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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시인 / 빈민촌(貧民村)
빈 터는 그 중간 쯤에 놓여 있다.
벗어진 이마를 숙이고 자갈돌들이 깊은 생각에 묻혀 있다.
지나는 굴다리 옆으로 눈이 퀭한 반디꽃들과 그 속에 뼈를 묻고 엎드린 녹쓴 선로(線路)가 둘.
저 끝 적탄장(積炭場)에 한나절 동안 실어다 쌓은 재난(災難)과 목숨이 끊긴 어스름들.
길 가운데 시커멓게 썩은 몸을 버리고 빗물이 들길을 가고 있다.
끊어진 기적(汽笛)소리의 그 시체들이 빈 터 속에 나가 떨어진다.
읍 기행, 현대문학, 1977
노향림 시인 / 빈 집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안 와? 손님들의 우스갯소리들이 달그락거리며 빈 찻잔 위에 놓여 있다.
어딘가 사람이 있을 거야, 물 젖은 샴푸냄새 낀 체취가 떠돈다. 휴지통을 뒤지다가 겨우 잠든 우스갯소리들.
그 곁 재떨이 위에 눈감고 누운 정적(靜寂)이 영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사람밖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 사람 말고 또 누가 와?
성에 낀 유리창 목 부러진 형광등 불빛도 차츰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사람 살지 않는 어딘가에 흐린 나뭇잎 사이 나뭇잎 발자국 소리 하나.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노향림 시인 / 서쪽 하늘
새소리들이 쌀톨처럼 서쪽 하늘에 흩어졌다.
고개를 처박고 하체를 흔드는 소리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어린 날이 보인다.
빗줄기들이 발소리를 굴리며 어느 구름 끝에 뛰어다니는지
흐린 날 하늘 끝에서 폐를 부풀리는 나무
히스트라짓 냄새 가득한 바람이 햇볕이 하늘에 기대어 쓰러져 있고
누가 그걸 일으켜 세우는지 서쪽으로 하얗게 삭아서 날이 저문다.
나무들이 뚫린 입으로 가득 저녁을 물고
같이 삭는 소리.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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