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진명 시집 해설(2012. 9. 9)
문학과 현실의 변증법적 재구성
-장진명의 시학
김용락(시인, 경북외국어대학교 교수)
장진명 시인의 보면 사마천이 쓴 중국 <사기史記>에 나오는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가 떠오른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추어도 저절로 삐져나온다는 뜻인데 흔히 뛰어난 인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시인으로서 장진명은 충분히 주목할 만 한 하다. 필력으로는 이제 첫 시집을 내는 신인에 불과하지만 시를 이끌어가는 언어의 유려함이나 현실의식과 역사에 대한 인식, 지역에서 문학 실천운동 등을 두루 포괄해 볼 때 만만찮은 내공을 가진 하나의 ‘물건’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장진명 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 그리고 생계를 이끌고 있는 주 무대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倭館)이다. 대구와 구미시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읍인 왜관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 때 왜국(일본)과 무역을 할 때 일본인들이 머물던 곳이다.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현재 칠곡군 지역 낙동강가에 왜관을 설치했고 그것이 굳어져 현재까지 이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때 격전지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유명하고 파괴된 ‘왜관철교’는 전흔의 상징물로 남아있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실고 있는 이 지역을 한국전쟁 때 국토를 지켜준 호국과 우국 고장으로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땅에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지 현재 이곳에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주둔해온 미군부대가 남아 있고, 이태 전에는 군부대 안에 고엽제를 몰래 매장한 문제로 전국이 떠들썩할 정도로 관심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인구 3만 명 내외의 이 조그마한 읍 규모의 도시에 문학 동인이 10여 개나 될 정도로 문학적 열기가 높은 곳이기도 한데 그 일각을 장진명 시인이 10수년 전부터 이끌고 있다. <난설문학회>가 그것인데 연혁은 10년이 넘었고 매년 발간해온 동인지도 열 권 째를 넘기고 있다. 무엇보다 회원들의 작품수준이 중앙의 유수한 잡지에 실린 작품 못지않게 뛰어나다. 그 문학활동과 만만찮은 성과의 중심에 장진명 시인이 버티고 있다.
앞으로 따져보면 알 수 있겠지만, 장진명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으로서 이 조그만 도시가 안고 있는 캠프캐롤 미군기지 주변의 유흥가 여성들, 처음에는 산업인력으로 이 도시까지 이동해 왔다가 어느덧 ‘흑두루미 주점’의 여급이 된 이 가련한 ‘붉은 나비’들에 대한 이야기와, 호국의 도시라 불리는 이 도시가 안고 있는 전쟁의 상흔이 어느덧 개인의 가족사에까지 침범한 화인과도 같은 생생한 사례와, 미군기지가 야기한 환경파괴와 약소국민들이 갖는 비애에 대해 뛰어난 형상력으로 시를 조각하고 있다.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논자에 따라, 그리고 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나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영원한 이상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데아IDEA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이 문학적 탐구가 지나치게 이데아만을 겨냥하고 현실 삶에 대한 응전력을 상실할 때는 허황한 수사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인류의 오랜 문학사가 증거 하는 바이다. 바람직한 문학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매개하면서 인간의 보편적 이데아, 즉 인권이나 자유, 민주주의, 평등, 박애와 같은 사회현실적인 가치나 아니면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인 삶/죽음 같은 존재의 영원성이나 신에 대한 구원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현실이나 역사의식만을 강퍅하게 주장할 때 날선 선전이나 선동에 그치고 몰현실한 언어유희에 그칠 때 그것은 문학도 선전도 아닌 말 그대로 문학을 참칭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장진명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존재를 예감케 하는 것은 이 시인이 자신의 삶의 터전인 ‘지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나 한계에 정확히 닻을 내리면서도 부박한 선전에 머물지 않고 그 경계점을 끊임없이 긴장감을 가지고 극복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학과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문학적 내공이나 식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장진명의 시를 살펴보자.
가상의 공간에서 막 걸어 나온 듯
휘장같은 원피스를 걷어들고
검고 가련한 허벅지를 온통 드러낸
몽골의 붉은 나비
그녀는 캥거루처럼 구부정하게 인사를 했다
쫄아드는 키만큼씩 자꾸만 높아지는
끝이 뾰족한 하이힐에서 우두둑 잔뼈가 틀어지고 있었다
채찍을 든 일본 원숭이를 피해
공중제비를 넘는 그녀가 곧 울 것 같아서
자정의 술꾼들은 술잔을 부딪히며 소리를 질렀다
징기스칸 만세!
새벽을 걸어가는 그녀를 본 적이 있다
주점 어스름등이 꺼지면 피가 스민 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호르르 날아가는 붉은 나비
가무레한 뒷꿈치가 옴씬옴씬 품어내는
몽골의 향취가 수액으로 점점이 얼룩지는 그녀를
나는 매일 주점으로 간다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는 새벽 지하철
부스스한 내 얼굴이 그녀 같아서
채찍을 든 일본 원숭이의 부라리는 눈알이
그녀를 관통하고 나를 관통하는
극적인 마조히즘을 위해서
경극 배우의 짙은 분장으로 숨긴 그녀의 살기가
패왕별희처럼 시퍼런 장도를 휘두를 것 같은
두려움에 떨면서
어머니는 낭떠러지는 위험하다고 했다
눈이 오고 별은 눈 속에 갇혔다
나는 세상 끝이 보고 싶어 인파가 붐비는 동성로를 지나
주점 낭떠러지 문을 민다
발이 허공을 짚는다
-<붉은 나비> 전문
‘붉은 나비’가 되어 밤마다 일본 원숭이의 채찍 아래서 서커스를 넘는 가련한 몽골여성의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그 여성에 대한 연민은 가령 “캥거루처럼 구부정하게 인사”를 한다거나, “끝이 뾰족한 하이힐에서 우두둑 잔뼈가 틀어지고” 있다거나 “피가 스민 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호르르 날아”가는 듯하다는 묘사에서 그 비극성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것은 장진명이 언어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시 <붉은 나비> <흑두루미주점> < 흑두루미주점 희미한 등불 꺼지고> <노란 유리방>에 등장하는 이 여성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여성들의 삶의 간난함과 비애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지만, 좀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노동력 이동이라는 거대한 국제적 물결 속에 휩쓸려 떠내려온 부평초에 불과하다. 그들이 지폐 몇 장 때문에 낯선 곳에서 겪게 되는 고통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것은 이 세계가 자본증식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선호하는 이상 피하기 어려운 형벌과 같은 것이고 경제학자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에 다름 아니다.
그 악마의 맷돌 속에서 몽골이든, 조선족이든, 우즈베키스탄이든 네팔이든 간에 그녀들은 여지없이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가/지폐에 여린 손가락을 물리고 있”고 “베인 상처 맨발에 가득한데/뼈가 아프”(<흑두루미주점>) ㄹ수 밖에 없다. “술에 취한 그녀 손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지폐를 보며/야윈 날개를 감싸 안고 잠들 때마다/들려오는 흑두루미 소리”(<흑두루미주점 희미한 등불 꺼지고>)는 왜관과 인접해 있는 해평습지(현재 4대강 개발로 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흑두루미도 날아들지 않고 있다)에 날아드는 흑두루미와 왜관 미군부대 주변에 날아드는 유흥주점의 여성들을 등치시킨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진명 시인의 날카로운 시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이런 류의 시들이 단순한 현장 고발시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증거는 <붉은 나비>의 뒷 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어머니는 낭떠러지는 위험하다고 했다/눈이 오고 별은 눈 속에 갇혔다/나는 세상 끝이 보고 싶어 인파가 붐비는 동성로를 지나/주점 낭떠러지 문을 민다//발이 허공을 짚는다 ”에서처럼 이 여성들의 삶을 “세상의 끝이 보고 싶다”는 자신의 실존적인 열망과 등치시킴으로서 이 역사적 현실을 단순이 방외자의 시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육화시키는 시적 기법에 있다. 여기서 독자들은 이 시의 진정성에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된다.
현실자본주의의 우울한 자화상에 대한 시인의 현실 인식은 <미끼> <무녀도> <굿바이 피카소> 등에 오면 처절해진다.
해외토픽이다
건기의 어느 아프리카 오지
굶주린 가족이 뱀사냥을 나선다
달리 방도가 없기에
가난한 家長은 온 몸을 미끼로 쓴다
뱀 구멍에 다리를 밀어넣은 채
카메라를 향해 허옇게 웃는다
-<미끼> 부분
자본주의 아래서 어떤 군상도 무사할 수 없다. 1949년 초연돼 퓰리쳐상을 받은 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이라는 희곡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가족(두 아들)을 위해 보험을 들고 스스로 죽음을 택해 가족에게 보험금을 돌려준다는 이 작품은 이미 1950년대 미국에서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성의 파국을 예언한 날카로운 작품이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뱀 구멍에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는 이 아프리카 가장이 바로 이 땅의 많은 아버지라는 사실을 시인은 부인하지 않는다.
한반도의 아름다운 낙동강변이 한 때는 왜국의 상품 식민지로, 현재는 미군의 군사적 주둔지로 전락하고, 그 주변에 부나방처럼 물려드는 유흥여성인력의 삶을 이처럼 형상화해 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장진명의 시는 작은 지방도시에서 발화했지만 한국 전체 문단에서, 아니 세계문학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관 읍내 반을 차지한 채 철조망을 둘러치고 앉은
미군부대 담벼락 위에 달이 걸렸다
늙은 여배우 같은
환경부장관의 연약하고 나직한 몇 마디의 인터뷰
그 뒤로 현수막 몇 개 걸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독극물
아름드리 몇 백 년 고목도 말려 죽이는
더불어 사람도 말리고 말려 최악의 고통으로 밀어 넣는
희대의 독극물
버리지도 못하고 묻어 둘 수도 없고
지구 어느 곳에서도 그 존재를 두려워하는
이것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두려운 그것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묻은 자는 있는데
땅속에는 없고
파낸 자는 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전모를
달은 철조망 너머 베네딕또 수도원 고요한 지붕을 향해 솟아오르는데
달빛에도 어둡다
어두워서 지척을 분간 할 수 없는
저 캠프캐롤이 괴물처럼 두렵다
-<캠프캐롤의 달> 전문
이 시는 이태 전 왜관에 미군부대 캠프캐롤에서 발생했던 고엽제 은닉사건을 시로 쓴 것이다. 월남전 종전 후 고엽제가 왜관의 캠프캐롤로 이송돼 왔고, 그 이후는 행방이 묘연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왜관주민뿐 아니라 대구경북의 환경단체 회원들이 사건진상규명을 주장하면서 민/민 갈등이 야기되기도 했지만 뚜렷한 결론 없이 미제 처리되었다.
“달빛에도 어둡다”는 시인의 음성이 묘한 울림을 주고 있다. 약소국에는 태양이 떠도 어둠이 결코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 미군의 주둔과 동북아 전략, 패권주의, 평화, 생태문제 등 우리 국민들에게 여러 가지 사안을 화두로 제공하는 시이다.
전쟁이 평범한 시민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다음 시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와 나는 도시를 방랑하며 살았다
강과 하늘이 접혀져
수선화 꽃이 피어도 우리는 몰랐다
전쟁의 시절
통증만 남은 노동자들 틈에서
미제 낡은 군복을 입은 젊은 아버지의 흑백사진이
슬퍼 보이는 것은
만삭의 아내를 둔 아버지 대신
전선으로 향했던 막내 삼촌의 이름을
안개 걷힌 강에서 건져 올렸을 때 부터다(중략)
아버지가 69세의 나이로 수선화 옆에 묻혔을 때
아버지의 전쟁은 끝이 났다
나는 아버지의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이름을 지웠다
아무도 관심없는 막내 삼촌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 부분
참 오래된 슬픔이다
강 건너 불빛 환한 고향집 사랑채에
인민군들이 진을 치고
늙은 어머니와 가솔들이
분주히 저녁 짓는 연기를 보며
바로 그 곳을 겨냥하다가
탈영병이 되어버린 찻골 당숙 무덤이
숲데미에 민망한 사마귀처럼 돋아있다
사방 구만리가 다 시퍼런 하늘인데
굳이 837 고지가 보이는 그 곳에 묻혀
죽어서도 벌을 서고 있는 당숙이다
죽음은 참으로 선명한 증명이다
전쟁에 대해 누구하나 귀 기울이지 않는데
숲데미 굴참나무 뿌리를 자꾸 밀고 나오는
전사자들의 유해는
완곡한 표정으로 전쟁을 이야기 한다
이보다 더 사실적인 표현이 있을까
이보다 더 유장한 언어가 고금에 또 있을까
저 깜깜한 곳을 헤매다 겨우 당도한 풀잎위로
몸을 누이며 안도하는 저 환한 가여운 유해들
아 어찌하나 저 가여운 뼈
그 어머니들도 이젠 없는데
숲데미 산에 진달래가 유독 붉게 피었다
붉게 붉게
저 붉음이 어떤 징조처럼 불길한데
누구하나 허퍼 귀대고 듣지 않는데
죽어서 걸어 들어간 837고지
마지막 용사 찻골 당숙 무덤에는
군번 없는 용사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해마다 붉게 더 붉게 피어간다
달리 말을 전할 길 없어
죽은 자들은 꽃으로 피는지도 모르겠다
-<숲데미산> 전문
*숲데미산 - 칠곡군 석적에 위치한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837고지가 보이는 산
시 <아버지의 이름>은 만삭의 아내를 둔 자신(아버지) 대신에 막내 동생이 전선에 나갔다가 산화한 비극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 시인 자신의 실화인 듯 보이는 이 시는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도 있구나 할 정도로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시인에게 아버지의 이름은 삼촌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 이름 호명이 기실 삼촌의 이름이었던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 당사자였던 아버지의 평생의 삶은 어떠했겠는가? 그 가족이 가졌을 상처는 또 어땠겠는가?
전쟁은 평화롭던 한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왔다. 시 <숲데미산>은 찻골 당숙의 슬픈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전쟁이 강 건너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의 민초들 바로 자신들이 겪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이 두 편의 시이다. 한국문학에 이미 많은 반전시가 있지만 이보다 더 뛰어난 시를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전쟁의 배후에 현재 시인의 고향에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이 있고, 소련의 이데올로기 쟁투가 있었던 것이다. 약소국이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흔의 흔적이 가장 구체적으로 집적된 곳이 바로 경상북도 왜관이고, 이 지역 출신인 장진명 시인이 자신의 가족사를 관통하는 이 고통스런 흔적을 외면하지 않고 마침내 시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가족의 문제, 생존의 터전인 지역의 문제를 반전反戰과 평화라는 문제로 확대해낼 수 있는 자질은 매우 소중하며 지역에서 문학하는 바람직한 태도일 수 있다. 이런 점이 장진명의 시적 앞길에 기대를 걸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진명의 시가 시종일관 이렇게 유흥업소 여성으로 대변되는 국제 노동력 이동이나 인권, 전쟁과 평화와 같은 거대담론으로 들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로 표상되는 모성과, 생명력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이 시인의 또 다른 시적 재능을 실감케 한다.
하얀색 한지를 오직 세 번 접었을 뿐인데 한 세상이 담겼습니다
참 온화합니다 한지로 만든 이쁜 관속에
나는 몸을 가지런히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비산동 희미한 가로등 밑을 떠돌던 재봉틀 소리나
딸아이 교복치마에 묻어나가던 하얀 보푸라기들도 차곡차곡 담습니다
검은 상복을 입은 初老의 딸아이들은 고요한 몸짓으로 나를 담고 있습니다
한지로 만든 관은 참 넓고 따뜻합니다
이제 하늘과 손잡으려 합니다
하늘과 화해하고 싶습니다
온갖 새들을 불러 모아 창공을 날아 보고 싶습니다
내가 설움으로 걸었던 길고도 긴 황간 영동 붉은 황톳길이 한 눈에 보입니다
싸락눈 내리던 날이었던가요
구미 사곡역에 꽃가마 대동하고 서있던 젊은 남편도 보입니다
내 삶이 고단했듯이 그도 또한 서러웁게 살다간 사람입니다
이제 하늘이 나를 불러 손잡아 줄 것 같습니다
수도산이 마주 보이는 가야산 푸른 소나무 아래 딸아이들이 남겨져 손을 흔듭니다
이젠 알 것 같습니다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눈부심에 잠시 눈 감았을 뿐이라는 걸
나는 이제 바람이 됩니다
새가 됩니다
그리고 고요한 하늘이 될 것 입니다
-<風葬(풍장)> 전문
*이글은 사랑하는 어머니 故이종수여사님께 바칩니다
이 시는 작고한 어머니가 시적 화자로 등장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는 이 시는 슬프고도 아름답다. “이제 하늘과 손잡으려 합니다/
하늘과 화해하고 싶습니다”라는 진술이 보여주듯이 고단했던 거친 세상살이를 끝내고 종래 세상의 이치에 순명하고 모든 것과 화해하고, 처음 난 곳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평화롭고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것은 이 시의 화자가 오직 시인의 어머니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삶의 전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 인용한 <망초꽃밭에서 울다>는 그 어머니의 말년의 한 모습인데 삶의 비루함 대신에 모녀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생의 동행에 대한 황홀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어 이채롭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장진명 시인의 득의의 시법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에서 좋은 시적 풍광을 보여준 장진명 시인이 더욱 성장해서 우리시단의 큰 시인으로 우뚝 서길 기대하면서 졸필을 마친다.
유실물을 찾아오듯 어머니 손을 붙잡고
신동 파출소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데
개망초가 눈부시게 피어있다
소도 안 먹는 저 풀들은 지들끼리 꽃을 피워 자지러지는데
우리모녀 여름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
등이 굽은 어머니 눈에는 망초 꽃만 가득하고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걸음걸이가 황망하다
집으로 간다고 집을 나서는 어머니의 집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내 풀에 지쳐 길가에 주저앉는다
순하게 따라 앉은 어머니
등 기대고 앉아 가쁜 숨 몰아쉰다
못된 내 걸음이 빨랐나 보다
어머니 앉은 키 보다 더 커 보이는 망초
허리깨를 뚝뚝 분질러 주저앉히고
단 한 번의 손길로도 내 울음 그치게 하던
마르고 닳은 손잡고 일어선다
가볍다
점점 가벼워져 나비가 되려는지
나비되어
내가 찾지 못할 곳으로 가려는지
먼 길 가깝게 가려고
굽은 날개 털고있다
-<망초꽃밭에서 울다> 전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