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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1.1. 허태연 시집 해설(2013. 10. 28)
자연과 인생에 순응하는 시학
-김용락(시인)
1.
시집 제목 ‘팔공산’처럼 허태연 시인은 팔공산 같은 시인이다. 달구벌 분지 대구의 주산(主山)으로 멀리 낙동강과 금호강을 품으며 숱한 인재를 배출해온 팔공산은 그 웅장한 자태와 후덕한 산의 품성으로 지역의 인간만사 세파에 지친 필부필부와 장삼이사의 가슴을 녹여주고 등을 두드려 위로하고 있다.
팔공산처럼 허태연 시인 역시 유유한 인품으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넉넉한 품이 되고 팔공산 같은 어머니 산이 되어주고 있다. 그의 아호 약원(藥園)은 약사여래불의 약자와 정원 원자로 고통과 질곡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큰 정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의 시에는 이런 품성이 깊게 배인 통 큰 안목과 여유가 느껴지는 말 그대로 큰집 냄새가 난다. 세세한 디테일 묘사나 시적 아우라를 풍기는 이미지나 수사에 열중하기보다는 인생의 곡진한 단면을 넓은 눈썰미를 동원해서 사실적으로 통 크게 그리고 있다.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는 기본적으로 시를 인생에 대한 비평이라고 말한 바 있는 데 이 말의 경우 허태연 시인의 시풍에 전적으로 어울리는 말이다. 허태연 시인은 큰 욕심 내지 않고 자신이 일상적으로 겪는 경험이나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해 담담하게 읊조리는듯한데 의외로 그의 시에는 깊은 내공과 인생에 대한 통찰력 있는 독법이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얼마나 크고 오묘한 것인지 이런 허태연 시인을 만나지 16년째를 넘어서고 있다. 그것도 16년을 쉼 없이 매주 만나서 함께 시를 읽고 담소를 나누는 사이이고 보면 인생살이에 도반도 이런 도반이 없다. 처음에는 내가 문학, 특히 시를 가르치는 선생이자 허 시인은 나이 많은 학생으로 관계가 설정되었지만 고백하건데 내가 허태연 시인과 <삶과 문학> 회원들에게 훨씬 많은 것을 배웠다. 감사한다.
1997년 초 내가 이제는 그 의미마저 공자시대와 달라진 소위 ‘불면 혹 날아간다는’ 불혹(不惑)의 마흔에 들어서자 당시 계명대 교수이자 문학비평가 이던 스승 민현기 교수님께서 당신께서 시내 삼성문화센터 수업을 하고 있는데 반반씩 나눠하자고 제의하셨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전전하던 제자가 힘들어보였던지 당신의 수업을 나눠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가 채 가시지 않은 나이이고 혁명적 문학운동의 물이 채 빠지기 전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문화센터의 유한마담(?)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 강좌가 썩 당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삶과 문학>이라는 이 그룹과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나는 내 생각이 짧고 부족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분들은 겉멋이 든, 문학을 하나의 액세서리로 여기는 부박한 유한마담이 아니라 문학을 자신의 삶의 한 방편으로 삼아 묵묵하게 정진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이 분들의 이러한 모습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내가 되레 많이 배웠다. 허태연 시인은 이 모임의 대표로 십 수 년을 꾸준하게 이끌어오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한국에 와서 언론인 홍세화 선생과 한겨레신문 지면에서 대담한 적이 있다. 그는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도 변질됐고 자본주의는 더 말할 나위 없이 타락했다고 보는 학자였다. 그러면서 인류가 추구해야할 대안으로 ‘새로운 가치의 공동체’를 언급했다. 이 대담기사를 <삶과 문학> 공부 시간에 함께 읽은 적도 있지만, 나는 그 기사의 새로운 가치의 공동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퍼뜩 나와 함께 공부하는 <삶과 문학> 동인들이 떠올랐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들이 보여준 문학적 열정, 지에 대한 경외심, 자율적 우애와 질서 등을 지켜보면서, 가령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 사회가 대안적인 새로운 삶의 모형을 생각해본다면 나는 이런 문학 공동체, 공부 공동체의 확대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의 단초를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 공부 모임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돼 오는 것은 구성원 개개인의 미덕이지만, 이끌어 가는 허 시인의 인품 도한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서문시장 한복판에서 태어나
식구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할머니 품에만 안겨 있던 나도
분명 집안의 꽃이었으리라
서울법대 신랑을 우여곡절 끝에 만나
-「 한 울타리」부분
친정아버지는
하늘이 맑으면
사람의 마음도 맑다는 한시로
대구 향교에서 귀한 백시장을 타시고
할아버지는 지게꾼에 지어서 왔다고
딸은 백 번쯤 들었습니다
불타버린 사진들 속의 아버지
서문시장 농악회를 이끌었고
창부타령과 황성옛터를 애창 했습니다
어리고 고집 센 딸을 앞에 두고
안경부터 벗고 눈물을 훔치며
비산동으로 가 봐라
얼마나 사람들이 고생 하는가
잡화도매상의 점원아이들도
모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며
식구들과 똑같은 밥상을 만들었다
불타는 사막을
상인들과 성직자들만 지나간다 합니다
아버지의 봄 속을
딸이 지금 지나갑니다
-「 친정 아버지」전문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시인의 문학적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시이다. 시는 우선 주체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와의 대결을 통해 세계에 대한 보다 명징한 인식을 드러내주는 인식체계이기도 하다. 주체인 나는 누구인가? 처음부터 나는 형성되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나가 태어나는 순간 나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바로 나를 규정짓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시적화자, 달리 말하면 시인의 문학적 자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문시장은 대구에 있는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아니 대구뿐 아니라 영남지역 물류의 거점이며 한 때 전국에서 가장 큰 재리시장이었다. 시인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시인을 세상에 있게 한 근원인 친정아버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것도 “하늘이 맑으면/사람의 마음도 맑다는” 아름다운 한시漢詩로 향교백일장에서 상을 탄 시인이다. 그의 몸속에는 이런 문학적 전통이 흐르고 있다. 그뿐 아니다. “ 어리고 고집 센 딸을 앞에 두고/안경부터 벗고 눈물을 훔치며/비산동으로 가 봐라/얼마나 사람들이 고생 하는가/잡화도매상의 점원아이들도/모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며/식구들과 똑같은 밥상을 만들었다 ”는 구절을 보면 친정아버지는 굉장히 곧은 사람이자 휴머니스트이다. 이런 아버지의 훈육과 주변 환경이 오늘의 시인을 만든 근원인지 모르겠다. 비산동은 대구에서는 가난한 동네의 대명사였다.
그이는
이 골짜기에 누워있을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7세 때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 곁 호롱불 밑에서
서울법대를 나와서
대학교수를 한 분입니다
하늘을 봐도 부끄럼 한 점 없는
일생 이었지요
방학 때마다 김천 지례(부항)에 내려와
술도가에 말술을 시키고
돼지 잡고 닭 잡고 하여
동네 분들을 대접했습니다
저도 남편 따라 벌초 때는
이웃마을까지 타월을 돌렸습니다
부항댐으로 인하여
마을이 수몰되기 직전
동네 분들은 그동안 감사편지와
그해 비싼 곶감을 두 상자나 보냈습니다
그이는
이 골짜기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이장(移葬)은 안 됩니다
-「 안해(아내)」전문
시에 따르면 시인의 부군은 서울법대를 나와 대학교수를 한 분이다. 엘리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사실을 세속적인 자랑으로 진술 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부유한 환경이 아닌 산골에서 “ 7세 때 부모님을 여의고/할머니 곁 호롱불 밑에서” 어렵게 공부해 자수성가한 부군이, 고향사람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보은은 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의 전통사회는 마을공동체 전체가 사람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던 것이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화되면서 아이의 훈육과 성장은 오롯이 가족이나 학교의 몫으로 제한되었다. 「안해(아내)」에서 보면 알 수 있는 바처럼 부군은 일찍 유명을 달리해서 자신이 젖줄을 잇대고 자라났던 고향 선산에 묻히게 되는 데 이 선산이 이장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단호하게 이장을 반대한다. 작게 보면 단순히 가족의 이장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조금 확대해 보면 이 시에는 전통/개발의 문명을 충돌을 느낄 수 있다.
키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삼익아파트 2층 창 밖에서
사시사철 눈을 떼지 않고
우리 집을 들여다 본다
나는 여름 한 철
변덕스럽고 불규칙한 장맛비에 뒤엉켜
머나먼 바닷가로 밀려갔다가
가슴앓이 환자의 모습이다
창밖의 은행나무는 속삭인다
하늘 아래 홀로서기 하는 데는
오직 자기 자신 뿐이라고
자기는 꼿꼿이 서있는데
어서 털고 일어나라고 한다
나는 부끄럼도 없이
몸을 기대며 울기 시작한다
은행나무는 또다시
등을 두드리며 달랜다
너무 연연하지 말아라
한바탕 꿈인 것을
-「 창밖의 은행나무」전문
이 시는 한 집안에서는 기둥이면서 시인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였던 대상을 사실한 후 겪는 시인의 심리적인 갈등을 그리고 있다. 시적 화자인 나는 “ 여름 한 철/변덕스럽고 불규칙한 장맛비에 뒤엉켜/머나먼 바닷가로 밀려갔다가/가슴앓이 환자의 모습 ”인 것이다. 이런 가슴앓이 주인공에 대해 창밖의 키 큰 은행나무가 “ 하늘 아래 홀로서기 하는 데는/오직 자기 자신 뿐이라고 ” “ 너무 연연하지 말아라/한바탕 꿈인 것을 ”이라고 조언한다. 동양적 세계관인 불가에서는 사실 삶/죽음의 경계가 없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은 삶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마치 구름처럼 생성했다 소멸하는 존재인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이 무상無常에 대한 개념은 그러나 현실을 사는 인간에게는 쉽게 획득하기 어려운 철학적 경지인 것은 분명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별의 철학이 드디어 자연으로까지 확대된 것이 아래 인용한 작품이다.
여름 청개구리들이
모두 철수해 버린 어느 저녁
나의 청개구리가 창틀에서 꽉꽉하고 있다
내년도 작년처럼 가뭄이 들면
자기는 기약할 수 없는 처지라며
올해는 정말 행복했고
작별은 우리에게도 무척
슬픈 일이기에 다시 찾아왔다고
나는 입으로 똑똑 신호를 보내니
몸을 꿈틀한다
9月도 그렇게 보낸 저녁
큰방 창틀 앞에서 깜짝 놀란다
너무 쇠약하여 소리도 내지 못하는
나의 청개구리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게 마지막 이별이구나
우리 사이가 끝난 것이구나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 밤을 뜬눈으로 밝혔다
-「작별」전문
사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세상살이는 이별의 또 다른 이름인지 모른다. 이별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가가 개인이나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우리에게 ‘이별’에 대한 많은 시사를 가져다 준다. 청개구리와 이별 후 시적 화자가 “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그 밤을 뜬눈으로 밝혔다 ”는 구절은 인생에 대한 깊은 상념을 갖게 한다.
나는 너의 정원에
너는 나의 정원에
꽃씨를 가득 뿌린다
팔공산 한티고개 너머
캄캄한 밤 속으로
지프차는
쌍라이트를 환하게 켜고
오르막 산길을 힘차게 달린다
눈앞 불빛이 가는 방향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길이
언제 끝날 것인지
어떻게 되돌아 나올 것인지
여유가 없다
지금은
너와 내가 있을 뿐
-「팔공산」전문
돌 뿐이다
소나무뿐이다
깊은 계곡 뿐이다
밤하늘은 별 뿐이다
산새들 지저귐 뿐이다
사랑, 사랑 뿐이다
-「팔공산 ․ 2」전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 팔공산 」연작 두 편이다. 팔공산을 밤에 “ 쌍라이트를 환하게 켜고/오르막 산길을 힘차게 달”리면 “눈앞 불빛이 가는 방향 밖에/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산길만 앞에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이 길이/언제 끝날 것인지/어떻게 되돌아 나올 것인지/여유가 없다/지금은/너와 내가 있을 뿐 ”인 어떤 고독감이나 절망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팔공산 ․ 2」에서 보면 결국 그 깊은 산속에는 소나무 같은 자연과 무엇보다 “ 사랑, 사랑뿐이 ” 존재한다.
시인은 이 팔공산 자연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진리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사랑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팔공산은 위무의 공간이자 광활한 비밀리에 우주와 접속하는 진리의 장이기도하다. 이 팔공산 속에서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가 탄생했다. 시인에게 팔공산은 축복인데 그것은 앞에서 보여준 「 아내 」나「 작별 」같은 이별이 있은 후에 가능한 세계이다. 그러니까 이별은 또 하나의 새로운 만남을 가져다준다는 인생의 진리를 이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은 유유자적의 멋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모자의 등 뒤에서
동네사람들은 수근 거린다
요새 딸기 밭에 무슨 일이 있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 가노
우리처럼 비료 듬뿍 주고
제초제 몇 번 뿌리면 될 일을 참
다른 밭의 짙푸른 잎들을
내심 부러운 듯이 하면서
딴 세상 이야기인 듯 바라 본다
약쑥과 잡초들을 베어
나무 밑에 소복이 깔아주면
자연양분이 되는 원리를 믿는다
때때로 벌집 곁에
미련스럽게 가까이 갔다가
퉁퉁 부어오르는 얼굴이 되어도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일이
얼마나 크고 경이로운가의 체험
남모르는 감동의 스토리가 있어
어리석은 모자는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 어리석은 모자」전문
이시는 어머니와 아들이 산 속에서 요즘 일반적인 농사법인 비료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연농법을 실천하다가 벌에 쏘여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경험을 통해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크고 경이로운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잇속에 밝은 농사꾼이 보면 어리석은 모자母子일 수 있지만 두 사람은 행복한 마음이 된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할 때 행복한 것이다. 이별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순환에 순응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빛나는 것이다. 이런 삶에 대한 지혜로운 전형을 허태연의 이번 시집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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