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그 추억- 히말라야에서 펼친 의료봉사
네팔인, 한국을 사랑하게 한 김명호 명예교수
한국이 설립한 병원이 병 잘 고친다 소문
네팔은 수력발전과 신재생에너지 사업 유망
네팔은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내륙 국가로 네팔의 정식 국가명칭은 네팔연방민주공화국(The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Nepal)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히말라야 등반으로 친숙하며 서울시립대 산악팀(환경공학과 이동훈 교수(퇴임)도 네팔을 자주 찾았다.
네팔은 중국·인도·독일·미국·캐나다·스위스 등 유럽국가와 국제기구 원조에 의존하며 주로 농업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체제이다.
유럽 국가들은 주로 코뿔소, 야크 등 네팔의 동식물들에 대한 생태연구와 보호를 위한 지원을 한다.
농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이 넘으며 노동력의 9/1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체 토지 면적 가운데 경작이 가능한 땅은 1/5 정도를 넘지 않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네팔의 국교는 힌두교(약81%)이지만 불교(11%)와 이슬람교(4%)도 공존하며 카투만두나 포카라를 거닐다보면 고풍스러운 옛 종교사원들이 눈길을 모으지만 보존관리가 취약하여 낡고 부서져가는 사원들을 보게 된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수도인 카트만두 서쪽 언덕에 있는 불교 사원으로 원숭이들이 많이 살고 있어 ‘원숭이 사원’으로도 불리는데 사원을 들어서기 전부터 관광객 반, 원숭이 반으로 혼을 빼놓는다.
군주국에서 2006년 민주화 운동 이후 2008년 람 바란 야다브 초대대통령이 7년간 집권했으며 2016년 이후 현재는 비디아 데비 반다리 여성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보다는 당으로 이뤄지고 있는 정치적 세력들의 다툼이 심하다.
국내 기업들은 2010년 초반부터 국내 엔지니어링과 건설사들이 발전소 건설 등을 뛰어들기 시작했는데 부디간다키 수력사업(341 MW,5억2천만 불)에는 GS건설, 서부발전이, 베리3,4 댐 수력사업(600MW)에는 대우, EPC솔루션이 사업을 추진한바 있다.(삼부토건도 네팔 시장에 진출했었으나 네팔당국으로부터 불랙리스트에 오른바 있으며 2005년경에는 한양건설(당시 정현영 소장)이 활동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네팔에 주재하는 한국 대사관 직원들에 대해서는 외교적 노력보다 비자장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던 시기이기도 하다. 국내 공기업의 경우 현지 시장논리에 적응하기보다 국내의 통상적 건설시장의 흐름에 맞춰 진행하여 갈등적 요소가 빈번하고 특히 현지 지역 인사들에 대한 존중과 협업보다는 비판적 시각으로 처세함으로서 사업 실패율이 매우 높다.)
전력사업은 매력은 있지만 발전요금이나 건설단가 등이 중국 시장가격과 연계되어 국내 기업들이 수익을 창출하기가 어렵다.
네팔은 전력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최근에도 시간대별로 전력을 공급해 주고 있으며 일부 특수층이 개별적으로 태양광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전력난에 의해 촛불 파티가 수시로 이뤄지고 있는 나라이다.
일본은 도로건설 등 기간산업을 지원하면서 반대급부로 일본 자동차등을 판매했으며 쓰레기 수거차량도 지원했지만 사후관리가 되지 않아 폐차와 같이 방치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환경국제전력연구소 김동환 박사팀이 15년 전 김명수 명예교수의 협조를 받아 네팔의 환경을 탐색하기 위해 방문한바 있다.(당시 군주제 퇴치와 공화국 선포를 하던 초기라 네팔정부가 불안전한 상태였다. 한인회 회장으로는 이경석 사장이 역임하고 있었다.)
일행은 김명수 교수의 제자인 당시 네팔 보사부차관의 안내를 받고 하루는 차관의 자택에 초청받아 식사(차관의 아내는 두 명이었다)를 하기도 했다. 매우 소중한 기억으로는 토마토케첩의 세계적인 기업인 하인즈의 대표회장이 딸과 함께 여행 온 네팔의 고풍스러운 카페에서 함께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식사 후 술자리에서는 라이브연주에 맞춰 딸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는데 그렇게 헤어진 후 다음날 히말라야 정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랑곳에서 다시 만나는 재회의 기쁨을 맛보았다.
하인즈그룹 총수의 딸이 유엔 기구에서 활동하면서 네팔의 자연환경 연구와 지원을 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네팔을 사랑하고 있다는 미래설계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하인즈사는 네팔에 후원을 하고 있는 기업이다.)
네팔은 수력발전, 댐건설을 비롯하여 마을공동상수도, 하수처리시설, 폐기물처리시설, 신재생에너지 사업, 소수력사업 등 환경문제에서 우리나라가 진출할 수 있는 사업들이 많은 나라이다.
최근에는 카투만두의 하비에르 대학에서 운영하는 바그마티 강가의 빈민촌 아이들을 위한 파이 스쿨과 한국의 샬트르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에듀센터 공부방 아이들에게 겨울 외투 나눔 등 다양한 곳에서 지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코이카(KOICA, 1991년 설립)를 중심으로 주로 교육과 의료지원 사업에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네팔과 한국과의 인연은 민간 의료봉사로부터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였던 김명호 교수(1923년생)가 네팔과 인연을 맺으면서 네팔국민들에게서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면서이다.
김 교수가 활동하던 시기는 군주제 시대였으며 2007년 군주인 왕 퇴치 운동이 일어났지만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했고 공산당 조직에서도 마오이스트(중국과 연계), 뷰엠엘파의 정권다툼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김명호 교수와 네팔의 인연은 1991년 7월 산골인 돌카마을(인구 5천명)에 한국선교병원인 가우디상카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여 1997년에는 바랏트폴 보건대학을 설립하여 10여 년간의 의료봉사가 첫 단추이다.
당시 네팔에서의 활동을 회고하는 글에서 김명호 교수는 ‘내가 있는 돌카에서 수도 카투만두까지는 136km, 해발 3천m가 넘는 산등성이로 차로도 6시간이나 걸린다, 하루에 100-150명을 진료하며 2주에 한 번씩 카투만두로 나들이를 한다.’라고 기술한다,
김명호 교수는 1945년 대구 의학전문학교(경북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 보건대학원 졸업(1955년), 캘리포니아대학 보건대학원 수료(1962), 연세대 대학원(의학박사, 1965), 서울대 의과대 강사(1956-1957),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1957-1989)로 재임했으며 한국 보건교육, 건강증진학회 명예회장을 지낸 인물로 우리나라 환경문제를 사회적으로 파급시킨 고 권숙표 박사와 호흡을 함께 한 인물이다. 연세의대에서 교수와 고양군 보건소장을 겸직 했고 평생 의료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2001년 네팔 정부로부터 특별공로상(교육부장관상)을 받았으며, 2008년 대한의사협회 화이자 국제협력특별공로상, 2015년에는 서재필의학상을 수상했다.
일반적인 건강상식 저서로는 “내 몸 아프지 않는 기적의 건강법”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100세 시대 “의사가 권하는 노년기 건강관리”를 편역한 바 있다.
해외봉사를 결심한 동기로는 ‘1957년 네팔에 온 영국의 젊은 여성 사회사업가 매리 컨디는 험악하고 안 좋은 여건 속에서도 33년간이나 의료와 사회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정식으로 의학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돌팔이보다 낫다>라는 그녀가 쓴 책에서 여성들의 특별한 용기에 대한 글에 감명을 받았다, 또 1954년 4월에 네팔의 오지 앰피팔에 와서 30여 년간 기독병원을 세워 운영한 미국 의료 선교사 토마스 헤일 씨 부부의 모험담을 저서 <신식의사 산촌에 오다>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여성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러너 오스트롬 인디에나 정치학 석좌교수는 지속가능한 자원 생산과 생태계의 상호작용에 대한 공유자원 (삼림, 원유, 목축지, 관개 시스템 등)연구를 위해 네팔의 당(Dang)마을에서 주로 관개 시스템 관리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천연자원을 관리하고 생태계 붕괴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시도를 사회가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가와 시장의 이분법적인 접근법을 반대하고 자치제도의 활성화가 공유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힌바 있다.
김 교수는 네팔의 현실에 대해 ‘네팔은 빈곤과 질병 속에 신음하면서도 의료 보건은 매우 미흡하다. 총 인구는 2,200만 명이면서 의사는 겨우 2천명으로 보건조직이나 기구는 중앙보건부에서 시, 군, 면단위까지 잘 짜여있지만 실제로 지방 농촌이나 산촌은 보건지소는 있어도 의료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이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김 교수는 보건인력의 훈련 및 양성을 돕는 사업에 인생 설계를 굳히게 된다.
그 첫 삽이 사단법인 장미회가 모은 재정 10만 달러로 오지인 가우리 상카병원을 설립하여 2명의 간호선교사, 취사담당 정백림 권사, 18명의 현지 조수들과 협력하여 의료행위를 하면서 지역사회로부터 병을 잘 고치는 병원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네팔은 힌두교 국가로 기독교 행위를 할 수 없다. 힌두교에서 타 종교로 개종하면 7~8년의 체형을 받아야 한다,
상카병원은 건평 200평, 3층 건물로 1층에는 진료실과 약국, X선 병리검사실, 치과, 2층에는 15명을 수용하는 입원실과 소수술실, 3층은 의사, 간호사 숙소와 취사실이 마련된 구조이다,
가우리 상카병원장을 마감하고 1997년부터는 가우리샹카병원, 브타닐칸다직업훈련소, 네팔 간쯔 고아원의 관리와 바랏트폴 보건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연세대 원주캠퍼스 초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한 김 교수는 코이카로부터 2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아 학교부지 1만4천 평과 건물 10동을 불하받아 설립하게 된다.
저개발국의 의료수준에 대해서는 인도에서 의학공부를 한 의사들은 보통수준이지만 구소련에서 의술을 배운 사람들의 의술 수준은 낮은 편이라고 평가한다,
네팔은 1978년 처음 국립의대가 설치되었고 1995년과 1996년 사이에 사립의대가 6개소 설립되었다, 의대 교육 본과 4년제 교육과정을 2년 반으로 줄여 보건조수과정을 설치하여 2년은 강의, 실험실습을, 졸업 전 반년은 보건소와 시·도립병원에서 현장실습을 하는 과정이다,
네팔의 17개 국립기술대학과 사립기술대학은 대부분 1~2년 과정이다.
김명호 교수의 네팔 의료봉사는 결국 네팔국민들에게 한국의 좋은 이미지와 의료과학의 선도적 국가임을 명확하게 심어주었다.
“히말라야는 나를 응원해 주었다, 히말라야 산맥의 거대한 운봉을 바라보면 수 백년 자란 거목들이 거친 바람에도 꿋꿋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육신이 쇠해져도 히말라야에 있는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곧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백수의 복을 누리리라.
삶은 젊은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인생은 늙은이의 것이기도 하다. 노인은 더 깊이 생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그만큼 높은 산에 올라와 있다.” 라며 인생 노년 찬가를 부르기도 했다.
본 글은 김명호 교수가 네팔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면서 집필한 ‘네팔사역 10년-비전과 실천의 삶’에서 참고하였다.(네팔의 단어: 우동-툭파, 치킨-세쿠와, 호떡-로띠, 인도-난, 2015년에는 포카라에서 동쪽으로 80km지점에서 7.8의 강진이 발생하여 2,30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환경국제전략연구소, 김동환소장, 환경경영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