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순하다는 '남의 뜻에 맞추거나 순순히 따르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의 뜻에 수순하려면 부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참으로 수순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법화경의 구절을 적고 그것에 대한 간단한 생각, 이해를 적어나가는 나에게 경시와 조롱을 퍼붓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해라고 해봤자 구절을 다시 옮겨적는 수준에 불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멋대로의 해석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경시하던 사람은 경전 구절을 적는 저에게 '너의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드러난 구절조차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주장이 아주 많이 이상했습니다.
나의 의견이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배우려는 자에게는 부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는 일이 됩니다. 그것을 알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해가 생겨납니다. 그런 이해는 근기를 따라 깊어지고 변화합니다. 그런 사람은 점차 다른 이의 법문을 보아도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중생습이 고정시키려 하고 자신이라 할 것을 내세우게 하지만 그것에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머물지 않고 무엇이 부처님 뜻인가를 끊임없이 찾아가기에 점차 부처님의 뜻에 수순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크게 깨달은 선지식의 글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이 곧 부처님의 법 자체는 아닙니다. 그 분의 근기에서 이해한 부분입니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말함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적인 수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전하고 받아들이는 자에 의해서 왜곡되기도 하고 다른 견해가 묻기 마련입니다. 최초 법문을 설한 이의 논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한순간이라 생각합니다. 법을 말하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일, 조심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유명하다고 대단하다고 사유의 과정없이 믿어버리고 주장한다 생각들 때, 저는 앞서 제가 들었던 말, '너의 말을 하라'는 그 말이 하고 싶어집니다. 저에게 '너의 말'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주하고 사유하여 자신에게 닿은 이해에서 하는 말입니다. 경전을 베끼든 풀어말하든 그런 말이 참으로 그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부처님의 뜻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이해이며 말입니다. 완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염불을 전하는 어떤 이들의 주장이 저에게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좋다는 말이 곧 다른 것이 나쁘다는 의미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완전하게 다른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이해와 주장은 심대한 오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얼마나 밝게 알까요? 드러난 일부분을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전체를 아는 듯이 말하는 것도 오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알아지는 부분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표현이 어렵네요. 알려주는 것 이상을 확대해석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 비슷합니다). 그러다 보면 더 깊이 알아지기도 하는데 결국은 그런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서로 포용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법은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해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좋으니 저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좋고 저것이 좋다 하며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좋다 합니다. 결국은 가장 좋은 것, 최상의 지점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법이든 저 법이든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집니다.
어떤 의견에 반하는 글처럼 되었는데,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에서 적어봤습니다. 불법은 다 좋은 것이니까요. 필요한 분별이 있지만 불법을 앞에 두고 좋은 것, 나쁜 것, 수승한 것, 하열한 것으로 나누는 것은 필요한 분별은 아니지 싶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법이 있으며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최상의 법입니다. 그런 각자의 최상을 거쳐 부처님이 되는 길에 이른다, 그리 이해되는데 잘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러니 오늘 서있는 각자의 자리를 찬탄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길을 알리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폄훼도 경시도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법화경에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아지니는 것과 많은 부처님의 이름을 받아지니는 공덕이 같다고 합니다. 이것을 관세음보살님이 수승하고 다른 부처님이 수승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면 초점을 잘못 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만큼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받아지니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거지요. 그것을 다른 여러 부처님이 별 것 아닌듯이 말하는 것이 된다면 그 순간 배는 행로를 벗어나 엉뚱한 지점을 향하게 됩니다. 위험해집니다.
부처님에게 수순합시다. 무엇이 부처님의 뜻일까요? 법화경에서 이르길 모든 부처님은 우리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들어가게 하기 위해 출현하신다고 합니다. 그것을 위한 일이라면 한결같이 부처님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부처님들의 가르침은 이 일대사인연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출현하셨으니까요. 아마타부처님도 부처님이시기에 이런 뜻이 있으십니다. 중생이 부처님 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지요. 국토를 장엄한 일도 결국은 이 일을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처가 되는 길로 나아가는 수행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귀히 여기는 것이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 부처님들께 수순하는 일이 됩니다. 이 큰 수순을 가리고 흐린다면 부처님에게 참으로 수순하는 일이 될까요?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부처님의 뜻에 닿는 밝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_()_
좋은글 잘읽었읍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면에서 부처님께 수순하는 복된 날 되었으면 합니다.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편안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