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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김영재의 이력과 활동 3. 맺음말 |
1. 머리말
한국근대치의학은 전통치의학과 관계없이 서구의 근대문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서양의 제도, 사상, 종교, 기술 등 다양한 분야와 함께 들어왔다. 또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하게 되면서 이들을 따라 치과의사 노다 오지(野田應治, 1871-1930) 등이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유입되었다.
한국인으로 최초의 치과의사는 함석태(咸錫泰)로 알려져 왔다. 그는 처음 된 치과의사로서 사회에 책임을 다하는 당당함을 보여주어 치의학에 인식을 제고하려 하였다. 또한 그는 우국지사 강우규의 어린 손녀 강영재를 양녀로 키우며,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는 등 나라와 동포를 사랑한 면도 있었던 치과의사였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근대치의학을 처음 수학한 사람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는 김영재(金英哉)이다. 그는 1906년 봄에 일본 동경에 가서, 1907년 7월 치과전문학교(齒科專門學校)에 입학하고, 졸업하여, 1908년 8월 귀국하였다. 당시의 기록으로 우리나라에 치과(齒科)가 있는 것은 “김영재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최초의 치과의사를 밝히는 일은 한국근대치의학에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김영재의 이력과 활동에서 치과의사로서 책임을 다했는가를 살펴보고 한국근대에서 치의학의 위치와 상태를 파악하려 한다.
2. 김영재의 이력과 활동
1887년 7월 9일 김영재는 신의주(新義州) 진사정(眞砂町) 7-5 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종교는 기독교였다.
1900년 경 5-6년간 의학계(醫學界)에 열심으로 종사(從事)하였다. 1906년 8월 25일 대한자강회 회원이었고, 1906년 8월 24일 태극학회 회원으로 등재되었다.
1906년 봄에 김영재는 도쿄(東京)에 가서 보통학과를 수학하였다.
1906년 8월, 1908년 3월 그는 어려운 가운데에도 태극학회 회원으로 태극학회에서 학식을 개발하기 위하여 매월 발간되는 잡지에 의연금을 내기도 하였다.
1906년 9월 15일 그는 중앙회당(中央會堂) 목사 신학박사 히라이와칸보우(平巖恒保)의 주선으로 치카사키(茅崎) 난코우의원(南湖醫院)에 의술 연구생이 되었다.
1907년 7월 김영재는 치과전문학교(齒科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치과전문학교 재학 중에 열심히 연구하였는데, 중간에 학비의 아주 곤란을 당하여도 용감하고 진취적인 마음으로 임하였다.
1908년 6월 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8년 8월 귀국하였다.
1908년 9월 24일 《태극학보(太極學報)》 편집자는 우리나라에 치과(齒科)가 있는 것이 김영재로부터 시작한다 하였다.
본회(本會) 사무원(事務員) 김영재(金英哉)씨는 소이(素以) 청년가재(靑年佳才)로 본국에 재(在)할 시(時)부터 5-6년간 의학계(醫學界)에 위심(委心) 종사(從事)하더니 왕재(往在) 광무(光武) 10년 춘(春)에 일본 동경에 도래(渡來)하여 보통학과(普通學科)를 수(修)하고 작년(昨年) 7월에 치과전문학교(齒科專門學校)에 입학하여 열심(熱心) 공구(攻究)하는데 중간 학비의 비상곤란(非常困難)을 루조(屢遭)하여도 용진매왕(勇進邁往)하는 심(心)으로 해과(該科)를 졸업하고 객월(客月)에 귀국하였으니 아국(我國)에 치과(齒科)가 유(有)함이 씨(氏)로부터 시(始)하니 의학의 신성(晨星)이라 가위(可謂)할지라. 씨(氏)와 동포(同胞)를 위하여 찬하불기(儧賀不己)하노라.
김영재 이력
신의주(新義州) 진사정(眞砂町) 7-5
1887년 7월 9일생
기독교
1900년 경 5-6년간 의학계(醫學界)에 위심(委心) 종사(從事)
1906년 봄 동경(東京)에서 보통학과를 수학
1906년 8월 25일 대한자강회 회원
1906년 9월 24일 태극학회 회원
190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치과전문학교(齒科專門學校) 입학
1908년 6월 치과전문학교(齒科專門學校) 졸업
“아국(我國)에 치과(齒科)가 유(有)함이 씨(氏)로부터 시(始)하니 의학의 신성(晨星)이라 가위(可謂)할지라.”
1911년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입학
1914년 4월 13일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졸업(京城醫學專門學校 졸업)
1914년 6월 19일 의사면허(19호)
졸업 후 선천 사립병원 근무
1922년 신의주에서 개업
1931-1936 신의주형무소 의무촉탁
1935년 신의주부회 의원
한편 1908년 3월부터 9월 사이에 김영재는 일련의 의학과 과학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다. 1908년 3월 그는 치과전문학교 재학 중에 《태극학보(太極學報)》에 〈천연두(天然痘) 예방법〉이라는 의학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천연두(天然痘) 병독(病毒)은 여러 경로로 쉽게 전염된다 하며 전염(傳染), 발견(發見), 예방(豫防)에 설명하였다.
천연두(天然痘) 병독(病毒)은 피치(皮痴)에 잠복(潛伏)하는 자니 두포(痘泡)의 내용물이 수액으로 혼혼(混溷)되어 비액(鼻液), 각담(咯啖) 중에도 존재하고 우(又)는 건조한 공기 중에도 혼입(混入)되였으며 이상(以上) 제(諸) 물(物)이 용이(容易) 전염(傳染)하는데
그리고 천연두(天然痘)가 신체(身體)에 침입(侵入)하기 전에 예방하는 방법으로는 종두법(種痘法)이 있다고 하였다.
1908년 5월 김영재는 《태극학보(太極學報)》에 과학(科學)에 관하여 올바르게 인식한 〈과학의 급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즉 과학(科學)은 실학(實學)이니 공리, 공론도 아니며 상상도 아니고, 실제(實際)의 학문(學問)이다. 이를 실제상에 응용하면 국가사회의 각종 사업을 발달하게 하고, 동시에 일반국민의 상식을 발달하게 할 기초가 되고, 세계 모든 나라의 여론이 된다. 과학 보급은 저서(著書) 혹은 잡지(雜誌) 강연(講演) 등 여러 방면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오인(吾人)이 지실(知悉)하는 바 과학(科學)은 즉 실학(實學)이니 공리(空理) 공론(空論)도 아니며 상상(想像)도 아니오. 실제(實際)의 학문(學問)이니 차(此)를 실제상(實際上)에 응용(應用)하면 국가사회(國家社會)의 각종(各種) 사업(事業)을 발달(發達)케 하는 동시(同時)에 일반국민(一般國民)의 상식(常識)을 발달(發達)케 할 기초(基礎)가 되나니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인은 철리(哲理)와 정치(政治)에만 열심을 다하고 과학(科學)과 실학(實學)은 가볍게 취급하였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는 법률(法律)과 정치(政治) 등은 얻기에 열중하였고 실업은 고려 없이 실제와 실력을 쌓지 못하고 공리(空理)와 공론(空論)에만 뜬구름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국민 자제(子弟)를 공론가로 만들어 국가(國家)사회(社會)의 공적(公賊)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금일까지 우리 한국인은 철리(哲理)정치(政治)에만 열심을 분치(奔馳)하고 과학(科學) 실학(實學)상에는 경향(輕向)을 망치(妄置)하여 학문이라 말하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만 단사(但思)하여 법률(法律) 정치(政治)등 학문만 수득(修得)하기에 열중하고 실업은 사이부고(捨而不顧)함으로 실제와 실력을 미수(未樹)하고 공리(空理)와 공론(空論)에만 부동(浮動)함에 국민(國民)자제(子弟)가 무비(無非) 공론가(空論家)를 순성(馴性)하여 비참(悲慘)한 현상(現想)을 출연(出演)하였나니 이는 국가를 쇠약(衰弱)케 하고 국력을 퇴수(退守)케 할 뿐 아니라 국가(國家)사회(社會)의 공적(公賊)이 되리니
결론적으로 국민의 상식을 급속히 확대하려면 공리(空理) 공론(空論)을 모두 배척(排斥)하고 실학(實學)을 존중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실학은 즉 과학이므로 과학의 보급이 당시에 긴급한 임무(急務)였다. 근래(近來) 여러 지방에 학교 설립이 많은데 그의 견해로는 급속히 실학(實學)과 과학을 위하여 실업(實業) 학교가 많이 설립(設立)하기를 소원하였다.
1908년 6월 김영재는 《태극학보(太極學報)》에 〈타담(唾痰)의 위생〉라는 의학의 글을 발표하였다. 대체로 보아서 담(痰)은 인후(咽喉)가 불량(不良)할 때나 기관(氣管) 혹은 기관지(氣管支) 또는 폐(肺)에 어떠한 병이 있을 때에 나오는 점액(粘液)인데 담(痰)이 작은 균(菌)을 포함하므로 참으로 위험한 것이라 하였다.
담(痰)은 인후(咽喉)가 불량(不良)할 시(時)나 기관(氣管) 혹은 기관지(氣管支) 우(又)는 폐(肺)에 하허병통(何許病通)이 있을 시(時)에 출(出)하는 점액(粘液) 즉 반유동체물(半流動體物)인데 담(痰)이 미균(黴菌)을 함존(含存)하므로 담(痰)이 불결물(不潔物) 뿐 아니라 실(實)로 위험한 것을 가지(可知)할지라.
전염병(傳染病)은 귀마(鬼魔)의 원인이 아니고 미균(黴菌)이라는 소충(小虫)이 있어 균충(菌忠)이 원인이 되여 병을 일으킨다. 이러한 전염병(傳染病)은 폐병(肺病), 리아(里亞)라 칭(稱)하는 병, 흑사병(黑死病) 등이 있다고 하였다.
1908년 9월 김영재는 《태극학보(太極學報)》에 〈뇌(腦)의 위생법(衛生法)〉이라는 위생문답의 글을 기고하였다.
뇌(腦)는 신체의 수부(首府)로 백반(百般) 명령(命令)하는 곳으로 그 질(質)이 두부양(豆腐樣)과 같이 유연(柔軟)한데 대소(大小) 이종(二種)으로 구별한다. 연수(延髓)부터 하방(下方)은 척수(脊隨)에 직통(直通)하여 수다(數多)의 회전(廻轉)과 움푹하게 파인 곳(구학 溝壑)을 가지고 있다. 움푹하게 파인 곳이 심하면 심할수록 지식이 발달함인데 동물 중에는 인류가 제일이요, 그 다음은 원숭이이다.
뇌(腦)는 사용하는 것이 제일의 위생인데 때때로 적당한 휴식을 하여야 한다. 뇌의 사용과 휴식에는 좋은 규율(規律)이 있어야 한다. 제일은 자기에 맞게 실행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직업(職業)을 선택(選擇)함이 좋다. 뇌(腦)의 위생은 마음의 염려가 큰 아픈 질환이니 희노애락(喜怒哀樂) 사이에 정신을 놓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즉 뇌를 피로하게 할 경우에는 상당한 휴식으로 수면이 좋다. 수면은 안면(安眠)이 필요하다.
건전한 정신은 강장(强壯)한 신체에 있다 함과 같이 강건한 정신과 강고(强固)한 의지는 철석(鐵石)같은 체격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1908년경 “우리나라 사람들의 치아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하는 글이 《태극학보(太極學報)》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평양의 의생(醫生)이었던 김수철(金壽哲)은《태극학보(太極學報)》에 역술한 〈가정교육법(家庭敎育法)〉제3장 위생(衛生)에서 아동의 치아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즉 아동의 치아는 생후(生後) 9개월에 이르면 새로 치아가 나온다. 3세에 이르기까지 딱딱한 음식물을 주지 말아야 한다. 치아(齒牙)가 나오지 못한 유아(幼兒)에게 반립(飯粒)을 주는 악습(惡習)이 있어 이는 아동(兒童)의 신체(身體) 영양, 발육(發育)에 상해(傷害)함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아동(兒童)은 생후(生後) 9 개월(個月)에 지(至)하면 신치(新齒)가 생(生)하느니 차(此) 기(期)에 지(至)하면 고형물(固形物)을 여(與)함을 득(得)하나 오직 소화기(消化機)가 일반(一般) 섬약(纖弱)한 즉 소화(消化)가 용이(容易)하다는 자(者) 외(外)에는 여(與)키 불가(不可)하니 계란(鷄卵)과 여(如)한 자(者)라도 차(此)를 반숙(半熟)하여 가장 소화(消化)키 역(易)한 형(形)에 취(就)해야 여(與)함은 가(可)하나 육류(肉類)와 여(如)한 고형물(固形物)은 3 세(歲)에 달(達)하기까지 불여(不與)함이 가(可)하니라.
아직 치아(齒牙)가 발생(發生)치 못한 유아(幼兒)에게 향(向)하여서도 일찍부터 반립(飯粒)을 여(與)하는 악습(惡習)이 유(有)하나니 차(此)는 아동(兒童)의 신체(身體) 영관(榮關)의 발육(發育) 정도(程度)를 미지(未知)하는 류견중(謬見中)으로 래(來)한 자(者)며 신체각종(身体各種)의 기관(機關)을 상해(傷害)함이 불소(不少)하도다.
치아(齒牙) 위생(衛生)에서 유아(幼兒)의 치아(齒牙)는 상실되기 쉬우므로 음식(飮食)을 저작(咀嚼)하지 아니하고 연하(嚥下)한 결과(結果)로 소화기(消化器)를 해(害)함이 심(甚)하다. 치아(齒牙)를 관리에 게으른 것이 일반적인 관습(慣習)이 되었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또 유치는 탈락(脫落)한 후에 새 치아가 나온다 하여 유치를 중시(重視)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치(幼齒)가 건강(健康)하지 못하면 영구치도 건강(健康)치 못하니 그러므로 유치(乳齒)라도 때때로 세척(洗滌) 하여 그 부식(腐蝕)을 방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구(口)에 재(在)하여는 치아(齒牙) 위생(衛生)에 주의(注意)함이 가장 필요하니 유아(幼兒)의 치아(齒牙)는 결손(缺損)키 이(易)함으로써 음식(飮食)을 저작(咀嚼)치 안코 연하(嚥下)할 것 같으면 기(其) 결과(結果)는 소화기(消化器)를 해(害)함이 심(甚)하나니라. 그러나 금일(今日) 여사(如斯)한 영향(影響)을 불원(不願)하고 치아(齒牙) 양호(養護) 태(怠)하는 자는 일반(一般)의 관습(慣習)이 되었으니 어찌 호탄(浩歎))할 바! 아니리오. 차(此) 유아(幼兒)의 치아(齒牙)는 일단(一旦) 탈락(脫落)한 후에 신치(新齒)가 대생(代生)함을 의빙(依憑)하여 유치(乳齒)를 중시(重視)치 아니하나 연(然)하나 유치(幼齒)가 건강(健康)치 못하면 성치(成齒)도 또한 건강(健康)치 못하나니 고로 유치(乳齒)라도 시시(時時)로 세척(洗滌) 하여 기(其) 부식(腐蝕)을 방(防)치 아니치 못할지니라.
귀국 후 1908년부터 1911년 전반기까지 김영재가 치과 의업에 종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의업에 관심을 가졌던 김영재는 일반 사람들이 관심이 적었던 치과 의업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 후 김영재(金英哉)는 의사가 되었다. 1911년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에 입학하였고, 1914년 4월 13일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醫學講習所) 의과(醫科) 졸업생(卒業生)이 되었다.
1914년 6월 19일 그는 의사면허번호 19호로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 선천읍(宣川邑) 내의 사립병원에서 근무했다.
1922년부터 원적지인 신의주에서 의원(醫院)을 개업하여 1935년에 이른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신의주형무소 의무촉탁이었다.
1935년 신의주부회(新義州府會) 의원(義員)이었다.
3. 맺음말
1908년 5월 과학(科學)은 실학(實學)이니 공리, 공론도 아니며 상상도 아니고, 실제(實際)의 학문(學問)이다. 이를 실제상에 응용하면 국가사회의 각종 사업을 발달하게 한다는 올바른 인식을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김영재(金英哉)였다.
김영재는 국민교육을 강화하고 계몽하려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태극학회(太極學會) 회원이었다.
김영재는 1906년 봄 일본에 가서 어려운 중에 190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치과전문학교(齒科專門學校) 입학하고, 1908년 6월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08년부터 1911년 전반기까지 김영재가 치과 의업에 종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의업에 관심을 가졌던 김영재는 일반 사람들이 관심이 적었던 치과 의업에서 떠나 의사가 되었다. 1914년 4월 13일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醫學講習所) 의과(醫科) 졸업(卒業)하고, 1914년 6월 19일 그는 의사면허번호 19호로 의사가 되었다.
그 후 김영재는 평범한 의사로써의 삶을 살았다. 선천읍(宣川邑) 내의 사립병원에서 근무와 1922년부터 신의주에서 의원(醫院)을 개업하였고, 신의주형무소 의무촉탁, 신의주부회 의원(義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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