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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2일 화요일 (석가탄신일) 백두대간 6회차 덕유 삼봉산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6회차 : 빼재 – 삼봉산 – 소사마을 - 삼도봉(초점산) – 대덕산 - 덕산재
산행거리 : 약 16 km 산행시간 : 약 7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049322
거리 15.9 km
소요 시간 7h 51m 57s
이동 시간 7h 15m 6s
휴식 시간 36m 51s
평균 속도 2.2 km/h
최고점 1,308 m
총 획득고도 1,058 m
난이도 힘듦
백두대간 (白頭大幹) 6 – 덕유 삼봉산
양산박
석가모니 태어나신 음력 사월 초파일은
만물이 소생하는 꽃피는 계절일세
생로병사 인간고통 없애주시려
자신의 삶 오롯이 험한길에 버리셨네
온갖 꽃과 풀나무 아름다워도
산오르고 내려가는 발걸음이 아프도다
아픔일랑 머리에서 깨끗이 지우고선
아름다운 꽃길만 기억하여라
인생길 걷노라면 아픔이 없을손가
그 아픔 잊은 자리 행복꽃이 자라나네
오전 10시 빼재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한다.
불기 2562년 석가 탄신일
석가모니는 기원전 563년 지금으로부터 2562년 전 오늘 인도와 네팔국경 근처인 히말라야 산 기슭에서 샤카족 슈도다나왕의 아들로 내어났다. 아직까지도 인도에서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카스트 신분제도가 석가모니가 태어날때도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승려계급인 브라만이 최상위 계급이요, 그 밑에 왕과 귀족이 속한 크샤트리아 그리고 그 아래 평민계급인 바이샤가 있었고 그 아래 최하층으로 짐승대접을 받는 노예계급인 수드라가 그것이다. 석가모니는 그의 아버지가 일국의 왕이었으니 두번째로 지위가 높은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했으니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는 편안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바탕은 마련되어 있었다.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가는 중 룸비니 동산에서 갑자기 산기를 느끼고 석가모니를 낳았다. ‘샤카족의 깨달은이’라는 뜻의 석가모니는 어머니 마야부인의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난 직후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 일곱발자국을 걸으면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다 ) 삼계개고 아당안지 (三界皆苦 我當安之 삼세 모두 고통일 뿐이니 내가 당연히 그 고통을 없애주리라 ) 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말은 석가모니가 큰 수련을 통해 얻어낸 그 깊은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천민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의 존재가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크다. 이를 알고 자신뿐만 아니라 남의 존귀함도 인정한다면 세상의 어떤 고통도 가라앉힐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게 되는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49일간의 고행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고 7년간 수도정진한 후 인도전역을 돌며 중생들을 계도하다가 80세인 기원전 483년 제행무상 (諸行無常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하다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그 이후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 고통받는 모든이들을 구원하였다.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으나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 힘들다고 좌절하지 말고 행복하다고 교만하지 마라.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고 또 그만큼 남을 위한다면 이 세상 모든 이가 행복해지리라는 아주 평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빼재(신풍령)에서 채비를 갖추고 산행을 시작한다.
빼재 (秀嶺)
이제 계절은 여름의 문턱에 와 닿는다. 지난 주에 흠뻑 내린 비가 공기중의 먼지를 다 땅에 떨어뜨렸는지 공기가 맑기만 하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여유롭게 떠다닌다. 떡갈나무 잎이 우거져 산길을 그늘로 덮었다. 노린재나무 하얀 털 같은 꽃이 만발해있다. 주중 공휴일이어서 그런지 평소대비 참여인원이 많이 줄어 30명의 회원들이 빠른걸음으로 산길을 달린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뼈가 묻힌 고개라서 또는 임진왜란 전쟁때 주민들이 피난하여 이곳에 와 짐승을 잡아먹고 버린 뼈가 많아서 뼈재라고 부르던 것이 “빼재”가 되었다는 유래를 가진 곳이다. 달리 신풍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남과 중부지방을 경계짓는 추풍령을 모방하여 붙인 이름이다. 예전에는 구불구불한 이 고개를 지나다니던 차들이 산밑으로 뚤린 터널을 통해 달리고 구길은 우리처럼 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들머리까지의 이동로나 낭만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드라이브길로 이용되고 있다.
삼봉산 오르는 길에 만난 노린재나무
은대난초
함박꽃나무
선밀나물
감자난초
삼봉산 (三峯山 1,255 m )
오늘 걸어야 할 길은 이 빼재에서 삼봉산까지 이어지는 약 5 km 의 오르막길과 삼봉산 정상에서 소사마을까지 약 4 km 의 내리막길 그리고 소사마을에서 삼도봉(초점산 1249 m)까지 3 km 를 다시 오르고 여기서 대덕산 (1290 m )까지 1.5 km 를 오른 후 마지막으로 대덕산에서 날머리인 덕산재까지 3.5 km 내리막으로 총 약 17 km 구간이다. 처음 출발점인 신풍령의 고도가 해발 644 km 로 제법 높은 곳에서 시작하지만 해발 1000 미터가 넘는 큰 산 두 개를 넘어야 하는 강행군이다. 긴 산행거리를 의식해서인지 대원들은 의연한 듯 하면서도 뒤쳐지지 않을까 긴장하는 모습도 보인다.
산행 초반부터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산길 옆에는 은방울꽃이 빛난다. 지난번 구간에서는 꽃이 활짝 피지 못하고 봉오리가 잔뜩 매달려 있었으나 이번 구간에서는 거의 다 만개하고 아직 피지 않은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꽃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말 어느 장인이라도 이처럼 완벽한 은방울을 빚어낼 수 없을 만큼 꽃 모양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가늘게 늘어진 꽃대에 조롱조롱 매달린 방울은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는 듯하다. 어쩌면 저 옛날 인간이 자연과 친하게 지내던 때 그 꽃의 아름다움을 흉내내어 장신구를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줄기는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고 꽃은 마치 목화를 타서 만든 솜처럼 부풀어 있는 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풀솜대다. 언뜻 보기엔 그저 보푸라기같이 푸석푸석한 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낱개의 꽃이 모여서 큰 꽃송이가 되고 각자의 꽃에는 여러 개의 수술이 길게 나와 있어 전체적으로 마치 커다란 솜뭉치가 달려있는 듯하다. 이른 봄에 우리나라 여느 산에나 자라나는 이 풀을 다른 이름으로 ‘지장보살’이라 부르는데 이는 예전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시절에 이 풀솜대 나물을 뜯어다 보리쌀을 섞어 죽을 쑤어 먹으면서 힘든 시절을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자신은 이 세상의 고통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지옥에 떨어진 자의 영혼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서원을 낸 보살이다. 그러니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자들이 배고품을 면하게 해주는 이 ‘풀솜대’는 말 그대로 지장보살의 현신인 것이다.
이번 봄에는 비가 자주 내려서인지 미세먼지가 그리 많지 않다. 오늘도 밤 늦게 비가 내릴거라는 예보가 있다. 오전에는 맑기만 하던 하늘이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점점 짙어지더니 나중에는 멀리 덕유능선 위에 낮게 걸쳐있는 모습이 보인다. 저 구름아래에는 틀림없이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덕유산봉산 정상 풍경
소사마을
산길은 덕유삼봉산 (1255 m)에서 가파르게 떨어져 소사마을로 내려온다. 일년 내내 미풍이 불어 모래를 날려보내서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하여 소사(笑沙)마을이라고 불렀다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일년 내내 날려 보낼 모래는 있는건지 모래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이면 다른 작물의 피해는 없는건지 그 이야기의 구성이 너무 허술하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구체적인 내용이 있든지 아니면 소사(笑沙)라는 한자가 그냥 음만 빌어 표기한 이두문자식 표기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지도를 검색하니 소사라는 지명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경기도 양주시, 경남 함안군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양주시의 소사고개에 관한 유래를 설명한 것을 보면 하나는 산의 형태가 ‘소새’라는 새가 뱀을 쪼아먹는 형상이라 그곳에 무덤을 쓰면 후손이 망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牛)사이의 고개라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그리 명쾌하지는 않다. 우선 소새라는 새가 어떤 새를 말하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부천에도 소사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 마을 윗쪽에 여우 고개가 있다. 여우를 한자로 여우(如牛)라고 쓰는데 그 고개가 마치 소(牛)의 모습을 닮아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는 바, 그렇다면 소사는 소를 닮은(似) 고개라는 뜻으로 풀이하는건 지나친 비약인가. 그래도 미풍이 일년 내내 불어 모래를 날려버려서 마을 주민들이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는 유래보다는 조금 덜 궁색한 설명일 듯하다. 다만, 이런 지명의 어원에 대해 역사적인 고증과 마을 주민들의 확인절차 등이 필요해 보인다.
소사마을은 해발 730 미터까지 내려간다. 삼봉산과 초점산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나무도 없이 경작지로 연결된 구간이 상당히 길다. 마을 주민들은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다 개간하여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초점산 8부능선까지 오미자를 심어 가꿨는지 지금도 일부러 심은 듯한 오미자가 나뭇가지를 타고 자라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제는 극심한 식량부족상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풍족한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 백두대간길에 있는 경작지가 모두 숲으로 덮인 산길로 바뀌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사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만난 찔레꽃
씀바귀
산딸나무
큰앵초꽃
산을 내려가기 전 간단한 점심휴식
식사후 소사마을로 급경사를 내려간다.
산앵도나무
보리수나무
층층나무
젊은 사람이 없는 농촌에는 농사를 짓지 않는 노는 땅이 많다.
애기나리
미나리아재비
삼도봉 (초점산 1,249 m)
초점산으로 오르기 전에 우리 일행은 잠시 휴식을 갖고 물과 간식을 섭취했다. 산행코스를 잘 알고 계신 총대장님이 대원들이 지치지 않도록 이렇게 구간별로 휴식을 취할 장소를 정해 놓는다. 이곳에서 산행에 지친 대원은 중간탈출할 수 있다. 삼도봉(초점산 1249 )으로 오르는 길은 끝없는 오르막이다. 2.8 km의 가파른 길을 1시간 30여분만에 오르니 정상주변은 키 큰 나무가 없이 평이한 구릉 모습이다. 사방이 트여 멀리 덕유산 줄기까지 제법 선명하게 보이는데 주위는 조금씩 흐릿해진다. 멀리 덕유산위에는 비구름이 흐른다.
은방울꽃
괴불나무꽃
쥐오줌
씀바귀
콩배나무
철쭉
삼도봉 (초점산) 정상
대덕산(大德山 1290 )
오늘 우리의 여정중에 가장 중요한 이정표인 대덕산(大德山 1290 )에 이르기까지는 지속적인 가파름이다. 초점산에서 바라본 대덕산의 세 봉우리는 다른데서 볼수 없는 특이한 형상이다. 마치 펑퍼짐한 여인의 엉덩이같이 굴곡진 능선길이 하늘아래 마루금처럼 눈앞에 꽉 들어찬다. 이래서 대덕산이라 불렀는가. 예전에는 다락산(多樂山) 또는 다악산(多惡山)이라 불렀다는데 산 모양을 보면 누구나 그 큰산에 안기면 품어줄 듯 그저 푸짐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대덕산(大德山)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또 예전처럼 소와 같이 지내던 시절에 누군가 이곳에 올라서 대덕산을 바라봤다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습같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대덕산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쏱아질 듯 어둡다. 서늘한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폐부 깊숙히 스며든다. 오후 4시 30분이 넘었다. 예정상으로는 5시 30분쯤 하산을 완료하여 6시에 출발하는 것인데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덕산재까지 3.5 km 이니 내리막이라 해도 한시간안데 도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넉넉잡고 6시까지 하산하는 것으로 목표로 삼고 대덕산과 작별을 고했다.
큰애기나리
오미자
노루오줌
멀리 덕유산 자락에는 비가 내리는 듯 구름이 낮게 내려 앉아 있다.
오후 4시 30분 쯤 대덕산 정상에 도착했다.
덕산재 ( 644 m)
대덕산에서 덕산재로 향하는 대간길은 가파른 흙길이다. 그리 크지 않은 떡갈나무 그늘밑으로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은 아주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후미팀으로 짜여진 7명의 회원들은 아무 말없이 오늘 여정의 마지막 구간을 걷는다. 간간이 나뭇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들려도 걱정이 안든다. 남은 구간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마음도 안정된다.
중간 길가에 있는 얼음골 약수터는 어쩌면 약수터의 기능을 상실한 느낌이다. 약수터 주변은 흙이 흠뻑 젖어 있으나 플라스틱 파이프로 떨어지는 물의 양은 너무 적어 그 물을 받아 마시기에는 하세월일 듯 하다. 약수터 바로 아래 산길에서 3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얼음폭포는 그 규모가 작으나 수량이 풍부하여 미니폭포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밑에 내려가면 어짜피 늦어 족탕을 즐길 시간도 없을 터이니 이곳에서 대충 씻고 가자는 마음으로 손과 얼굴을 적시니 그 차가운 기운이 가슴속까지 스며든다.
산을 다 내려가니 먼저 내려간 회원들이 버스옆에서 하산주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산행을 무사히 마친 뿌듯함으로 서로 격려하며 막걸리잔을 건넨다. 시간은 오후 6시가 임박했다. 이제 먹구름낀 하늘에서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리가 산행하는 동안 꾹 참아준 하늘에 감사하며 우리는 6시 15분 덕산재를 출발했다. 우리를 넉넉하게 품어준 대덕산은 우리가 떠난 뒤에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식을 배웅하는 어머니처럼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든다. 언제 다시 한번 올 수 있을지. 어쩌면 내 평생 이 대덕산에 올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 처음 알았고 다시 볼 수 없을 대덕산과 이렇게 이별했다.
녹음이 짙은 산길을 내려간다.
얼음골폭포
땅비싸리
오후 6시가 임박하여 덕산재 하산하여 산행을 마친다.
간소한 뒤풀이
라제통문 (羅齊通門 ) – 신라와 백제의 소통구간
돌아오는 길에 잠시 ‘라제통문’ 휴게소에 들렀다. 옛날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다는 이곳에 일제시대 무주와 김천을 연결하는 도로를 낼 때 높이 5~6 미터 길이 30 ~ 40 미터의 터널을 뚫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명소가 되었다.
4일간의 징검다리 연휴의 마지막날이라 서울로 귀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고속도로가 곳곳 밀렸으나 버스전용차선은 정체가 심하지 않아 세 시간 만인 9시 30분경 양재역에 도착했다. 서울은 오후 2시부터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집으로 가는 짧은 길에 비옷으로 몸을 덮고 걸었다. 새벽에 시작한 하루 일과가 10시 30분이 되어 모두 끝났다.
라제통문 앞 휴게소
라제통문 앞 설천교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