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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 죄인 명단[正法罪人秩]
1. 정철상(丁哲祥) (사학징의 p.69~70) * 가롤로, 福者 : 정약종의 아들이다. 1801년 2월 26일 국청(鞫廳)의 분부로 신문하고 조사했다. 4월 2일에 사형을 당했다.
형추문목 : 너는 사학의 남은 종자로 어려서부터 사학에 물들어서 네 아비의 악을 도왔고, 심지어 집에 있을 때는 네 조상의 제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가 중에서 힘껏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고, 송곳으로 찔렀어도 또한 변하여 고치지 않았다. 그 깊이 빠져든 형상은 이미 만 번 죽인다 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이른바 사학에 어떤 미혹될만한 것이 있길래 이처럼 깊이 빠졌더란 말인가? 제사는 바로 사람 된 도리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도, 무슨 뜻으로 폐하여 행하지 않을 것을 생각했는가? 이른바 사학의 신부는 바로 네가 높여 받들어 속아서 미혹된 자이다. 그 사람의 성명은 무엇이며, 오가며 따라 다닌 것은 무릇 몇 차례인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하였는가? 지금에 이르러 정상이 탄로 났으니 비록 숨겨 감쳐려 해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감히 버티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렸다.
형추초 : 저는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종대부(從大夫) 께서 사학을 금지하며 신부에 대해 바른대로 고하라는 뜻으로 송곳을 들어 찔렀지만 과연 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신부는 바로 강남의 주가(周哥) 성씨로 부르는 사람인데, 그 본국에서의 이름은 혹 다목이(多木耳) 또는 백다(白茶)라고 합니다. 갑인년(1794)에 우리나라로 나왔는데, 데려온 사람은 지황입니다. 사학하는 사람들이 신부라 일컬었고, 그 이름을 부를 때는 그 본국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행세한 이름에 이르러서는 따로 서로 불렀기 때문에 실로 들어 알지 못합니다. 신부는 몇 차례 제집에 와서 머물렀고, 제가 최창현의 집에서 신부를 본 것 또한 수차례 됩니다. 그래서 사학을 강론하였습니다.
승관초 : 저저는 조정에서 금지하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요사스런 그림과 요사스런 이야기를 높여 받들어 몹시 믿어 온 고을을 그르쳐 잘못되게 하였습니다. 주문모를 머물게 하여 즐겨 사학의 소굴로 만든 죄는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결안초 : 저저는 사학에 깊이 빠져, 아비는 전하고 자식은 익혀,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요망한 스승을 죽음으로 지키려고 송곳으로 찔러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문모를 모셔두고 흉악한 무리와 모여, 개돼지 같은 행실로 윤리를 버리고 상도를 무너뜨린 죄는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2. 이합규(李鴿逵) (사학징의 p.70~74) : 전복(典僕) 이인찬(李寅璨)의 아들이다. 1801년 2월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가 돌아와, 4월 2일에 사형을 당했다.
포청초 : 저는 제 어미에게 사서를 배웠고, 혈당(血黨)은 최봉득(崔鳳得)과 조예산(趙禮山) 집안의 이름을 모르는 이생원(李生員)과 김가(金哥) 및 최창현, 최필제, 홍문갑, 황사영, 김백심 등입니다. 홍문갑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각처에서 온 여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늘어 앉아 주문모에게 강의를 들었습니다. 또 손덕장(孫德章: 손인원)과 정달도(鄭達徒: 정인혁, 달도는 다두, 즉 타대오), 현가(玄哥: 현계흠), 오가(吳哥: 오현달), 김이우(金履禹) 등과 함께 매달 7일에 김이우의 집에 일제히 모여 사서를 강론하였습니다. 작년 6월에 제가 김이우의 집에 갔더니 현계흠과 손인원, 김이우 등이 주문모를 모셔두고는, 첨례날이라고 하며 아래 사랑 벽장 속에 예수상을 걸고 장막으로 가리고, 방석을 깐 뒤 여러 사람이 사서를 강습하였습니다. 김이우 집안의 여인들은 창밖에 있으면서 엿들으며 강습하다가 파하였습니다.
2월 초에 제가 형조와 포청의 이야기를 듣고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남대문 안 김가의 집에 가서, 김백심과 만나 은밀하게 숨을 일을 모의하였고, 편지를 써서 홍문갑의 어미에게 보냈더니, 홍문갑의 어미가 용호영 안 늙은 할미의 집을 가리키며 보냈습니다. 황사영이 먼저 그 집에 와있었으므로 며칠 동안 함께 머물러 잤습니다. 뒤에 십자교(十字橋)의 이름을 모르는 김가의 집으로 가서 쉬었는데, 주인이 싫다며 쫓아내는 통에 황사영이 먼저 나오고, 저는 김백심과 뒤따라 나왔습니다. 그래서 황사영이 간 곳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용호영의 늙은 할미가 금부도사에게 붙잡혀서, 저는 동네 어귀 안쪽의 이름을 모르는 최가(崔哥)의 집으로 돌아 들어가 5,6일간 머물러 자고, 뒤에 이인채(李仁采)의 집으로 옮겨 가, 함께 배운 사람인 곽가(郭哥)를 찾아가 하루밤을 머물러 잤습니다. 반촌(泮村)안으로 가서 돈 스무 냥을 주고 작은 집을 사서 들어가 지낼 때, 제 외삼촌 숙모가 여종 소명(小明)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제 아비는 형조에 붙잡혔고, 외숙모는 달아나 피했으며, 저 또한 붙잡혔으므로 그 뒤에 간 곳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김백심은 이인채의 집에 머물며 지냈기 때문에 그 뒤에 간 곳과 황사영이 간 곳은 다시금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부인 주문모는 언제나 홍문갑의 집에 있었으니, 그 뒤에 간 곳을 홍문갑의 어미가 절대 모를 리가 없습니다.
형추문목 : 너는 본래 반촌의 하인으로 오래도록 사학에 미혹되어 흉악한 무리와 체결하여 종적을 숨겨 속인 정상이 이미 탄로 났다. 뿐만 아니라 네가 그들 중에서도 걸출한 자로 일컬어진 것을 조조이(趙召史)가 공초에서 말하였고, 여러 번 한신애가 맞아오게 한 것을 간지대 정복혜가 증언하였다. 달아나 숨어 지내다가 붙잡히고도, 주교주(周敎主)라는 칭호로만 정녕코 공초를 바쳤고, 포청으로 옮겨가 갇혀서도 황사영이 가고 온 것을 분명하게 자백하여 몹시 흉악한 정황이 거의 다 드러나게 되었다. 당초에 어떤 사람에게 요술을 배웠으며, 어디에서 무리와 맺었는가? 교주 주가와는 몇 번이나 서로 만났고, 뒤얽힌 것은 어떤 일이며, 무리를 같이 한 자는 누구인가? 황사영이 달아난 곳은 몇 곳이나 따라갔으며, 주인으로 맞아들인 자는 누구인가? 함께 모의한 것은 어떤 일인가? 이제 엄한 조사 아래 감히 터럭조차도 속에 감추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렸다.
형추초 : 제 어미는 김대득(金大得)의 어미에게 사학을 배웠고, 둘 다 이미 죽었습니다. 저 또한 사서를 익혔고, 또 최필제에게 가서 만나보고 서로 강론하였습니다. 제가 가르친 사학하는 사람은 최봉득(崔奉得)과 이름을 모르는 김가(金哥) 등입니다. 사서는 한문으로 된 『삼본문답(三本問答)』 1권과 언문 1권, 『진도자증(眞道自證)』 2권, 한글본 『성교일과(聖敎日課)』 2권을 손가(孫哥)의 어미에게 빌려 주었는데, 듣자니 서울에서 달아날 때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함께 한 무리는 조예산(趙禮山: 조시종) 집과 최창현, 최필제, 홍문갑, 황사영, 이생원 및 김백심 등으로, 홍문갑의 집에서 모여 각처의 여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줄 지어 앉아서 주문모에게 강의를 받았습니다. 또 손덕장(孫德章: 손경윤)과 정달도(鄭達徒: 정인혁), 현계흠, 오현달, 김이우 형제 등과 함께 매달 7일에는 김이우의 집에 일제히 모여서 사학을 강론하였습니다. 지난 해 6월에 제가 김이우의 집에 갔더니, 앞서 말한 현계흠 등이 신부 주문모를 모셔와서 머물러 잤습니다. 첨례일에는 김이우 집의 벽장에 예수상을 걸어놓고 휘장을 치고 방석을 깔아 여러 사람과 함께 사서를 강습하였습니다. 김이우 집안의 여인들은 창밖에서 강습하고 외우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금년 2월 초에 제가 형조와 포청에서 기찰하여 체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숨어 피할 일을 모의하다가, 김백심이 홍문갑의 어미에게 편지를 쓰자, 홍문갑의 어미가 용호영 안의 늙은 할미의 집을 지목하여 보내므로, 저와 김백심이 바로 그 집에 갔습니다. 가보니 황사영이 먼저 이미 와 있었습니다. 며칠 뒤에 십자교(十字橋)의 김가네 집으로 가서 쉬었는데, 주인이 싫다고 내쫓아서 황사영은 먼저 나가 이미 간 곳이 없었으므로 제가 이에 반촌(泮村)에 숨었다가 체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승관초 : 제가 노소를 막론하고 도처에서 세례를 준 정황을 어찌 감히 발뺌하겠습니까? 사학을 가르친 사람은 이미 말씀 드린 세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그르쳐서 잘못되게 한 죄 또한 면키가 어렵습니다. 홍문갑의 집에서 무리 지어 모여 주문모가 강학하는 자리에 남녀가 서로 뒤섞인 곳에 동참하였고, 또 황사영의 무리와 더불어 숨어 피할 것을 모의하여 몇 곳에서 함께 머문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결안초 : 저는 본래 반촌의 백성으로 도리어 사술을 배워 부녀자를 모아 남몰래 가르치 꾀고, 도처에서 세례를 주고, 주문모를 높여 받들어 김이우와 강완숙의 집에 맞아 들여, 한 세상을 속여 미혹시킨 죄는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3. 최필제(崔必悌) (사학징의 p.74~77) 福者 : 최필공의 아우이며, 사호는 백다록(白多祿: 베드로)이다. 1800년 12월에 체포되어 포도청에 이송되었다가 다시 붙잡아 왔다. 1801년 4월 2일 사형을 당했다.
포청초 : 저는 경술년(1790)에 이존창에게서 처음 사서를 배워, 정인혁과 함게 모여 강론하였습니다. 같은 무리는 남필용(南必容), 백상옥(白尙玉), 황사영, 신여권(申與權), 손경윤, 손경욱 형제 및 그 종제인 손준열(孫俊烈) 등입니다. 이 7인 중 백상옥은 임자년(1792)에 이미 죽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제가 이합규, 손경윤, 현계흠, 손준열, 오현달, 김현우와 함께 김이우(金履禹)의 집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사서를 외우고 익혔습니다. 그 뒤 또 앞서 말한 여러 사람 들과 새벽에 김이우의 집에 가면, 홍문갑의 집에서 신부를 모셔 와서 첨례라고 하면서 벽장안에 예수의 화상을 걸고, 휘장을 드리우고 방석 등의 물건을 깔아둔 채, 신부는 윗자리에 앉고, 저희는 열을 지어 앉았습니다. 창밖에는 김이우 집 여인들 또한 앉아서 강송하였습니다. 제가 홍문갑의 집을 왕래할 때 들으니, 현계흠은 별호가 불록(茀祿: 플로로)이고, 벽동(碧洞)은 정광수입니다. 정가의 자는 여해(與偕諧)라 불렀고, 별호는 파이납백(巴爾納伯: 바르나바)입니다. 황사영은 별호가 아륵숙(亞肋叔: 알렉시오)이고, 최필공은 별호가 다묵(多黙: 토마스)입니다. 제가 형조에 갇힌 뒤로는 황사영의 거취를 애초에 알지 못합니다.
형추문목 : 너는 본시 최창현, 최필공의 가까운 친척으로 이존창, 권일신의 한 무리가 되어 길 가운데 몸을 두고 상하의 흉악한 무리를 이어주었다. 약국이라 이름을 내걸어 놓고 오가는 요망한 사람을 모아다가 남몰래 사학의 소굴로 만든 것이 오래되었다. 신해년(1791)에 체포된 뒤에 형조에서 10줄로 된 미혹함을 열어주라는 거룩한 교지를 이미 배포해 유시(諭示)하였고, 또 작은 징계로 큰 경계를 삼는 엄한 형벌로 위엄을 보였다. 그런데도 너는 고집스럽고 미혹된 견해로 계속해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제 아비가 울면서 애걸해도 끝내 뉘우쳐 깨닫지 않았으니, 사람된 이치가 모두 끊어져,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그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라’는 임금의 뜻을 가지고 네 아비에게 너를 내어 주며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게끔 하였었다. 하지만 달이 쌓이고 날이 지나자, 비록 허물을 뉘우치겠노라 공초를 바쳤으나 사실은 권면하여 일깨움에 급박하여 말과 낯빛 사이에서 덮어 가리기가 어려워 어거지로 대답한 것임을 공초에서 스스로 밝혔으니, 그래도 조금의 인심은 남았다고 할만하다. 다만 이리의 성품은 길들이기 어렵고, 올빼미의 심보는 씻어내지 못한지라, 살아 옥문을 나오자 요사한 술법을 죽기로 지켰다.
계축년(1793) 이후로 다시 큰 길거리에다 약국을 열었으니, 그 왕래하며 모인 곳과 아침 저녁으로 강론한 것은 황사영과 손경윤의 무리였다. 그 악업이 날로 쌓임에 미쳐, 하늘의 도리가 환히 드러나, 형조의 금리(禁吏)가 잡스런 노름을 하는 줄 알고 붙잡은 것이 바로 요서를 강론하는 자리였다. 네가 비록 주둥이가 길다 해도 살기를 도모함이 없을 것이다. 감히 또 사악함을 부려, 네 아비의 근심이 절박하여 기운이 꽉 막혀 옥문 밖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그제서야 감화되겠다는 뜻으로 힘쓰겠노라 응낙한 것은 대개 그 간악한 마음이 더욱 은밀해지고, 흉악한 계획이 더욱 비밀스러워진 것이니, 신해년(1791)에 위협이 급박하였어도 더욱 방자하게 버텼던 것이 오히려 진정이었다고 할만하다.
지금은 문득 옥사에 노련해져서 간악함이 생기고, 고통이 오래 되다 보니 능히 참을만해져서, 계속해서 가려 숨기고 달아나 벗어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아침에는 감화되었다고 하고, 저녁에 또 깊이 미혹 되니, 모두 이존창과 한가지 모양새이다. 어찌 혹 흉악한 술책에 다시 속겠는가?
대저 포청으로 옮긴 뒤에 다만 내력과 정황을 하나하나 실토했을 뿐 아니라, 또 죄인 이합규의 공초에서는 그의 혈당인 아무개와 아무개 중에서 반드시 너를 우두머리라고 일컬었다. 종종 홍문갑의 협방(挾房)에 모여 각처에서 모임에 온 여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신부라 부르는 주문모에게서 강의를 들었고, 또 김이우 집에서 현계흠, 손경윤 등과 함께 첨례의 여러 도구를 배설하고 신부에게서 강의를 들었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네가 스스로 감화되었다고 한 뒤에도 요망하고 흉악한 정황이 더욱 낭자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발뺌하겠는가? 이제 엄한 조사 아래 감히 앞서처럼 얼버무리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렸다.
형추초 : 금번 본 형조에 체포되었을 때, 같이 사서를 강론한 사람은 오현달과 충주 아이 구석이(具碩伊), 종현(鍾峴)의 이태량(李太良), 생민동(生民洞)의 이범이(李凡伊)입니다. 이밖에 서로 친한 사람은 신여권입니다. 계축년(1793)에 제 약국에서 약을 지을 때 말뜻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으므로 피차간에 허교하여 몇 차례 와서 보았는데, 말이 사학에 미치자 서로 좋은 도리라고 일컬는 것이 마치 소리와 그림자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학을 깊이 믿어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았고, 조정의 금지도 있지 않았습니다. 신해년(1791)에 체포될 때는 겉으로는 감화된 듯 하였으나 속으로는 실로 고치지 않아, 또 다시 강습하였고 도처에서 잘못 그르쳤을 뿐 아니라, 주문모를 높여 믿어 신부라고 부른 죄는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결안초 : 저는 신해년(1791)에 목숨을 살려준 흉악한 무리로, 조정의 덕스런 뜻을 생각지 않고 묵은 버릇을 고치지 않아, 다시금 사학에 빠져 요망한 무리와 체결하였습니다. 주문모에게 모임을 약속하고, 저녁에 모여 새벽에 흩어지며 많은 사람을 잘못되게 그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아비가 여러모로 금지하였으나, 끝내 깨달아 듣지 아니하여, 제 아비로 하여금 병들어 죽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제가 사학을 위하는 마음은 죽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니,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4. 정인혁(仁赫) (사학징의 p.77~79) 福者 : 성은 정(鄭)이고, 사호는 달도(達徒: 타대오)이다. 1801년 2월 초9일에 붙잡혀 와서, 포도청에 이송되었다가 돌아와 4월 초2일에 사형 당했다.
포청초 : 저는 갑인년(1794)에 백상옥(白尙玉)에게서 사학을 처음 들었습니다. 제가 제사를 폐한 한 가지 조목은 그 학문이 제사를 크게 그르다고 하므로 영원히 폐기하였습니다. 책자는 최창현에게서 언문 책자 5권을 빌려서 보았습니다.
형추문목 : 사술이 윤리에 어긋나고 백성의 마음을 속여 미혹시킴은 천지가 있은 이래로 있지 않았던 하나의 변괴이다. 무릇 떳떳한 성품을 지닌 자라면 오직 독사나 더러운 벌레처럼 이를 피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너는 무슨 심보로 백상옥에게서 사학을 배웠으며, 최필제와 어지러이 상의하여 미혹된 것에 더욱 미혹되고, 빠진 것에 더욱 빠져 들었느냐?
예전 신해년(1791)에 형조에서 조사할 때, 네 아비 정도홍(鄭道弘)과 네 형 정사혁(鄭師赫)의 공초에서, 네가 최필공과 더불어 성이 다른 친척이 되고, 현계온(玄啓溫)과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밤낮 서로 좇아 미혹되어 돌아올 줄 알지 못했다고 하면서, 비록 아비와 형이 죽음을 각오하고 금지하여 끊게하고, 친척들이 온갖 방법으로 타일렀어도, 오히려 더 깊이 믿는지라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럴진대 사람된 도리를 온통 끊은 것이 바로 너의 죄안이었다. 하지만 끝내 입으로만 그렇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은 시늉만의 공초를 잠시 살려주는 죄과에 부치고자 하였으니, 조정의 깊은 어짊과 지극한 덕이 네게 있어서는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운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앞서 비록 깊이 미혹되었더라도 감화된 뒤에는 진정이든 어거지였든 마땅히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바꿔서 삿된 길 가운데에서 스스로 빠져나왔어야만 했다.
하지만 도리어 덕을 배반하고 은혜를 꺼려 아침에 항복하고는 저녁에 배반하여, 오래된 악을 고치지 못하고, 해묵은 곳을 잊기 어려워하였다. 올해 들어서는 여러 책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또한 최창현에게 대어 주었으니, 진짜 장물이 더욱 노출되고, 죄악이 더욱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매월 7일에 손경윤, 현계흠 등과 더불어 김이우의 집에서 같이 모여 사서를 강론한 것이 바로 너였다. 이른바 신부라는 주문모를 김이우의 집에 맞이하여 왔을 때 첨례하고 강의를 듣는 등의 절차에 틀림없이 참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합규의 공초에서 단서가 이미 탄로났으니, 네가 비록 앞서처럼 얼버무리려 한들, 얻을 수가 있겠는가? 앞뒤로 범한 정황을 하나하나 바른대로 고하렸다.
승관초 : 제가 신해년(1791)에 감화된 뒤에도 옛 버릇을 고치지 않고 다시 사학에 미혹된 형상을 어찌 감히 발뺌하겠습니까? 제가 작년 봄에 최창현을 통해 김이우의 집에 갔습니다. 그 집 아랫방에 장막을 설치하고, 탁자 위에는 등촉을 밝히며, 요상(妖像)을 걸어놓고는 신부인 주문모가 상 앞에 서서 입으로 사서를 외웠습니다. 그래서 저와 최창현, 김이우 형제 등이 함께 첨례하였고, 창밖에는 4,5명의 여인이 또한 앉아서 외우며 익혔습니다. 그러다가 이튿날 새벽에 저는 돌아왔습니다. 한 달이 지난 뒤 낮에 김이우의 집에 갔더니만, 주문모 또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주문모의 발음이 분명치가 않아서 말을 주고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이우의 말을 들으니, 주문모는 바로 남경(南京) 소주(蘇州) 사람으로 별호가 약거백(若去白)이고, 이름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비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조정에서 금지함을 따르지 않았으며, 감화되었다고 해놓고 돌아서서 덕스런 뜻을 저버렸고, 주문모에게 사호를 받고 예를 행하며 사설을 깊이 믿은 죄를 자백합니다.
결안초 : 저는 오래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해묵은 곳을 잊기 어려워서, 전처럼 깊이 미혹되었을 뿐 아니라, 매월 7일에는 무리들을 한데 모아 신부를 모셔 와서 흉악한 도상을 걸고 사서를 외우며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데로 그르치고, 한 세상을 속여 미혹시켰으니, 만번 죽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5. 최인철(崔仁喆) (사학징의 p. 79~82) * 이냐시오, 福者 : 최인길의 아우이다. 포도청에서 와서 1801년 5월 22일 사형 당했다.
포청초 : 저는 제 형인 최인길에게 사서를 배웠습니다. 제 형이 포청에 붙잡혀서 물고되고 나서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깊이 쳐박혀 지냈습니다. 금년 정월에 최필공과 최창현이 형조에 붙잡혀 갇혔다는 말을 듣고는 관정동(冠正洞) 제 외숙모의 집에 피해서 지내다가 이렇게 붙잡혔습니다. 저와 몹시 친했던 사람은 김종교(金宗敎)와 최필공, 최필제, 황사영, 오현빈(吳顯彬)입니다. 황사영의 집은 매년 한 두 차례 찾아갔는데, 금년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10년간 깊이 미혹된 학문이어서 실로 등져 배척할 마음이 없습니다.
포청초 : 서양학은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대국으로 나왔습니다. 사학에는 교화왕(敎化王) 한 사람이 다만 서양국에 있고, 그에 따르는 부용(附庸)의 여러 나라에는 모두 주교와 신부의 명색만 있습니다. 또 의진사(醫進士), 도진사(道進士), 문진사(文進士) 등의 직함이 있는데, 학술이 고명한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은 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갑인년(1794)에 신부 주문모가 나와써 홍필주의 집에 숨어지낸 일은 제가 과연 허속(許涑)과 더불어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제가 붙잡힌 뒤에 신부의 거취는 실로 알지 못합니다.
포청초 : 신부는 제 형 최인길과 최창현이 계획을 세워 데려 와, 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제 형이 죽은 뒤로 최창현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그 뒤 제가 홍필주의 집으로 신부를 찾아가서 머물며 지내는 곳을 물어보니, 6년 가까이 홍필주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고 하였습니다.
형추문목 : 네가 사학에 몹시 미혹된 것은 이미 신해년(1791) 이전이었다. 그때 깊이 빠진 형상은 ‘죽음(死)’이란 한 글자를 벗어날 수가 없다. 다만 성조(聖朝)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신 은덕으로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주어 잠시 사형을 미루고 가볍게 형벌을 시행하여 징계하였다. 너는 이미 사학임을 알았고 다시는 앞서의 습성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명백하게 공초했으나 해묵은 악을 고치지 않고, 예전의 장소를 잊지 못해, 아침에 이미 공초를 바쳐놓고 저녁에 또 사학을 따랐다. 그 죄가 첫 번째로 죽일만 하다. 네 형이 을묘년(1795)에 매맞아 죽은 뒤에 사학을 원수로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형과 아우가 집안의 계책으로 보아 이를 하였으니, 두 번째로 죽일만 하다. 최필공 형제와 김종교, 황사영 등과 체결하여 독을 퍼뜨리고 악을 전파하며 하지 않은 짓이 없었으니, 세 번째로 죽일만 하다. 체포된 뒤에서 사술을 과장하여 혹 개벽 이래로부터 있었다고 하고, 혹 학술이 고명하다 일컬어, 조금도 징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이, 한결같이 깊이 미혹되었으니 여기에 이르러 네 번째로 죽일만 하다. 주문모를 설계하여 맞이해 온 일 같은데 이르러서는, 처음에 네 형 최인길과 최창현의 무리가 힘을 합쳐 함께 꾀하다가 끝에 가서는 강완숙의 집 안에 숨겨 감추었을 때, 빈번하게 왕래하며 신처럼 떠받든 것은 그 죄가 다섯 번째로 죽일만 하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있더라도 만번 죽는 것이 오히려 가벼울 것인데, 하물며 이 다섯 가지를 아울러 겸한 것이겠는가? 앞뒤의 정황은 네가 이미 포청에서 자백하였으니, 이제 엄한 신문 아래 감히 전처럼 반쯤 말하다 절반은 삼키듯 얼버무리지 말고 사실대고 바르게 고하여라.
승관초 : 저는 제 형에게 사학을 배웠습니다. 신해년(1791)에 형조에서 엄한 신문했을 때, 마지못해 감화되었다고 공초를 바쳤지만 미혹된 집착을 돌이키지 않았고, 신주를 불태워 훼손하고 제사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제 형과 최창현, 지황의 무리가 주문모를 맞이하여 올 때, 저는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뒤 최창현과 강완숙의 집에서 여러 차례 만나 사서를 강습하였습니다. 주문모를 데려올 때 들여온 재물은 나온 곳을 알지 못하나, 들으니 은자 3,4백 냥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배운 사람은 김종교와 최필공, 최필제, 황사영, 오현달 등입니다. 저는 이제 형장에 있지만, 어찌 배척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결안초 : 저는 신해년에 머리가 잘리지 않은 귀신으로, 조정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형제가 악을 함께 하여,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하였으며, 주문모를 높여 받들어 신부라 호칭하였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혈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더라도 변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