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公 전문적 묘비명 (進士公 諱 文績 墓碑銘)
[명종17년 임술년(1562년)- 선조39년 병오년(1606년)]
공(公)의 성(姓)은 전씨(全氏)요. 휘(諱)는 문적(文績)이요. 자(字)는 사립(士笠)이고 호(號)는 소계(素溪)이다. 석릉군(石陵君) 휘(諱) 윤장(允臧)의 후손(後孫)이라.
8대조 휘(諱)는 인권(仁權)할아버지께서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가 고려말(高麗末)이 되어 운(運)이 기울어질 무렵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직(官職)을 버리게 되었다. 강릉(江陵)으로 낙향하여 경포(鏡浦) 남산(南山) 기슭에 관심정(寬心亭)을 건립(建立)하고 중양가(重陽歌)를 지어 지역사회(地域社會)에 널리 전파(傳播)하였다.
증조부(曾祖父) 휘(諱) 성명(性命)은 조산대부 행 동몽교관(朝散大夫 行 童蒙敎官) 간성훈도(杆城訓導), 강원도학관(江原道學官)을 역임하였다.
조(祖)의 휘(諱)는 공신(公信)이니 성균생원진사(成均生員進士)하셨고 아버지는 휘(諱) 우(瑀)이니 계공랑(啟功郎)이시다.
공(公)이 명종 임술(壬戌) 3월 13일에 출생(出生)하셨고 재예(才藝)가 남보다 뛰어나게 익혔고, 부모(父母)에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세상 사람들께 숭앙(崇仰)을 받았다.
선조 갑오(甲午)년 진사 급제(進士 及第)하니 조정(朝廷)에서 그 재주의 뛰어남을 표(表)해 집경전(集慶殿) 집사(執事)를 수임(受任)하여 임무(任務) 수행(修行)중에 신미(辛未) 3월에 불행히도 집경전(集慶殿)이 화재(火災)가 나서 이를 구출(救出)하지 못한 책임(責任)을 물어 파직(罷職)당하고 옥(獄)에 가두었다가 곧 사면(赦免)되었다.
그 후 선조 병오(丙午)년 8월 6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45세의 아까운 나이라 향인(鄕人)들이 애석(哀惜)해 하였다.
배(配)는 강릉김씨(江陵金氏) 선(銑)의 따님이라 성품(性品)이 온화(溫和)하여 가도(家道)가 정숙(靜肅)하고 항상 덕(德)을 지니고 있어 향인(鄕人) 모두가 탄복(歎服)하였다. 명종 갑자(甲子) 1월 20일에 나시고 선조 신축(辛丑) 9월 6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38세로 조사(早死)하시었다.
[ 명종 갑자년(1564)--- 선조 신축년(1601) ]
슬하(膝下)에 자식이 없어 계자(系子)로 경섬(景暹)을 입후(入后)하니 생부(生父)는 학정(學正)공(公) 문서(文緖)이시다.
강릉시(江陵市) 사천면(沙川面) 사화(沙火) 운계동(雲溪洞) 해좌(亥坐)에 쌍봉(雙峯)으로 장사지내고 석물(石物)을 하고 비문(碑文)을 평릉찰방(平陵察訪) 이초노(李楚老)가 명(銘)하니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었으니/天作高山
하늘과 땅 사이에 신령한 기운이 씨실과 날실처럼 가득하였도다./靈氣間績
음덕이 후손에게 이어지고/後孫蔭德
하늘도 도와 줄 것을 기원합니다. /天神助佑
선교랑(宣敎郎) 평릉찰방(平陵察訪) 이초노(李楚老) 찬(撰)
◎ 이초로(李楚老) 공덕비
[尙州牧使 李楚老 淸簡 愛民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