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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여수에는 거대한 왕국이 있었다.
답사지
: 오림동 고인돌(암각화) → 돌산 세구지 고인돌(이중 개석식) → 거북 공원 고인돌 복원지 → 달천 청사 정소 선생 유허지 → 중산리 고인돌 → 신대리 고인돌(스톤써클형) → 왕바위재 고인돌(세계 최대 고인돌, 탁본 체험) → 석창성
일정표 : 2001년 8월 26일(일)
유적 답사시 유의 사항
1. 전체 진행자의 진행 요령에 따라 반드시 협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일정표를 숙지하여 시간을 지킴으로써 전체 답사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3. 답사 프로그램에 있어 모든 개인 행동은 절대 금하도록 해야 합니다.
4. 유적 답사지에서 휴지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하여 우리 문화를 우리가 지키는 솔선 수범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5. 석창성은 현재 발굴 중이므로 발굴 조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며, 학습을 위하여 주운 토기, 자기 조각 등은 답사가 끝날 때 그 자리에 두고 와야 합니다.
고인돌 개관
. 고인돌의 의미
고인돌은 선사 시대 돌무덤 유적으로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만주, 일본, 유럽, 북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분포하는데, 중국에서는 석붕(石棚)·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하고, 일본은 지석묘(支石墓)라 부르며, 다른 지역에서는 돌멘(Dolmen)·거석(Megalith) 등으로 불리운다.
우리 나라에서는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기 때문에 독배기, 바우배기, 독바우라고도 하며,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南方式)의 경우 괸바우·암닭바우, 상석의 형태에 따라서는 거북바우·두꺼비바우·개구리바우라고도 한다. 또한 민간 신앙과 연계되어 고인돌의 배치 형태에 따라 칠성바우, 옛날 장군이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이 많아 장군바우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는 청동기 시대, 일본은 죠몽(繩文) 후기에서 야요이(彌生) 중기까지, 동남아시아는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에 이르는 시기, 서유럽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에 주로 만들어졌다.
인류가 거석 구조물을 만든 것은 큰 바위(돌)에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 즉 거석 숭배 의식이 바탕에 자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거석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 또는 거석을 숭배하는 것을 만물 숭배 신앙(Animism)이라고 하는데, 고인돌은 선돌과 더불어 우리 나라 대표적인 거석 문화 요소이며 조상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선사 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고인돌은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것이나 더러는 자기 영역의 경계 또는 강한 힘을 외부에 표시하는 표석 상징물이기도 하고, 종족이나 집단·사회의 모임장소임과 동시에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고인돌은 다른 어느 민족이나 나라보다도 넓은 지역에 걸쳐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적으로써 많이 존재하고 있다.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고인돌은 특히 대동강 유역과 전남 지방에서 가장 밀집되어 있다. 전남 지방의 경우 2천 2백여 곳에서 모두 1만 9천여 기(基)의 고인돌이 확인되었으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에 1만여 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전라북도에는 고창 지역 1천 2백여 기를 포함하여 1
천 8백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유럽 전 지역에서 5만 5천여 기가 발굴되었으나 그 중에서 순수 고인돌은 수천 기에 지나지 않고 동남아의 수백 기를 미루어 볼 때 3만여 기에 이르는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가장 조밀한 분포권을 보여주는 고인돌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자생설, 남방설, 북방설 등이 제기되고 있지만 중심 분포지가 우리 나라이고, 북방식과 남방식 등 형식도 다양하며, 생활 용품, 의례용·장신구, 무기류·농기구 등 여러 가지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고인돌 문화의 중심지라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고인돌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으며, 신석기 시대 주로 사용되었던 간석기(마제 석기)·빗살무늬 토기부터 청동검 등이 다양하게 발굴됨으로써 당시 우리 조상들의 사회·경제·문화를 밝히는 열쇠이자 단초가 되는 셈이다.
2. 고인돌의 형태
'고인돌'이란 순수한 우리 나라 말로 큰 바위(돌) 아래 3∼4개의 돌로 괴여서 받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학술상 고인돌(支石墓)의 일반적인 의미는 지상(地上)이나 지하(地下)의 무덤방(墓室) 위에 거대한 덮개돌(上石, 蓋石)을 덮은 선사 시대(先史時代) 무덤의 하나로 거석 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다.
우리 나라 고인돌은 크게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무지석식) 등 3종류가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잘 다듬은 판석 3∼4매로 짜 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 형태의 돌을 얹는 것으로, 책상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으로도 부른다. 대형 북방식은 요동 반도와 한국 대동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세운다.
남방식 고인돌은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로 쌓은 무덤방(墓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굄돌을 놓은 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碁盤式)이라고도 한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 형태의 고인돌은 호남과 영남 지방에서 주로 보이며 무덤방이 없는 것도 나타난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굄돌을 괴었다.
개석식 고인돌이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요동 반도, 한반도, 일본 구주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데, 이렇게 지석이 없는 무지석식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시킨다. 또한 여수 지역에서는 덮개돌 두 개를 얹는 이중개석식 고인돌도 나타난다.
고인돌의 무덤방은 돌널형(石棺形), 돌덧널형(石槨形), 구덩형(土壙形), 독널형(饔棺形)이 있으며, 평면은 긴 네모꼴이 대부분이다. 돌널형과 돌덧널형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보이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씩 형태가 다르다. 특히 돌널형은 일본 구주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 고인돌의 기능
고인돌의 성격 문제는 고인돌 조사를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서양인(Allen, Hulbert, Underwood 등)과 일본인들에 의해 분묘설(墳墓說)과 제단설(祭壇說)이 제기되었다. 손진태는 지석묘를 종교적인 숭배물 또는 제단, 주거 형식, 고분의 석실 및 석관이 노출된 것 등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무덤의 기능으로 보았다.
중국의 허옥림(許玉林)은 종교 제사의 기념물, 원시 사회의 씨족 공동 활동 장소, 고분으로 보고, 요동 반도의 고인돌을 고분인 동시에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씨족의 공공 활동을 진행한 장소 기능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이영문은 대석붕(大石棚)의 경우 제단이나 씨족의 공공 집회 장소로, 대석개묘(大石蓋墓)는 무덤으로서 기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인돌의 기능 문제는 상석 형태와 하부 구조, 입지와 군집 내에서의 위치로 보아 무덤, 제단, 묘표석의 기능으로 구분할 수 있다.
. 무덤으로서의 기능
1961년 황북 황주 심촌리 긴동, 함북 김책 덕인리에서 인골이 조사되었고, 1967년 충북 제원군 황석리 13호에서 완전한 인골이 보고되면서 고인돌은 무덤이라는 것이 학계에 일반화되었다.
전남 지방에서는 아직 인골이 출토된 바 없지만 지석묘 석실의 규모로 보아 당시의 장법(葬法)을 추정할 수 있는데, 고인돌 석실의 규모가 무덤으로서 적당한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석실의 길이와 폭이 다양하여 신전장(伸展葬), 굴장(屈葬), 세골장(洗骨葬)이라는 장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파악되었다.
. 제단으로서의 기능
이융조와 하문식은 입지와 외형을 들어 제단 고인돌을 석실이 없는 전형적인 남방식과, 입지 조건·지석으로 보아 석실을 이룰 수 없게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만든 북방식 고인돌을 제단 지석묘로 파악하였다. 제단의 성격을 띤 고인돌은 종교 또는 신앙 행사 장소이거나 여러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혈연 집단의 묘역과는 별개의 입지 조건을 가져야 한다.
제단 고인돌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첫째, 고인돌 묘역을 이룬 군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1기만 독립적인 입지를 가진 것
둘째, 거대한 괴석형 상석에 대형 지석이 고여 외형상으로 웅장하고 다른 고인돌과 구별되는 규모와 형태
셋째, 계곡에서는 그 끝 부분에, 고인돌군을 이룬 곳에서는 가장 지대가 높은 곳으로 주위를 관망할 수 있는 입지 지역 등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제단의 성격을 띤 고인돌들은 외형적으로 웅장하게 보이는 괴석형 상석에 대형 지석 4∼6개가 괸 전형적인 남방식, □자형 석실을 지닌 북방식, 기둥형 지석을 한 판석형 상석들이다. 이들은 집단의 제단이나 집회 장소로 활용하기 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데, 계곡 끝 평지와 산기슭에 있는 경우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도 아울러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 묘표석으로서의 기능
묘표석으로서 기능은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내지 묘역 조성 집단의 권위와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 또는 묘역을 표시하는 단순한 기능 등으로 보인다. 고인돌군 안에 존재하는 유형은 다시 제단 지석묘와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군(群)의 중앙이나 한쪽에 치우쳐 위치한 것과, 앞보다 작은 규모이거나 소형으로 그 자체는 석실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구분된다.
첫째 유형은 광주 충효동, 장성 덕재리, 승주 우산리 곡천, 승주 대치리, 여천 평여동, 보성 율어 고인돌에서 나타난 것처럼 군의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과 여수 오림동, 승주 우산리 내우, 화순 벽송리 등에서처럼 고인돌군 중앙에 있는 형태가 있다.
둘째 유형은 여러 석실이 있는 가운데 무석실 고인돌이 놓여있는 것으로 대구 대봉동 지석묘 발굴에서 제기되었는데 후대에 이동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 여수의 고인돌
1. 바위에 그림을 새긴 오림동 고인돌
진남체육공원 입구에 1990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후 복원해 놓은 고인돌이 있다.
전남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바위에 그림이 그려진 이 고인돌은 그 가치가 인정되어 1994년 1월 31일 지방 기념물 제 150호로 지정되었다. 동서 길이 410cm, 남북 너비 276cm, 두께 180cm 크기의 대형 덮개돌은 그 형태가 평면이 직사각형이며, 단면은 윗변이 평평하고 아래가 완만한 호를 그리고 있지만 북서쪽 부분은 뾰쪽하게 되어 있는 괴석형에 속한다.
암각들 중 뚜렷한 것은 손에 쥘 수 있는 자루가 있는 돌칼(一段柄式石劍) 1점, 앉아 있는 인물상 1, 서있는 인물상 1, 그리고 확실하게 어떤 물체를 표현한 것인지 판독할 수 없는 그림 등이 새겨져 있는데, 암각면의 중앙부 80×70cm에 집중되어 있다. 암각된 돌칼은 인물상과 함께 암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돌칼은 암각면의 중심부에서 좌측으로 치우쳐 그 위쪽에 음각되어 있는데, 검 끝이 암각면의 중심점에 위치하며, 손잡이 부분이 위에 있고 검끝이 아래로 향해 있다. 내부 투시도 수법(렌트겐 수법)을 사용하여 돌칼 밖에 칼집을 그리고 있으며, 조각 기법은 쪼아 윤곽선을 낸 다음 쪼고 그어파기를 한 선각(線刻)인데, 암각면이 고르지 않고 파여진 홈도 오목하지 않아 갈아파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칼은 총 길이 34cm, 폭 9cm, 검 길이 30cm, 검 폭 5.5∼6.0cm, 검코 폭 12cm, 손잡이 길이 10cm, 손잡이 끝 길이 14cm이다.
인물상은 칼끝과 수평을 이루고 좌측으로 각각 5cm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이 새겨져 있다. 머리와 팔, 다리 등을 선각으로 표현하였는데, 쪼아파기를 하고 갈아파기로 면을 고른 기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머리는 쪼아 오목하게 팠지만 일부는 선각이 희미하여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앉아 있는 인물상은 무릎을 꿇고 검을 향해 두 손을 받들어 올린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검을 숭배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두 손 사이는 0.5cm 정도 떨어져 있고 높이는 13cm, 무릎 폭은 6cm이다.
서 있는 인물상은 앉아 있는 인물상에서 좌측으로 5cm 떨어져 있는데 다리를 벌리고 양팔을 둥글게 하여 허리를 받치고 있는 자세이다. 이 암각은 돌칼 사이에 있는 인물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자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높이 14.0cm, 가슴 폭 7.0cm이다.
이 두 인물상은 단순화되고 양식화 된 것으로 6등신을 과장되지 않게 암각하였는데, 앉아있는 인물상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인물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상이다. 이는 고인돌에 묻혀 있는 사람(被葬者)을 형상화 한 돌칼에 무엇인가를 바치는 공경과 숭배 의식의 장면으로 추정해 볼 수 있어, 고인돌의 피장자와 관련된 원시 신앙이나 장례 의식(葬儀)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인물상에서 팔을 굽혀 손을 허리에 받친 모습이 여자의 가슴을 표현한 것이라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의미로 생각되고, 앉아있는 상은 이를 기원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세구지 이중 개석식 고인돌
고인돌은 크게 큰 굄돌(支石)을 두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탁자 모양으로 생긴 북방식, 지석이 낮아 바둑판 모양으로 생긴 남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남방식은 다시 굄돌이 있는 지석식 고인돌과 굄돌이 없는 무지석식 고인돌이 있는데 이들이 변형된 형태로 이중 개석식(또는 쌍암식) 고인돌이 나타난다.
이중 개석식 고인돌은 다른 형태의 고인돌이 아래에 있는 돌널(무덤방)의 두껑돌을 여러 개로 덮고 고인돌을 괸 다음 그 위에 덮개돌(蓋石, 上石)을 덮은 것과는 달리 돌널의 두껑돌을 크고 납작한 하나의 돌로 덮고 그 위에 다시 덮개돌을 올린 것이다.
세구지 고인돌은 돌산 우두리 일대의 택지 조성 사업의 진행에 따라 진입로로 예정된 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됨으로써 개발 주체인 토지개발공사의 재정 부담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서 1991년 12월 2일부터 1994년 1월 20일까지 발굴, 조사한 후 복원한 것이다. 이 유적의 특성은 위에서 살펴 본 이중 개석식 고인돌과 제사 유구를 들 수 있다.
세구지 고인돌에서 발견된 유물로 칼의 손잡이가 없는 슴베식 돌칼(有莖式)이 대표적이다.
3. 고인돌 학습장 거북 공원
시민들이 많이 찾는 거북 공원에는 적량동과 평여동에서 발굴한 후 복원해 놓은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기 좋은 장소이며, 이들 지역에서 발굴된 비파형 동검과 다양하고 많은 옥(玉)은 선사 시대 이 지역의 특성을 알려주고 있다.
적량동 상적 고인돌은 호남정유(현 LGCaltax 정유) 공장의 확장 공사를 하면서 발견되어 1989년 1월 4일부터 3월 7일까지 50일 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다.
산기슭 아래 위치한 고인돌 14기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으나 4기에서만 석실이 확인되었는데 그나마 7호만 완전하고 나머지는 파괴된 상태였다. 덮개돌(上石, 蓋石)들은 대개 동서 방향으로 배치되었으며, 그 중 5기는 괴석형으로 모두 대형 굄돌(支石)이 고여있는 남방식 고인돌이었다. 완전한 형태로 남은 7호 고인돌은 대형 지석 6개 위에 괴석형 상석이 올려져 있는 남방식으로 석실은 깬돌(割石)을 3∼4단 정도 쌓았으며, 잔자갈을 바닥 전면에 깔았다. 고인돌 주위에 석실 26기가 한꺼번에(群集) 발견되었는데, 이 석실들은 판석으로 짜맞춘 석관형(石棺形) 3기, 할석을 쌓아 세운 석곽형(石槨形)이 23기였다.
출토 유물은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 7점, 비파형 동모(琵琶形銅 ) 1점, 관옥 5점, 돌칼 1점, 유단 석부(턱자귀) 1점, 옥을 연마하던 돌 1점 이외에 무문 토기 조각과 붉은색 토기 조각도 있었다. 이러한 유물 중 7호 고인돌 석실 바닥에서 지금까지 다른 고인돌에서 조각이나 부러진, 즉 이차 전용품이 출토되는 것과 달리 완전한 형태의 비파형 동검 1점이 발견되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2-1호 석곽에서는 파편이지만 완형으로 추정되는 비파형 동검과 동모, 그리고 소형 관옥 5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었는데, 특히 비파형 동모가 확실한 유구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초기 청동기 유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적량동 고인돌에서 청동으로 만든 유물이 8점이나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예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유적이며 오히려 요령 지방의 초기 청동기 유물 출토 유적과 비견되는 것이다. 또한 고인돌의 부장 유물도 동검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청동기 문화뿐만 아니라 고인돌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평여동 산본에 (주) 제일모직 여수 공장을 세울 때 그 터에 있던 고인돌이 1989년 7월 24일부터 9월 13일까지 50일 간 발굴, 조사되었다.
산기슭 아래 완만한 경사 끝부분에 산줄기 방향으로 9기, 9기, 3기 등 3곳에 21기가 분포되어 있었다. '가'지구는 거대한 상석을 한 1호 고인돌만 땅 위에 드러나 있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8기의 덮개돌과 3기의 석실이 확인되어 1호 고인돌을 중심으로 모두 14기의 석실이 발견되었다. 상석과 유구가 있는 것이 4기, 뚜껑돌이 있는 것이 9기이며, 석실의 형식은 2호만이 주위를 돌로 두른 형태(圍石形)이고 나머지는 석곽형이었다.
1호 고인돌은 6개의 굄돌이 타원형으로 적석 안쪽에 배치되어 있고 그 가장자리에는 반듯한 돌을 이용해 사각형으로 구획하였다.
출토 유물로는 소옥 2점과 유구 석부 3점, 돌화살촉 1점 그리고 무문 토기 조각 등이 있었다.
'나'군은 상석 9기 가운데 8기를 조사하였는데 석실은 4기에서만 나타났다. 거대한 상석을 가진 1호는 석실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묘지가 있다는 표지석(墓標石), 제사 유구 또는 가묘(假墓)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2, 3호는 간단한 석실을, 4호는 할석과 장대석을 이용해 쌓은 석곽형이다.
출토 유물은 2호 서쪽 바닥에서 청동기 1점, 4호 바닥에서 소형 관옥 2점이 발견되었다.
'다'군은 상석이 있는 3기와 성석이 없는 5기 등 모두 8기가 조사되었다. 1호는 거대한 상석 아래 굄돌 5개가 고여있으나 석실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석곽형 석실이다. 석관형 석실에는 뚜껑돌을 덮은 것이 보편적이며, 바닥에도 잔자갈을 깐 것(2호), 평평한 돌 1개를 놓은 것(3, 6호) 등이다. 적석을 한 것 가운데 3호와 6호는 판판한 돌 조각을 타원형으로 세워 구획한 것이 특이하다.
출토 유물은 청동기와 석기류 등은 없고 옥(玉)류와 무문 토기 조각뿐이다. 옥은 곡옥 2점과 관옥 135점, 소옥 211점, 환옥 2점 등 총 349점이다. 특히 2호에서는 곡옥 2점, 관옥 29점, 소옥 209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었으며, 3호에서 관옥 105점과 환옥 2점이, 5호에서 소옥 2점, 8호에서 관옥 1점이 각각 발견되었다.
이러한 평여동 고인돌은 적석 석실에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3지역 모두 거대한 남방식 고인돌이 1개씩 있고 이들이 중심적이고 표시적인 것이 특징이다.
출토 유물에서 다양한 옥이 다른 고인돌과 다르게 부장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은 고인돌 연구나 청동기 시대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4. 청사 정소 선생 유허지
달천 지역은 옛날 종산포(種蒜圃)라 하였으며 섬달천을 달래도(達來島)라 불렀다. 이곳은 1545년(명종 1)에 일어난 을사 사화 때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士林, 乙巳名賢)의 한 사람이었던 정랑(正郞) 정자(鄭滋)의 둘째 동생이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둘째 형인 청사(靑莎) 정소(鄭沼) 선생이 은거하며 살았었다. 선생은 18세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김모재(金慕齋 : 김안국, 1478∼1543)의 문하로 학문을 닦았다. 어려서부터 효행과 우애가 깊어 형이 을사 사화 때 화를 입음을 슬퍼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소라포(召羅浦) 달래도(達來島)에 종적을 감추고, 밭을 만들어 마늘을 심고 바다에 낚시를 드리워 고기를 잡았다.
선생이 동생을 방문하려고 서울에 갔을 때 친구들이
"바닷가에 얼마나 좋고 맛있는 것이 있어서 돌아오지 않았소 ?"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섬 안에 밭을 갈고 마늘을 심었소. 새 줄기가 자라려 하면 오적어(烏賊漁 : 오징어)가 스스로 와서 마늘 줄기에 걸리니, 모두 잡아 구어 먹지요. 이런 까닭으로 돌아오는 것을 잊었소이다."라고 하였다.『강남악부(江南樂府)』에는 다음과 같은 종산포(種蒜圃)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마늘 심은 밭,
그 밭은 소라포에 있네.
포(浦)에는 물고기가 있으니
이름은 오적(烏賊)이라네.
장각(長脚)과 단 물도 밭 주변에서 얻고,
밭 주변에 마늘을 심어 긴 줄기를 뽑았네.
마늘 밑에 물고기가 걸리니 잡기가 쉬워,
물고기도 잡고 마늘도 뽑으니 먹고도 남네.
돈이 없어도 매일 매일 갖추니,
삼공(三公)중 누구와도 이 즐거움을 바꾸리.
세간에서는 아무도 모른다네, 이 깊은 즐거움을.
※ 율곡 선생은 그의 묘를 일러 모해(模 )라 하였다.
5. 스톤헨지를 닮은 신대리 고인돌
고인돌의 배치는 일렬 또는 두 줄로 배치되어 덮개돌의 긴 축(長軸)이 동서, 남북 방향이거나, 능선을 따라서 또는 강을 향하거나 강과 평행으로 배열되는 것이 보통이나 산수리 신대 마을의 고인돌은 영국의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처럼 21기의 고인돌이 원형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6. 세계 최대의 고인돌
산수리 신대 마을 왕바위재는 여수시와 순천시의 경계에 있으며,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솟아나기 때문에 온수등이라고도 한다.
왕바위재에는 6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長軸)가 860㎝이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알려진 황해도 은율 고인돌과 전남 화순에 있는 남방식 고인돌의 덮개돌 장축이 모두 730㎝로 알려져 있는데, 여수에는 이들 보다 130㎝가 더 큰 고인돌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큰 고인돌은 엄청난 노동력과 풍부한 경제력 및 강력한 권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경제력과 권력이 우리 지방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여수 반도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 동검과 옥(玉)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이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 탁본
탁본을 뜨는 방법에는 건탁과 습탁의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건탁은 동화(銅貨)나 은화(銀貨)에 종이를 대고 연필 심(芯)을 뉘어서 비벼대는 장난과 마찬가지인 방법이다. 종이가 움직이지 않게 누르고 작은 고형(固形)의 탁본 먹으로 수 없이 문지르면 문자가 높은 곳은 검게, 얕은 곳은 희게 찍힌다. 섬세한 무늬나 잔 글자는 손가락에 헝겊을 감아 이것을 탁본 먹에 문지른 다음 대상물에 세심하게 문질러서 찍을 수도 있다.
습탁(濕拓)은 탁본하려는 물건에 댄 종이 위를 물로 적시어 종이가 대상물에 붙게 하는 것이 특색이며, 수탁(水拓)이라고도 한다. 종이에 물을 칠하는 데는 브러쉬를 사용하지만, 큰 비(碑)나 종 일 경우에는 브러쉬가 어려우므로 타올을 물에 적시어 적당하게 짜낸 후 가늘게 말아서 종이 위를 굴리면서 종이를 대상물에 밀착시켜 먹물로 찍어낸다.
습탁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탁본할 때 필요한 도구
① 무명천이나 가아제천, 명주천
② 먹과 벼루
③ 물붓(표구나 도배할 때 사용하는 붓), 분무기
④ 두드리는 솔(큰 것, 작은 것) : 양복 먼지털이용 솔이면 되는데, 털이 곱 고 고른 것으로 하되 작은 솔과 큰 솔을 갖추어 놓는 것이 좋다.
⑤ 면수건
⑥ 물통, 먹접시
⑦ 화선지나 탁본용 창호지(닥지) 신문지
⑧ 칼, 가위, 테이프, 고무줄, 비닐 등
먹방망이 만들기
헝겊에다 솜이나 좁쌀, 톱밥 등을 싸서 이에 먹물을 묻혀 사용하므로 먹방망이라고 한다.
① 솜이나 좁쌀, 노끈, 가아제 등을 준비한다. 특히 솜은 잘게 잘 찢어서 사용한다.
② 솜이나 좁쌀을 가아제천으로 싸서 꼭꼭 다지는데 앞을 찐빵처럼 만들면 된다.
③ 다시 한번 더 무명천이나 견 등에 싸서 끈으로 묶으면 된다.
④ 묶기 전, 솜방망이 앞을 만져보면 단단하고 탄력이 있어야 된다.
⑤ 크기별로 (손가락만한 것부터 어른 주먹만한 것까지) 4개정도 만들면 탁본에 무난하다.
탁본하는 방법
① 탁본할 원판을 솔로 깨끗이 청소한다. 먼지가 끼어있으면 종이가 붙지 않고 뜨기 때문에 청소는 무엇보다 중요하며, 청소하면서 탁본할 대상의 형태와 요철을 정확하게 손으로 느끼도록 한다.
② 청소가 끝났으면 스프레이로 물을 골고루 충분히 뿌려준다. 탁본 대상의 성질을 잘 파악한 후 물의 량을 조절한다.
③ 종이를 탁본할 대상물에 정확하게 얹어놓고 가볍게 물을 한번 더 뿌려 말착시켜 준다.
④ 종이가 충분히 젖으면 마른 수건을 덮고 손으로 가볍게 구석구석 눌러준다.
⑤ 솔로 전체를 두드린다. 종이의 질에 따라 두드리는 강도를 조절한다.
⑥ 수건을 조심스레 벗긴 후, 아직 밀착 안된 부분을 솔로 가볍게 두드린다. 이때 너무 세게 치거나 직각(⊥)이 아니라 엇각(∠)으로 치면 종이가 찢어지기 쉬우니 조심한다.
⑦ 물기가 충분히 마르면 솜방망이를 준비한다. 이 상태를 알아내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수분이 많으면 먹이 번지게 되고, 너무 마르면 종이가 탁본 대상물에서 떨어지기 쉽고, 먹도 잘먹지 않는다.
⑧ 솜방망이는 두개를 준비한다. 하나는 먹을 묻히는 것이고, 하나는 그것에 비비는 것이다. 먹이 묻은 솜방망이에 반대편 솜방망이를 비비면 먹이 옮겨지게 한다.
⑨ 간접적으로 먹이 묻은 솜방망이를 먼저 시험삼아 다른 종이에 쳐봐서 희미하게 먹그을음이 묻어 나오면 사용해도 된다. 먹물이 진하게 나오면 두 방망이를 더 비빈다.
⑩ 탁본할 대상에 가볍게 톡톡 쳐보도록 한다. 양각인 경우, 튀어나온 부분만 솜방망이질 하면 된다. 세밀한 부분은 작은 솜방망이를 사용한다.
⑪ 완성되면 원판에서 떼낸다.
. 발굴 복원될 석창성
. 석창성에 관한 고문헌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順天都護府 關防條, 古蹟條)에 여수 석보(石堡)에 관한 기록(麗水石堡 周一千四百七十九尺 有三井 節度使分兵成之 (新增) ∼ 革移于突山浦 麗水廢縣 在俯東六十里…)이 있으며,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順天都護俯 關粱條)에도 "麗水堡在府東六十二里 石城周一千四百七十尺…"라 하여 석보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석창성과 관련된 기록들이 나타난다. 성종실록 7월 20일(기묘)조에는 "증경정승(曾經政丞)·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대간(臺諫) 및 일찌기 전라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를 지낸자를 불러서 여러 가지를 의논하였다. … 1. 전라도 순천부에 석보(石堡)와 군인을 더 설치하는 것과 어란(於蘭 - 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달량(達粱 - 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두 포사이에 보(堡)를 설치하는 일이다."라는 기록과 " …
허종·어유소·양성지·유수는 의논하기를, "순천의 석보에 지키는 병사를 더 두고 창고를 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하고, 김유는 의논하기를, "순천의 석보에 군인을 더 두고, 회령(현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과 마도(현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 달량과 어란 사이에 보를 만들고서 양식을 저장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수영군만은 배의 수효가 많고 적음에 따라 설치하고, 다른 곳에 나누어 소속시켜서는 안될 것이며, 병영군은 다만 3려(旅)를 두되 역시 인원수를 감해서는 안되며, 가까운 고을에서 번상군(番上軍) 1백 명을 내어다가 새로 설치한 두 보에 나누어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계청하였다.
- 성종대왕실록 권 제 94 -
. 석창성의 특징
석창성은 나참반에 나타난 방향을 기준으로 약 10°정도 기울어져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모양은 거의 바른 네모꼴로서 모를 약간 굴린 정도이다. 동문지 북동쪽 성벽은 민가가 자리잡고 있어서 성곽의 파괴가 심하며 동북쪽 모퉁이와 서남쪽 모퉁이 성곽 상부에도 민가가 지어져 있다.
성곽은 지세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약간의 경사를 갖는 평지에 자리하므로 성안도 대체로 동쪽이 높고 특히 중앙이 약간 높도록 계획되었다.
성곽을 쌓는 수법은 순천 낙안읍성과 대단히 유사하다. 기초는(드러난 상태로 볼 때) 진흙을 한 겹 깔고 잡석을 한켜 다지는 방식으로 쌓아올렸으며 성굽은 큰돌을 길이 쌓기로 한겹 빙 돌렸다. 이 위에 성돌을 약간 디밀어서 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드러난 부분을 보면 가장 아랫단을 작은 돌로 다져 큰 돌을 얹고 그 위에 작은 돌들을 쌓아 안정감이 있다.
성의 안과 바깥 면을 돌로 쌓은 협축으로 보이며 성문 앞에 쓰여졌던 옹성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고 남문지 옆에 치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성문은 동문과 남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지만 서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해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조선 초기의 축성 기법으로 보아 해자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기서도 해자의 흔적을 뚜렷이 볼 수 있다.
해자가 뚜렷이 남은 곳은 성 북쪽과 남쪽이다. 특히 완벽하게 흔적을 남긴 곳은 북쪽인데 폭은 대략 10∼15m 사이이며 남아 있는 깊이는 대략 1m 내외이다. 성굽의 수평 높이가 일정치 않고 서쪽으로 완만하나마 경사진 것으로 미루어 이 해자는 흐르는 물을 끌어다 만든 것 같다. 남쪽의 해자는 폭이 7∼8m 정도의 폭을 유지하는데 성굽이 물에 곧바로 닿지 않아 호안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석창성 내의 건물은 1871(동치 10)년에 기록한 호좌수영지에 의하면 呂水面에 社倉 3칸과 봉상청 2칸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비석 2기가 서있는데 하나는 지붕이 없다. 이것은 원래 성밖 여수로 들어가는 구도로 곁에 있었던 것이었지만 보호가 어려워 1985년 옮겨 놓은 것이다. 비문에 "節度使 李公寅熙 永世不忘碑", "節度使 金公魯甲 恤民善政碑"라 기록되어 있다. 최근 산성비 때문인지 해가 갈수록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초석이 발견되었던 성곽 중앙의 밭과 동남쪽 모서리 밭에는 많은 자기 파편과 기와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백자 파편으로 조선 말기의 것들이나, 여러 점의 고대 도기, 자기들이 발견되었다. 멀리는 삼국 시대 적갈색, 청회색 도기의 파편과 회색 도기로부터 13∼14세기 경 무문 청자 및 상감청자, 그리고 15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16세기 경 인화문 분청사기도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