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편입한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울에 올라오기 전 시간을 내어 대천덕 신부님이 운영하시던 예수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군생활을 강원도 철원에서 하였지만 제대로 된 강원도는 예수원에 간 것이 처음이였습니다. 대전이나 서울에 있을 때 설명절때 부산에 갈 때면 주로 기차를 이용했는데 그때 창을 통해서 보게된 산들은 낮은 산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원을 가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그때 창을 통해서 바라본 강원도 산들은 부산에 갈 때 바라본 산들이 비해 높고 뾰족하였습니다. 좀더 부산에 갈때 보다 강원도 예수원이 있는 기차역에 갈때는 마치 영화속 장면처럼 신기함을 갖게 하였습니다. 영화 속 산들은 낮은 평범한 산보다 높고 뾰족한 산들이 좀더 시각적으로 의미있게 느껴지기에 제겐 강원도의 높고 뾰족한 산들은 영화속 주인공(조연이나 엑스트라일지라도)이 된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색다른 경험은 그때가 한창 추운 겨울인데 예수원이 가파른 길을 걸어야 도달하는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때 마침 눈이 온 후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웠고 제가 신은 신발은 운동화가 아닌 구두였습니다. 제 기억에 올라갈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예수원을 떠나 집에 갈 때는 내려오면서 3번이나 미끄러워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한번 넘어질때는 조심하자라는 마음을 먹었고 두번째 넘어질 때는 황당했고 세번째 넘어질 때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었습니다. 건장한 남자인 저도 이렇게 내려올 때 세번이(상)나 넘어졌는데 여자분들이나 차들은 어떻게 올라가고 내려가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궁금해지기 합니다. 지금도 예수원은 그 위치에 있는 것 같은데 겨울에 가게 되면 구두 신고는 가시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원이 평지가 아닌 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예수원에서 숙박할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했었는데 예약하는 것인지 몰라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숙박 책임자의 배려로 하루 일박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천덕신부님이 고인이 되셨지만 제가 예수원을 찾았을 때는 아직 생존해 계셨기에 늘 사진으로반 보던 대천덕신부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궁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식사하기 위해 1층 제일 안쪽 테이블(좌식)에 앉았는데 다른 분들이 다른 테이블에 다 앉았음에도 제가 앉은 옆자리(테이블 끝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식사하지를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대천덕신부님이 보이지 않아 그 분을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대천덕신부님을 만나볼 생각이 크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때까지 대천덕신부님을 보지 못해서 식사는 다른 곳에서 따로 하시던지 다른 곳에 사역을 나가셨던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워진 제 옆자리가 비워있는 곳이 대천덕신부님의 고정 식사자리인지 몰랐습니다. 전체 중앙앞자리가 아닌 앞자리 중 제일 끝자리라 더욱 그 자리가 대천덕신부님 자리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잠시 있다가 뒤쪽 작은 문이 열리면서 대천덕신부님이 나오셨고 저는 놀래서 일어나 신부님을 맞이했습니다. 어른이 들어오시는데 앉아서 맞이할 수 없어 일어났는데 일어나 보니 저만 일어나 있었습니다. 일어난 제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대천덕신부님이 들어오실때 다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만 제가 혼자 일어난 것은 더 이상한 일이였지 않나 지금도 생각해 봅니다. 신부님은 신앙잡지 책에 나온 사진과 같은 모습이셨고 얼굴만 보인 사진과 달리 몸은 많이 여윈 모습이였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양반다리를 하지 못해 기도할 때 무릎에 끼워넣는 기도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셨습니다. 아마 예수원의 책임자이고 외국인인 대천덕신부님에 맞추었다면 의자에 앉는 테이블이 준비된 식당을 준비하고 빵과 샐러드 위주의 식사를 할 수도 있었음에도 그 날 식사는 한국적이였습니다. 다만 양반다리를 할 수 없어 기도의자를 무릎사이에 끼워넣고 앞자리지만 옆귀퉁이에 앉는 모습은 예수님의 겸손을 실천하신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옆자리라 대화를 잠깐 나눈 것 같은데 한국말은 유창하지는 않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앙잡지의 한국어로 된 글을 보면 한국말도 잘하실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신앙잡지의 글은 일단 신부님의 모국어로 한 후 번역하여 올린 글이 아닌가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식사를 한 그곳에서 식사 테이블을 치우고 큰 원으로 둘러 앉아 중보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한 선교단체가 매주 마다 소감이라는 글을 통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인데 일반기성교회의 모임에서는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을 보기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임에서 먼저 자신의 상처와 죄에 대한 고백을 하면 당황해 하면서도 저를 보고 용기를 얻어 자신의 상처와 죄를 고백하면서 영적인 짐을 내려놓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주로 제가 먼저 하였기에 예수원의 저녁 중보기도모임에서도 제 차례가 되면 저의 지난 상처나 현재의 죄에 대한 고백을 할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앞서 모임에 참석한 분들이 먼저 대담하게 자신의 상처와 죄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 저도 이곳에서는 고백하고 싶지 않았던 성중독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오래도록 성인영화에 대한 중독에 빠져 있었고 막 포르노에 대한 중독이 생기던 시점이라 주로 성인영화에 대한 성중독을 고백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이 고백후 저를 위해 중보 기도해 줄때 제 몸에 손을 대고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모임 중에 여자(자매)분들도 계셨는데 어떤 성적충동때문이 아니라 혹시 여자분들이 제 몸(주로 어깨 등이지만)에 손을 대면 제가 성중독에서 벗어날 힘을 얻을까 하는 순수한(?) 마음때문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의 성중독 고백후 요구가 당황스러웠던지 모임의 책임자였던 (여성)분은 중보기도할 때 몸에 손을 대지 않으니 양해해 달라고 하였기에 저는 약간의 실망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에 대한 이 중보기도는 이후 저의 포르노 성중독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마음에 제 어깨나 등에 손을 대고 기도해 줬다면 성중독과 싸워볼 마음가짐을 크게 가져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지금도 해 봅니다. 그래서 제가 이때 가진 '터치'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이후 '터치'에 대한 사역을 준비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단 성중독에서 벗어난 지금 시점에서나 가능해 보이지만 그전에는 문제가 될 것으로 보임)
이 기도모임이 끝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분들 특히 여자(자매)분들의 눈을 마주치기가 약간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 에 참석했던 한 여자(자매)분이 서울 사랑의 교회에 청년부 동기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저는 알아봤는데 그 분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 동기는 예수원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다보니 저를 그들 중에 한명이지만 저는 그날 제가 성중독을 했기에 제 고백을 들은 여자(자매)분들은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원은 하루 일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왔기에 예수원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는지 볼 수 없었지만 사랑의 교회 청년부 동기들이 야유회 경로 중 예수원을 들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예수원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성중독 치유라는 관점에서 예수원은 성중독을 고백하고 중보기도를 받았지만 단순히 고백으로만 끝난 시간이였지만 하나님께는 성중독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영적몸짓으로 보셨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