이 나오는데, 사실 그걸 누가 들었겠냐? 독일군 피해서 몰래하는 해적 방송인데, 대놓고 광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전에 라디오도
겨우 있던 시절에 목소리만 듣고서 “아, 이 분이 우리의
위대하신 장군님, 드골 장군님이시다”, 이것도 좀 어려운
경우다. 설령 중간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이게 뭐야”, 이렇게 내던졌을 가능성이.
결국 그래서 드골의 방송을 듣고 레지스탕스가 생겨났는지 아닌지 격관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드골에서 미테랑까지 가는 길의 중간고리는 역사의 미스터리가 되었다. 과연
프랑스 사람들은 드골 장군의 방송을 들었을까?
많은 변화는 그렇다. 변화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누가 주도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고, 특별한 계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변화가 생겨나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사후적으로 설명틀을 집어넣거나 이해시키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해석되는 것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다.
2.
우리가 모르기는 하지만 그 기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건이나
현상들이 존재한다. 최근 내가 관심있는 것이 태풍이다. 태풍은
북태평양에서 출발해서, 해마다 서너 번 정도 동북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 태풍은 어디에서 출발해? 여름에 북태평양에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최초의 수증기 한 방울이 씨앗이 된다. 나중에 점점 더 많은 수증기와 함께 거대한 수증기 덩어리의
기압골이 되지만, 그것도 첫 뭉치가 생겨난 씨앗이 있다. 근데
우리는 그게 뭔지 절대 모른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걸 굳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첫 씨앗을 본다고 이게 박찬호 속구보다 빨랐다는 카트리나급의 슈퍼
태풍이 될지, 그냥 그렇고 그런 미니 태풍이 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없는 것은 아니다.
한강의 발원지에 가본 적이 있다. 많은 강은 첫 출발하는 발원지가
존재한다. 이건 중요하다. 여기서부터 오염되면 말짱 꽝이니까. 발원지 없는 강도 있다. 청계천은 발원지가 없다. 원래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도로다. 지금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특수한 경우다.
내가 생각하는 책은, 태풍의 씨앗을 만드는 것과 가장 가까운 행위다. 태풍의 눈과는 다르다. 그건 이미 충분히 세력이 형성되어서 한반도쯤
올라온 다음에 눈이 있느냐, 없느냐, 그렇게 따지는 것이다. 태풍의 씨는, 사전적으로도 그렇고 사후적으로도 그렇고, 아무도 모른다. 증명도 잘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태풍이 씨라는 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책을 소개하는 데
가장 적절한 말인 것 같다.
방송은 태풍을 쫓아다니는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태풍이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방송이
태풍을 만들었다고 사람들이 이해하게 된다. 많은 일간 방송들은 태풍을 쫓아다닌다. 주간방송이 태풍이 되기 직전의 태풍 혹은 태풍의 눈 같은 것을 찾아다닌다.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책은 태풍의 눈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정말로 눈이 될지, 아니면 그냥 그렇고 그런 수많은 물방울 중의 하나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가 태풍의 눈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그걸 모를 뿐이다. 드골의 ‘자유 프랑스가’가
정말로 레지스탕스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프랑스 우파들이 드골의 신화를 만들면서 날조한 역사인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게다가 좌파의 미테랑이 대통령 되는 과정에서
소년 레지스탕스 연락병의 경력을 엄청나게 강조했다. 좌우, 모두
전설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믿는다.
3.
직장 민주주의라는 개념까지 정리하는 과정에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원래
전통적인 족보 방식으로는 작업장 민주주의로 불렀다. 그리고 산업 민주주의의 하위 범주였다. 구좌파 접근에서 그랬다. 작업장을 직장으로 바꾸는 것에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더더욱 어려운 개념, 민주주의가 있고
민주화가 있다. 뭐가 달라? 다르긴 뭐가 다르겠느냐, 어차피 모호한 것은 마찬가지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정책 기조의 역사적 사실 관계를 재해석 하면서 민주화는 아니고 민주주의가 맞는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그리고 이걸 조직론의 연장선으로
재구성하는 것, 이건 지금부터 해야 하는 작업이다. 사실
원래 있는 이론이 아니라, 지금부터 만들어야 하는 얘기다. 물론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포브스의 논의 등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체로 하나를 만드는 것은, 재구성 일부, 창조 일부,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게 태풍의 씨앗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나중에 어떤 변화를 만들지, 지금 상황에서 알기는 어렵다. 알
수도 어렵고, 안다면 개뻥이다. 수많은 씨앗이 만들어졌다가
바로 죽어버린다. 이건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확률과 비슷한 얘기다. 그렇다면
수정에 성공한 단 하나의 정자만이 의미가 있느냐? 그럴 리가 있느냐?
정자 숫자가 부족하면 난임 치료 대상이다. 적절한 확률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 필요한 것이다. 그야말로 희생을 전제로 한 협력게임이다. “방구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 이 얘기랑 같다.
굳이 이 카페의 의미를 찾자면, 언제가 한국에 오게 될 ‘직장 민주주의 시대’를 가기 위해서 우리가 만드는 수많은 태풍의 씨앗
중의 하나라는 것 아닐까 싶다. 그게 말이 돼? 어느 세월에? 세아의 모든 변화는 그렇다. 그렇지만 많은 것들이 바뀌고 또 변화한다.
저자로서 카페를 만들 때, 엄청난 사건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그냥 혼자 작업하는 것이 더 빠르고, 날짜를 맞추는 데에 더 좋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과연
사회적으로 최선일까, 이렇게 질문하면 “옛, 써~”, 이렇게 대답할 정도로 내가 무지몽매하지는 않다. ‘그 상황에서’ 최적일 수는 있어도 최선은 아니다. 혼자 작업하는 것, 뭔가 부족하다.
이걸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을 하는데, 몸부림의 결과는 많은 경우, 신통찮다. 거기서 거기다.
4.
50이 되면서 나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바뀐 게 아니라 바꾸었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외부적인 무슨
사건이 있는 건 아닌데, 아이들 키우면서 지내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좀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지금까지 나는 어려운 일을 쉽게 하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내가 바보였던 것 같다. 그건 경제원론 책 조금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겉의 논리, 표면의 논리다. 50이
되면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쉬운 일을 어렵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태풍의 씨앗을 만드는 일이다. 쉬운 일을 쉽게 하면? 아무 사건도 아니다. 어려운 일을 쉽게 하면? 집에서 애 보는 것과 같다. 2년 넘게 애를 보다 보니 처음에 너무
어려웠던 일들이 상대적으로 쉬워졌다. 그건 루틴에 관한 얘기고, 진화경제학에서
이미 80년대 중후반에는 어느 정도 테제로 정리된 얘기다.
어려운 일을 쉽게 하는 건?
이 생각을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지금의 이 카페를 만드는 일이었다. 품
많이 가고, 잘 되기가 어려운 종류의 일이다.
나는 내가 지금 태풍의 씨앗을 뿌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주
온도가 높고 습도가 높은, 북태평양의 어느 바다 얕은 상공 위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일
것이다. 거기에서 언젠가 태풍이 될 씨앗을 뿌리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있을 가능성을 높이는 일을 할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오고 가는 몇 가지의 대화로 자신의 인생이 많이 바뀔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높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가능성도 없지만, 뭔가 하면 갑자기
확률이 0이 아닌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어쨌든 누군가 태풍의 눈을 만들게 된다. 언제인지 누구인지, 초일류급 태풍 연구자도 그것은 모른다. 그러나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태풍의 눈을 누가 뿌리는지, 삶의
바쁨을 잠시 세워놓고 지켜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