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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배 시인 해설
만남의 시학(詩學)
맑다. 시인의 표정이 부드럽고 겸손하다. 격의 없는 이웃집 형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정의로운 일에는 결기가 느껴진다.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 인간이다. 박영배 시인을 처음 본 인상이 이렇다. 마치 자신이 살고 있는 삼천포 앞 바다의 봄 물결처럼 맑고 아름다운 이 인품은 그의 시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와룡산 자락에서 풀잎처럼 살면서, 이슬처럼 영롱한 시를 빚어내는 시인의 이런 삶의 태도는 지역문학과 한국문학을 지키는 중요한 주춧돌임에 틀림없다.
내륙인 대구에서 활동하는 내가 박영배 시인을 만난 건 순전히 박재삼 선생 덕택이다. 박재삼 시인이 살아 있을 때는 별 다른 교유를 갖지 못했지만, 그가 작고한 후 지역의 후배 문인들이 박재삼 시인을 기리는 일에 연관되면서 여러 차례 삼천포를 찾았다. 그때 만난 인연이 바로 박영배 시인이다.
삼천포에서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이었다. 지역이면서 그것도 최남단인 바닷가라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준 높은 문예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이 지역 시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은 남해 바닷가 사람들의 자존감 높고 활달한 기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적지 않은 삼천포 방문에서 내가 특히 감동을 느꼈던 것은 벚꽃이 만개한 눈부신 봄날, 와룡산 기슭에서 열리는 와룡산문화제와 구암 이정(龜巖 李楨 1512∼1571) 선생 추모제였다. 이정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데 이 지역출신으로 일찌기 출사하여 오랫동안 퇴계 선생과 교유했던 분이다. 경상북도 안동 사람인 퇴계가 멀리 남해안의 구암 선생을 찾아와 남긴 시가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학문적인 교유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동문화권 출신으로 대구에 살고 있는 내가 목포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시인인 박영배 선생의 옥고에 한 줄 평을 더한다는 것은 비단옷에 검불을 붙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적이 걱정된다. 사실 나와 박 시인의 관계를 퇴계와 구암에 빗대기에는 나의 학문적 깊이나 인품이 선학인 두 사람에 비해 너무 천하고 보잘 것 없어 거의 망발에 가까운 발상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존경하고 문학적 교유를 할 수 있다는 인연은 두 사람에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박영배 시인의「만남이란」시를 읽어보자.
삶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삶을 확인할 수 있으며
수많은 만남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숙하게 보완 할 수 있습니다
만남은 그 형태도 중요하지만 만남이 가져다주는 의미 또한
참으로 다양합니다.
따라서 환희의 기쁨을 맛볼 수 있고 또 다른 행복을 꿈꿀 수도 있습니다
만남은 순간이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만남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만남을 통해서 창조되고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나 역시 젊은 날에는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이제 자연과 벗이 되어 초야에 묻혀 살아가지만 만남은 선택과 동시에
책임이 따릅니다
저마다 부르는 노래,
저마다 추는 춤,
저마다 걸어가는 길,
저마다 간직한 희망이 있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마음만 열어놓으면 언제라도 누구와도 만날 수 있습니다
삶은 만남의 연속이며 건강한 만남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와 폭이 더 열려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위해 우리는 늘 무엇인가 꿈꾸고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들에 핀 꽃들도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르고 그 향기가 다르듯이
삶이 아름다운 것은 저마다 추구하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구든지 만나십시오.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산을 만나고
오늘 만나 내일 이별을 선언할지라도 우리는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고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가져옵니다.
삶이란 이렇듯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지금 나의 모든 만남이 기쁨과 희망으로 환희와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아껴주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겠습니다
-「만남이란 」전문
제법 긴 이 시를 보면 시인 박영배의 시학(詩學)을 알 수 있다. 박 시인은 “우리의 삶은 오직 만남을 통해서 창조되고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면서 “삶이 아름다운 것은 저마다 추구하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라고 되묻는다. 이때의 만남을 우리는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으로만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사람과 자연, 사람과 미물, 자연과 자연의 만남도 바로 만남인 것이다.
이 만남이 특정 도그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추구하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이 열린 태도는 박영배 시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보인다. 이 열린 태도, 다원적 사고야 말로 오늘 한국사회가 추구해야할 중요한 가치인 것을 박영배 시는 증명해 보이고 있다.
박영배의 시는 바로 이 만남에 대한 예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 시를 보자.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간다
창밖. 나뭇잎 지는 소리
나뭇잎 구르는 소리
나도 모르는 사이
깊은 수렁으로 십일월 가을비가 내린다
설움의 잔뼈들이 찬바람을 안고
내 심장 구석구석에 박혀
오갈 데 없는 낡은 기억들로
오늘 밤은 또 얼마나
힘든 몸살을 앓아야 하나
가로등 불빛을 저으며
굵은 빗줄기가 사선을 긋고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내 주위 모든 세상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절규를 쏟아내며
모두가 다 울음바다가 된다
가을이 깊을수록 수많은 사연들이
조각조각 부서지는데
십일월 빗소리가 성큼 성큼 걸어온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가을이 깊을수록 」전문
이 시는 자신과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다. 가을비 오는 11월 밤, “설움의 잔뼈들이 찬바람을 안고/ 내 심장 구석구석에 박혀/오갈 데 없는 낡은 기억들로/ 오늘 밤은 또 얼마나/ 힘든 몸살을 앓아야 하나”라고 자탄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인의 실존적 고뇌를 읽기 어렵지 않다. 이 힘든 몸살을 앓으면서 찾고 만나려는 자신이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괴테도『파우스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방황하고 회의하기 마련인 것처럼 나이 이순이 넘은 시인에게도 자신의 실존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탐구는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자신과의 만남에 대한 탐구는 다음과 같은 시로 이어진다.
세상 모든 일은 수면에서 자라는 수초처럼
아직 목표를 정하지 못한 우리에게
여러 갈래 난해한 과제로 찾아와 흔들곤 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젊은 청춘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백목련 하얀 잎이
빗소리에 몸을 적시는 저녁이면
뭇 사내 같은 어둠이 다가와 흔들어대고
오래 묵은 기억들도 별빛에서 피어나
물 위에 뜬 달빛처럼 잔잔히 흔들린다
봄이면 느닷없이 찾아오는 꽃샘추위라든가
여름날 갑자기 비가 눈으로 바뀌는 변화.
생각지 않은 재해로 물바다가 된다든가
그래도 꽃은 피고 낮은 우리가슴에
푸른 초원이 늘 살아 숨 쉬는 것은
바위틈을 밀고 올라오는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다
이 세상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대지도 지진으로 흔들리고
조약돌은 파도에 흔들리고
바람은 대 숲에서 서럽도록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흔들리기 때문에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흔들림에 대하여」전문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백목련 하얀 잎이/빗소리에 몸을 적시는 저녁이면/뭇 사내 같은 어둠이 다가와 흔들어대고/오래 묵은 기억들도 별빛에서 피어나/ 물 위에 뜬 달빛처럼 잔잔히 흔들린다” 는 이 이름다운 서정시는 “이 세상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흔들리기 때문에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 이라는 인생의 철리(哲理)를 명확하게 인식시켜준다. 앞서 괴테도 인용한 바 있지만,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회의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 끝없는 좌절과 회의, 절망을 거쳐 도달한 진리야 말로 회색빛이 아닌 싱싱한 생명력을 가진 늘 푸른 나무가 되는 것이다. 박영배 시인의 시적 내공은 이 점을 꿰뚫어보고 있다.
시인의 이런 흔들림을 끝은 어디일까? 다음 시를 보자.
영하의 여명(黎明).
半(반)이나 되는 달이 남으로 걸려있다
오늘 기말 성과도 반이나 될런지,,,
입김을 날리며 7시 차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버스에 올라 “00학교 앞에 쯤 내려 줄 수 있느냐“ 물었다가
투박스럽게 거절당했다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도 오래 전 직장 상사로 있으면서
남들의 부탁을 저렇게 잘라버린 적은 없었는지...
내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삭인다
-「나의 히말라야」부분
사랑은 지옥.
칠십 이 시간 울리지 않는 휴대폰
내가 나를 마시고 비틀거리는 막장
한 톨의 마음 씨앗이 말라죽고 마는 것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나를 혹사시키고 싶은 순간
그러나 사랑은 천국.
잘 익은 별처럼 그대가 있어
머리맡으로 흘러내리는 풋풋한 햇살
꽃대를 유혹하는 나비의 날개 짓
에메랄드빛 그리움
내 비밀스런 심장에 펄럭이는 깃발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숨 막힌 시간들을...
-「천국과 지옥」전문
「나의 히말라야」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봉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든 우리 삶에 대한 비유이다. 추운 새벽, 아직 서녘에 달이 걸려있는 이른 시간에 기말 성과를 채유기 위해 7시 차를 탔는데, 기사에게 하차 편의를 거절당한다. 그러자 화자는 “나도 오래 전 직장 상사로 있으면서/남들의 부탁을 저렇게 잘라버린 적은 없었는지... /내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삭인다” 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다. 근대 문학에서는 시적 화자와 시인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에서 시적 화자와 저자를 일치시킨다. 이런 관습에서 보면 이 시의 성찰적 주체는 박영배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타자에게 화를 내거나 분노를 보이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이런 미세한 마음의 흔들림을 통해 세상의 또 다른 영역으로 자신의 삶을 확장시킨다. 그 증거가 바로 「천국과 지옥」과 「너를 생각하며」의 연시(戀詩) 풍의 시이다.
사랑을 완성하지 못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열정을 아직도 느끼고 있다면 시인은 얼마나 행복한가? 지옥도 되고 천국도 되는 게 세속의 사랑이다. 문학에서 세계의 명작치고 사랑을 노래하지 않은 작품이 어디 있었던가? “에메랄드빛 그리움/내 비밀스런 심장에 펄럭이는 깃발”을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안다/그 숨 막힌 시간들을...”이라는 진술에서 깊은 공감과 함께 타는 듯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런 대상에 대한 연모의 시심은「너를 생각하며」에 오면 절정을 이룬다.
이곳에 겨울이 오면 무척 외로워
바람 부는 산간.
앙상한 나뭇가지.
뒤 궁구는 낙엽
쳐다만 봐도 슬픈 것들이
내 가슴을 밀고 들어와 짓궂게 흔들곤 해
산새들이 우르르 날아가는
갈대 밭 너머로 어둠이 밀려오면
차디찬 방에 우두커니 서서 너를 생각해
네가 없어서 힘들어
온다는 기약도 없는데
기다리는 것은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여름날 그 무성하던 우리들 이야기가
도란도란 들리는 것 같은
어둠 저 밖으로 막차가 불빛을 쏟으며
뒤뚱 뒤뚱 내려간다
잠결에라도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다
내 머리맡 달빛이 내려앉을 때
살포시 다가 와
그 곳 사는 이야기라도 전해주렴
-「너를 생각하며」전문
박영배 시인의 득의의 수작이다. 아름다운 서정과 연모의 시심이 넘치는 뛰어난 작품이다. “산새들이 우르르 날아가는/갈대 밭 너머로 어둠이 밀려오면/차디찬 방에 우두커니 서서 너를 생각해// 네가 없어서 힘들어/온다는 기약도 없는데/기다리는 것은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의 구절에서 화자가 기다리는 대상은 누구인가? 아름다운 여성? 아내? 아니면 ‘너’로 상징되고 비유된 ‘진리개념’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세계? 그것이 무엇이 됐든 상관없이 이 시는 언어가 주는 서정과 페이소스 그 자체로 인해 스스로 고독하고 아름답고 빛난다.
이 시집에서 3부는 주로 가족에 대한 시로 이루어져 있다. 박영배 시인이 부인을 사랑하는 애처가요, 가족 간에도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어머니, 아내, 장애인 동생, 처남, 부모의 가슴에 묻은 자식, 손자 윤후 등의 시적 파노라마는 박영배 시인의 문학적 환경을 가늠하게 해주고 현재 감동적인 시를 쓰는 시인의 시심이 어디서 발원하는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보고서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시 한 편 더 읽어보자.
겨울밤은 눈과 함께 어둠이 들고
눈에 쌓여 깊어간다
온종일 추위를 견디며 삶에 허덕이다가도
저녁이 되면 어둠을 털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비록 무거운 짐이 어깨를 누를지라도
살아 있어 숨차게 움직일 수 있고
반가운 사람도 만날 수 있으니
아침에 눈 떠서 밝은 햇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우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전깃불이 하나둘 켜지고 음악이 흐르는 밤거리를 지나다
토끼 같은 녀석들 생각에 뜨끈한 붕어빵 한 봉지를 사 들고 와
가족들과 보내는 겨울밤은 내일 아침의 희망이다
밖은 싸락싸락 눈이 쌓여도 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밤하늘엔 정의에 폴라리스가 지키고 있어
겨울밤은 더불어 평화롭다
-「겨울밤」전문
시는 인생에 대한 증언이라고 서구의 한 비평가는 말한 바 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겨울밤의 정경처럼 지역문단에서 훌륭한 어른이요, 한국시단의 중견시인이면서 한 집안의 공명정대한 버팀목으로 살아온 박영배 시인의 시와 인생이 더욱 빛나기를 기원한다. <끝>
김용락(시인, 경운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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