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와 페르디난트의 전면전이 일어나기전에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 두가지 있다. 첫째는 독일의 군주들이 어째서 보헤미아의 왕위에 그렇게 까지 집착하는지에 대해서이고, 둘째는 그 당시 유럽의 군사체계이다.
< 7 선제후>
기본적으로 보헤미아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경제적으로도, 행정상으로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토적 야심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보헤미아 왕위에 포함되있던 "선제후" 의 직함이다. 선제후는 새 황제 선출에 대한 표결권을 가지고 있는 일곱 제후들을 말한다. 팔츠, 작센, 브란덴부르크의 군주와 쾰른,마인츠,트리어의 세 주교, 그리고 보헤미아의 왕이 7선제후에 속해있었다.
(30년 전쟁 초기의 선제후령. 마인츠 선제후령 (흑회색), 쾰른 선제후령 (좌측 상단의 회청색), 트리어 선제후령 (하늘색), 보헤미아 왕국 (노란색), 작센 선제후령 (붉은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남색), 팔츠 선제후령 (녹색) 이다)
선제후들의 우두머리격인 마인츠 선제후는 쾰른선제후, 트리어선제후와 함께 가톨릭 교회의 이익을 대변했다. 나머지 네 선제후는 세속군주로서 그 들중의 서열 1순위의 군주는 팔츠선제후였다. 하지만 선제후 제도가 있었다 하더라고 제위는 오래전부터 합스부르크가의 차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는 항상 황제 선출에 유리한 입장이었으나 한번 제위에 오르게 되면 선제후단의 통제를 벗어날수 없었다. 선제후단은 여러의미에서 제국의 진정한 통치자였다. 그들이 아니면 새 황제는 선출될수도 없었고, 그들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떤 제국의외회도 소집할수 없었다.
선제후는 앞서말했듯이 총 일곱명이었으나 선제후 회의에 소집될 수 있었던 선제후는 총 여섯명이엇다. 이유인 즉 슨, 보헤미아의 왕은 (독일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의 독립군주였기 때문에 황제 선출에 필요한 표결권은 가지고 있었으나 독일 내부의 일에는 간섭하지 못하였다.
당시 제국의 선제후들은 보헤미아의 왕을 제외한다면 종교적으로 균형상태를 유지하였다. 작센, 팔츠, 브란덴부르크의 군주가 신교인 반면 주교선제후령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는 가톨릭이었다. 2화에서 다루고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팔츠의 선제후로써 황제 선출에 대한 하나의 표결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보헤미아까지 차지해 2개의 표결권을 가지게 된다면 제위를 유지하려는 합스부르크가와의 정면 충돌은 불가피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두 군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과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두 세력의 정면충돌을 막고자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전쟁을 막으려던 두 군주는 각자 자신들이 이끌던 세력을 통합시키려 하지 않았고 시간을 지채했다.
황제는 이미 운명했고, 새황제를 뽑아야 하는 일이 남은 가운데 보헤미아의 표결권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제위를 차지하려던 페르디난트와 합스부르크의 제위 독점을 막고자하는 프리드리히의 충돌은 불가피해진 것이다.
<30년 전쟁기의 군사 체계>
많은 사람들은 30년 전쟁 당시의 군대들은 각국 군주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상비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비군을 가지고 있던 유럽 국가들은 소수에 불가했고, 상비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비군의 수는 전투에 보내기도 어려울만큼 적었다. 당시 유럽의 군대들은 대부분이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 들이었다. 이런 용병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한명의 지휘관에게 의지하며 군주들과 계약을 맺고 복무했는데, 계약에 없는 내용은 이행하지 않아도 됬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용병대와 지휘관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채 자유롭게 다른 군주들과 계약할수 있었다.
용병대를 구성하고 있는 군인들은 머스킷과 대포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훈련받은 직업 군인"들이었다. 근거리 전투에서 원거리 전투로, 그것도 화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에서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란 쓸모가 없었다. 창병들은 주로 근거리 전투에서 총병들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총의 성능이 개량을 통하려 점차 좋아지자 창병들의 비율은 계속 줄어들었다. 30년 전쟁기의 총병과 창병의 비율은 엇비슷하였다. 기병은 전체군대의 3분의 1 을차지하였고, 전장에서는 이들 능숙한 기병대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30년 전쟁기를 통틀어 17세기에서 유럽에서 가장 대중적이었던 "테르시오" 진형이다. 스페인의 천재 전략가 "코르도바"가 고안해낸 이 진형은 당시 유럽사회에서 "무적의 진형" 이라고 불려졌다.)
용병 지휘관들은 민족이나 종교를 상관하지 않고 가난한 농민들이나 인구 과밀지역의 잉여 인력들을 병력으로 충원하였다. 모집된 군사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에게 충성한 것이 아닌 ,자신이 속해있던 군기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하였다. 하지만 이런 충성심도 신뢰할수 있는 것만은 아니였다.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들은 대개 적군의 병력으로 충원되었고 군사들의 탈영은 늘 상 있는일이였다. 탈영병들은 당연 처형 대상이었지만, 이듬해 봄이 되면 전리품을 얻기 위하여 대부분이 복귀했으므로, 지휘관들은 굳이 탈영병들의 죄를 물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하지않았다.
30년 전쟁은 용병군인들에게는 최적의 시기였다. 그 당시 군대에서는 점령지역 약탈이 인정되었으므로 군대가 진군하는 경로의 거의 모든 도시가 초토화 되었다. 초토화 된 지역의 사람들은 생계유지수단을 잃었으므로 그들의 대부분이 군대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독일지역에서 맘껏 군대를 충원할수 있었고, 전투에서 승리할때마다 그들이 독일에서 미치는 영향력 또한 커져갔다.
프리드리히가 고용한 지휘관인 만스펠트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자신만의 용병단을 이끌고 다니던 용병지휘관세력들이 각 국의 군주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주무르게 되는 지는 독자들은 앞으로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차례 보게 될것이다.
첫댓글 이 지방은 나폴레옹 토탈워할때 도움은 안되고 군사만 모아놓는 계륵이죠
바이에른은 그나마 도움이 되죠...;ㅅ;
테르시오가 일종의 방진같은건가요?
네...일종의 방진이죠. 나폴레옹시대의 방진과 다른점이라면 저때의 총병들은 총검을 부착하고 있지 않기때문에 창병이라는 근접병종을 이용하여 방어된다는 점이겠죠.
근데 테르시오진형이랑 팔랑크스진형이랑 어떻게 차이가 나요?
팔랑크스는 전방에 집중한 나머지 후방이 비는데, 테르시오는 사각형의 방진형태여서 후방의 기습을 차단하는 형태입니다.
주교선제후령은 말 그대로 주교가 선제후도 감하는건가요?
그리고 트리어의 세 주교령은 말 그대로 주교가 3명있나요?
선제후의 경우 Spiritual Lords(the Archbishop of Mainz, the Archbishop of Trier, and the Archbishop of Cologne) 선제후 인 카톨릭 주교를 겸하는 (말그대로 주교가 영주처럼 영지를 가지고 통치합니다) 선제후가 3명 에 Temporal Princes(the King of Bohemia, the Count Palatine of the Rhine, the Duke of Saxony, and the Margrave of Brandenburg; these last three were also known as the Elector Palatine, the Elector of Saxony, and the Elector of Brandenburg, respectively)인 세속군주 선제후 4명이 잇던 걸로 압니다.
예를 들어서 마인츠 주교가 마인츠를 다스리는것과 같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어떤 추기경이 마인츠의 주교가 되기 위해서 푸거가문의 돈을 빌렸고, 그 결과로 마인츠 주교가 되어서 마인츠를 다스리게 되죠. 한마디로 이 지역에서는 주교가 제후의 역할을 하는거죠
그리고 트리어의 세 주교령이란 말이 아니라, 쾰른, 마인츠, 트리어를 합해서 세 주교령이라고 하는겁니다
아하 그렇군요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도시국가들은 별로 주목 안받앗나요 저때는? 'ㅂ'
도시국가들이 별로 주목을 안받은건 아닙니다. 다만 이번 글에서의 주제가 7선제후이기 때문에 도시국가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은거죠. 그리고 저 당시 독일에서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전이기 때문에 도시국가들이라는 표현을 쓰지않고 제후, 주교라고 한답니다
자유도시도 몇군데 있지 않았나요? 아우구스부르크라던가...?
아마 구교 vs 신교 중앙무대가 되던 몇몇 자유도시는 개박살 나고 자유도시 권한을 잃어버리거나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흠 한자동맹이나 뤼벡 같은경우는 무기장사 같은거 하지 않앗을라나요?
30년 전쟁기의 여러 자유도시는 개박살이 나버리고, 슈틀라준트와 같은 북해 or 발트해의 자유도시만이 전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죠
그리고 물론 자유도시들도 전쟁에 참전을 하긴 했지만 , 참전만 했을 뿐 그 활동이 미미해서 이번 주제에선 다루지 않았습니다. 후에 발레슈타인과 구스타프 아돌프가 나올때 언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전쟁으로 스폐인은 유럽의 폐인이됩니다.
꼭 이 전쟁때문이 아니라도 스페인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죠. 극심한 인플레, 무능한 국왕, 네덜란드의 독립 등..
극랄한 독일사를 탐구하는데 도움이 되겠군요. 특히 주교령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저도 은근 궁금했는데 감사합니다.
차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오오오
음... 시험기간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썼었던 내용이 허접한 감이 있어서 12월 말쯤부터 리메이크판으로 다시 올리려고해요. 조금 기달려주셔야 할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