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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교법문) 1. 신과 부처
돈교법문(頓敎法門)이란 곧 육조대사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곧장 참성품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가르침의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돈교법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과 부처에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무엇을 신이라고 할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우리는 오직 불교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불교에서는 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불교에서는 초기불교시대에서부터 이 문제는 심각한 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 이 문제는 곧 자신들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듣고서 귀의한 모든 제자들은 이전에 어디에 있었을까요? 부처님의 십대제자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대승경전에서 항상 등장하는 1250인의 비구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들은 이전에 모두 신을 추구해 왔었습니다. 그 신이 바로 브라흐만입니다. 이처럼 신을 추구하는 가르침의 집단을 불교에서는 외도라고 부릅니다. 외도란 곧 내도(內道)의 반대입니다. 불교를 안의 도라고 하면 불교 이외의 모든 가르침을 불교 밖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외도(外道)라고 부릅니다.
결국 석가모니부처님의 모든 제자들은 출가하기 이전에 이미 외도들의 영향을 강렬하게 받아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인도에는 96종류의 외도가 존재하였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처음 깨달음을 성취하고서 줄곧 이와 같은 외도들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 기간은 수십 년에 달합니다.
마침내 모든 외도들을 굴복시켰기에 영웅 가운데 영웅이라는 의미에서 대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대 영웅을 모셔놓은 사당이 곧 대웅전입니다.
저 96종류의 외도들의 핵심은 브라흐만에 있습니다. 브라흐만은 곧 이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고 거두는 범신(梵神)을 가리킵니다. 범신이란 사실 범과 신의 합성어입니다. 범이란 곧 지고하면서도 깨끗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범은 곧 자성(自性)을 가리킵니다. 자성이란 곧 자신의 성품, 스스로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왜 스스로의 성품일까요? 이 신의 성품은 외부의 어떤 것을 의지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원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신의 성품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스스로의 성품이 곧 범이며 브라흐만입니다.
인도의 힌두교나 우파니샤드 등 모든 외도들은 모두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브라흐만은 곧 최초의 절대적인 존재이고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이들이 말하는 절대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이나 중국에는 이러한 개념이 없을까요?
열자의 천단편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상은 형상이 없음에서 생겼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어떻게 생겼는가? 예로부터 말하기를,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다’고 하였다. 태역이란 아직 기운이 나타나지 않는 시기이다. 태초란 기운이 처음으로 생기는 시기이다. 태시란 형태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태소란 본질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이다.
역에는 형태와 경계가 없는데, 역이 변화하여 하나가 되고 하나가 변화하여 일곱이 되고 일곱이 변화하여 아홉이 되고 아홉이 변화하여 궁극이 되어서 다시 궁극이 변화하여 하나가 된다. 하나는 형태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초이다.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서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서 땅이 되고 두 기운이 화합하여 사람이 되었다. 때문에 하늘과 땅이 정기를 머금어서 만물이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열자의 이러한 말은 신이 우주를 만들고 만물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과학에서는 어떻게 말할까요?
고전물리학에서는 이 우주는 오직 하나의 특이한 점에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이 특이한 점이 어느 순간 빅뱅을 일으켜서 우주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을 모르는 고대시대의 우주관과 오늘날의 우주관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이 모두를 창조했다는 주장과 어떤 신의 개입도 없이 그저 저절로 생겨났다는 주장이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애초에 이러한 우주관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체의 우주 자체를 신기루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신과 우주관을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팔만겁 이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팔만겁이라는 시간 이전까지를 경험한 자에게는 이것이 곧 진실로 받아드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성품을 깨닫기 위해서는 삼아승지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승지겁이라는 시간은 팔만겁으로는 비교할 수조차도 없는 시간입니다. 저 아승지겁의 시간을 세 번 지나간 눈으로 바라볼 때, 이 삼천대천의 우주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처의 눈으로 볼 때, 브라흐만의 신조차도 허망한 존재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라흐만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브라흐만은 우주의 시작이고 만물을 짓는 어머니와 같다고 말합니다.
인도의 신비주의자 카비르는 노래합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실제가 자기 집에 있는 걸 못 보고
그대는 숲에서 숲으로
끝도 없이 헤맨다.
여기서 ‘실제가 자기집에 있다’는 것은 곧 브라흐만이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을 곧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부릅니다. ‘아뢰야’라는 발음은 저 ‘야훼’라는 발음과 매우 흡사합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신이 말하기를 자신의 이름은 야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브라흐만이라는 신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부처의 본질이 곧 브라흐만이라면 어찌 영웅 가운데 영웅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부처의 성품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부처는 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