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4. 10-한국교회 예배와 음악 다시보기(2)(서울장신대학교 문성모 교수의 글)쪽은 190-191쪽입니다. 글을 읽다보니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미국 신학의 오더상이라는 장로교 신학(총신대학교 나오셨음)자이시고, 선우 혁 목사님처럼 미국에 사시는 김재영 형님(Facebook 친구이신데, 닉네임이 jae young kim입니다.)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평신도라서 신학은 잘 모르지만, 제 생각에도 신학과 예전은 한민족의 얼과 전통에 맞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난번 글에서 민중예배와 엘리트예배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나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하여 민중예배의 정신은 다른 것으로 인정하는 반면, 엘리트 예배의 시각은 틀린 것으로 정죄한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로마제국 각 지방에 산재하여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고 발전하던 예배와 음악을 다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린 것으로 간주하여 로마식으로 통일시켜버린 그레고리우스의 정책은 엘리트예배의 전형적인 역사가 재현된 모습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시작된 중세 가톨릭교회는 예배와 음악에 있어서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라틴말로 진행되는 예배만을 허락하였으며, 라틴말 성가인 그레고리우스 성가만을 연주하는 오만함으로 일관하다가 종교개혁을 맞았다. 당시 민중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예배언어와 음악을 강요받으면서 장장 천 년동안 엘리트 예배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라틴말을 쓰지 않는 다른 여러 나라들의 민족에게 그레고리우스 예배와 음악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민중을 향해서는 전혀 죄의식이 없었던 자세는 엘리트예배를 강요하는 중세교회가 보여준 교만의 극치였다.
우리는 민중예배의 정신으로 하나의 복음에 대한 다야한 형태의 예배와 음악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예배와 음악에 대한 정책을 비판해야 하며, 이를 묵인하고 수용했던 지금까지의 수입이론에 기초한 예배학과 음악에 대한 견해를 재평가해야 한다.
예배와 음악을 논할 때 어떤 하나의 답을 가지고, 그와 같지 않은 다른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나 음악이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여, 남이 드리는 예배를 예배라 하지 않고 집회라고 부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한다. 이 얼마나 엘리트의식에 젖은 교만이요, 바리새적이요, 그레고리우스적이요, 중세교회적인 발상인가? 예배의식에 무슨 정답이 있단 말인가? 예배는 하나의 복음에 대한 다양한 응답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각 민족과 문화와 세대에 따라 당연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며, 이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미국교회의 예배와 한국교회의 예배는 달라야 하며, 미국교회의 노래와 한국교회의 찬송이 달라야 마땅ㅎ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아직도 미국교회의 판박이처럼 예배와 음악이 같은 이유는 이 땅의 교회 엘리트들이 민중예배의 시각을 갖지 못했기에 이에 대한 비판이나 죄책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운동의 두 가지 방향.
우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반성하면서 4세기부터 시작된 예전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가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 4세기초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공인되었다. 이때부터 카타콤속에 숨어있던 기독교의 예배와 음악은 수면위에 올라오게 되었고, 서로 비교가 가능해졌다.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는 수백개의 각각 다른 예배형태가 존재하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열거해보면 동방교회의 이집트 예전, 시리아 예전, 예루살렘 예전, 비잔틴예전 등이 있고, 서방교회의 로마예전, 갈리아 예전, 캘트예전, 밀라노 예전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각 지역의 예배와 음악은 천차만별이었고, 이들 모두는 각각의 지역적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여갔다.
첫댓글 바우로님 감사합니다. 9월에 올려주신 글이네요. 토착화의 뿌리를 성육신에서 찾는다면 성탄 절기야말로 예배의 토착화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 윗글을 읽은 소감: 좋은 글이고, 기본 논지는 동의하지만,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보이고,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너무 단순 비교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북미(주로 미국과 캐나다) 교회들이 점점 다문화 교회로 변하고 있고, 예배의 토착화를 정의와 연결해서 다루고 있는 교회/교단들이 있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나 시점을 정확히 하지 않으면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글을 읽는 순간 잠~깐 들었습니다. 북미 쪽도 변화속도가 빨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