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아 덩이뿌리와 토란 알뿌리
꽃을 피우며 아직 씨앗을 여물리지 못한 꽃향유
다양하기 그지없는 씨앗의 모양
무릇, 층꽃, 새콩, 새팥, 쑥부쟁이, 무궁화, 신나무(개단풍)
올해 한가을의 날씨가 워낙 불순(不順)하다 보니 모든 것들의 끝물 성장과 결실의 마무리가 순조롭지 못합니다. ‘워낙 불순’하다는 것은 9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시도 때도 없이 여러 날씩 비가 찔끔거리는가 하면 수십 년 만에 몰아닥친 10월 중순의 한파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9월과 10월의 날들은 한낮으로는 뜨거울 만큼의 햇볕이 따갑고 하늘이 청명한 가운데 대기는 삽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가을비가 장맛비처럼 내리다 보니 기온이 낮고 일조량이 적었습니다. 곡식과 씨앗들이 알맹이를 제대로 여물리지 못하고 분위기마저 우울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처서(處暑)비는 십리(十里)에 천석(千石)을 감하고 백로(白露)비는 십리에 천석을 더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서가 드는 8월 중 하순까지 비가 이어지면 벼의 수분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일 듯싶습니다. 반대로 보름 후 드는 9월 초순의 백로에 비가 내리면 결실이 시작된 벼의 충분한 수분 공급으로 알이 튼실해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올 처서에는 태풍 ‘오마이스(Omais)’가 올라오며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비가 백로까지 지루하게 이어졌습니다. 백로의 비에도 불구하고 풍년이 들 것이라는 느낌이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태풍과 함께 굿은 날씨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9월에 들어서는 9월 중순 ‘찬투’라는 캄보디아의 꽃 이름을 가진 태풍이 한반도 전역에 많은 비를 뿌렸습니다. 뒤이어 9월 23일이 한가위던 추석 명절 기간 내내 15호 태풍 ‘뎬무’의 영향으로 비가 찔끔거렸습니다. 이후에도 16호 태풍 ‘민들레’, 17호 태풍 ‘라이언록’ 등 큰바람이 상륙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영향으로 10월 중순까지 비가 질척거렸습니다. 결실기 동안의 잦은 비 때문에 올가을의 오곡은 겉여물고 백과는 단물이 빠져버렸습니다. 김해에서 단감 농사를 짓는 친구는 올해의 단감 농사를 망쳤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와 배추가 잘 자라지 않고 물러서 썩어버린다고도 했습니다.
이렇듯 가을의 결실과 추수기에 이롭지 못한 비가 이어지던 중 또 다른 악재가 터졌습니다. 이쯤 비가 내렸으면 좀 뒤늦게나마 평년의 가을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했던 10월 중순에 한파가 몰아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의 따가운 가을 햇볕에 바짝 결실을 서둘 수 있는 시기에 기대하지 않던 불청객이 찾아온 것입니다. 64년만의 가을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중부 내륙지방의 기온이 10월 17일과 18일 양일간 영하 3℃까지 내려가고 된서리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넘게 아침 기온이 0℃ 내외로 떨어지는 때아닌 추위가 이어졌습니다.
예년 같으면 올해는 10월 23일에 든 상강(霜降) 즈음에 살짝 무서리가 내리고 빨라야 요즈음 10월 하순이 돼야 된서리가 한차례 정도 내렸을 터입니다. 보통은 된서리가 내리기 전인 10월 하순까지 거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씨앗과 알뿌리를 서서히 여물립니다. 그런데 올해는 잦은 가을비로 결실 자체가 더뎠던 것은 물론 씨앗과 알뿌리를 차분히 여물릴 수 있는 10월 중하순 보름쯤의 시간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농원의 올가을 결실과 추수는 거의 모두가 기대 이하입니다.
날씨가 순조로웠다면 이즈음 10월 하순에 꽃씨를 받고 알뿌리를 캐면 됩니다. 그러나 보름씩이나 빨리 찾아온 가을 추위 때문에 이들을 거두는 시기도 앞당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씨앗들의 결실 상태가 변변치 않습니다. 상강이 들었던 지난 주말 서둘러 지난봄에 씨앗을 뿌려 심어 가꿨던 화초들의 씨앗을 받았습니다. 백일홍, 풍접초, 코스모스, 노랑코스모스, 과꽃, 메리골드, 루드베키아... 다년초 자생식물들의 씨앗은 아직 충분히 여물지가 않았습니다. 부처꽃, 꽃범의꼬리, 개미취, 참취, 곰취... 된서리를 맞았지만 아직 꽃을 피우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꽃향유, 섬쑥부쟁이, 고려엉겅퀴(곤드레)와 같은 것들은 11월 중순쯤에나 씨앗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가을 김해 진례에 있는 친구의 농장에서 받아다가 올봄에 뿌렸던 꽃향유는 아직도 자줏빛 꽃 색이 선연합니다.
물론 늦가을이 시작되는 이즈음에만 씨앗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두해살이 작물의 경우 이미 초여름에 씨앗을 받은 것도 있습니다. 붓꽃, 범부채, 뻐꾹나리, 하늘나리와 같은 것은 이미 늦여름에 씨앗이 여물었습니다. 한편 모든 것들의 씨앗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여러해살이 풀의 경우에는 반드시 씨앗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들은 이듬해 자신의 자리에서 새로운 싹을 올리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의 증식을 원치 않는다면 굳이 씨앗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씨앗을 통째로 잘라서 버려야 할 것도 있습니다. 스스로 번성해서 잡초 역할을 하는 것들의 씨앗은 씨앗을 맺기 전에 뽑아주거나 씨앗이 여물기 전에 잘라내야 합니다. 박주가리, 쥐방울덩굴, 도깨비바늘, 도둑놈의갈고리, 가막사리와 같은 것입니다.
올해는 화초의 덩이뿌리와 줄기를 캐는 것도 다른 해보다는 그 시기를 앞당겼습니다. 10월 중순의 때 이른 한파에 푸르고 싱싱하던 것들이 모두 파김치가 되어 그 몰골이 흉측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달리아, 칸나, 그리고 토란입니다. 이렇게 빨리 가을 추위가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직도 싱싱한 잎새는 물론 마무리 꽃을 보여줄 것들입니다.
얼어서 물이 질컥거리는 꽃대궁과 잎줄기를 잘라내고 칸나와 달리아 뿌리 덩이를 캤습니다. 달리아는 잔주름이 있는 알뿌리 여러 개가 덩이 져 있습니다. 칸나는 뭉툭한 덩이줄기가 대중이 없이 뻗어있습니다. 달리아 덩이뿌리와 토란의 알뿌리는 다소 깊이 박혀있어서 상관이 없지만, 칸나는 덩이줄기가 좀 얕게 묻혀 있어서 살짝 얼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봄에 심었던 것과 비교해 뿌리줄기나 덩이의 개수와 부피가 네다섯 배는 족히 늘어났습니다. 흙을 털고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서 말려서 얼지 않도록 보관을 해야 합니다.
꽃씨를 받고 뿌리를 캐서 거두어들이며 그들의 모습이 자신의 몸체나 꽃의 모습과는 또 달리 참으로 다양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씨앗 모양은 생물다양성(生物多樣性), 이른바 ‘바이오다이버시티(Biodiversity)’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중중제망(重重帝網),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어느 것 하나 홀로 서 있는 것이 없으나, 그 모습만큼은 철저하게 서로 다르고 각각의 특이한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투철한 차별성과 철저한 개체성이 곧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게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다행히 요즘 며칠 평년의 가을 날씨가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두어 차례 더 씨앗을 받아야 합니다. 받은 씨앗들은 봉지나 종이상자에 담겨 칸칸이 단이 진 창고의 선반에 올라 보관됩니다. 이들은 이제 한동안의 긴 겨울잠을 잡니다. 새봄이 오면 정원으로 나아가 새롭게 태어날 꿈을 꾸면서요. (2021.10.28.)
첫댓글 10월16일 후의 시간의 흐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네요.불과 13일의 시간이 이리도 빠르고 다양하게 변하는데 지나간 10개월의
시간은~ 50년의 세월은~ 그렇게 많은 사건들을 겪고 오늘이 왔군요.받아놓은 씨앗이 귀엽고 앙증맞네요.순우친구와 현숙.후덕한 부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느껴져 마음이 울컥하네요.元.亨.利.貞의 의미를 갖춘 농부들의 삶의 모습이 이 글속에 다 베어 있어, 저도 농부
의 아들로서 감회가 깊네요.그 씨앗이 싹트는 내년 봄을 그려봅니다.
지난 17일 한파로 정원 은행나무잎이 모두 얼어버려 노란 잎이 없어요. 자고로 명석한 사람은 공부를 부지런한 사람은 농사를 지으라고 했는데 둘다 구비하지 못한 내가 학문을 했고 농사를 짓고 있지요. 나는 게을러 매년 심는 화초 가꾸기는 엄두에 내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텃밭에는 다년생 나물과 과일나무를 주로 키우고 있습니다. 또다시 한파가 들이닥칠까봐 10월 22일 김장을 마쳤답니다. 내일 은 김장두레 이야기를 올리려고 합니다.
씨앗이라는 단어는 참 단아하고 정갈하며 속이 꽉 차고 단단한 어감을 줍니다. Seed발음과도 비슷하고요. 동서양의 느낌이 같은가 봅니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듯 올 농사의 결과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막말과 하늘을 거스리는 망언이 그 원인인 듯 느껴집니다. 지도자는 무릇 백성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올곧은 씨앗을 뽑아 뿌리가 튼튼한 나라를 세워야지요...순우를 그리며...
올 가을 불순한 날씨로 여러 모로 손실이 컸네요. 시들어진 농작물을 보고 있는 순우의 모습를 그려보며 어릴 적 부모님이 날씨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던 모습이 나를 뭉클하게 하네요. 오늘 골목 장터에서 사과 8개에 5천원을 주고 사면서 커피 한잔 값 밖에 안되는 현실에 갑자기 사과 농사짓는 동기생 생각이 울컥 났습니다.
순우의 글을 읽어보니 내가 1981년
미국 OAC 위탁교육중 시골 부모님
께 전화드리니 비가 안와서 논농사
에 큰일 났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
니다.
변덕스러운 추위로 농작물에 날벼락
은 마치 양심부재의 개떡같은 정치인
들을 연상시킴니다.
제발 정치도 잘되고 가을수학도 풍작
이.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