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지역이나 어촌에서는 촌이라는 지명이 흔하지만 명색이 서울인데 신촌도 아니고 이름조차 해방촌이라니 ...
해방이란 뜻이 금기시 되었던 군사정권시절엔 더욱 그러했습니다.
38선이 그어지고 북쪽에서 지주계급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산비탈에 판잣집 짓고 살던 동네라 이름이 해방촌 입니다.
얼마전 TV에 요즘 핫한 코스로 망리단 경리단 에 이어 신흥시장 나오는것 보며 그 흙바닥에 쥐와 개도 돌아 다니던 그 시장이 ?
해방촌의 정확한 지명은 용산동 2가 입니다. 택시 탈때 해방촌이라 말하기 싫어서 저기 이태원 위의 용산동 2가 라고 말하곤 했는데 오히려 요즘은 그 촌스러운 이름이 유명세를 더해 주었나 봅니다.
해방촌은 남산 아래 있다보니 비탈길에 대부분의 집이 있습니다. 판잣집을 허물고 재개발을 하였지만 집들의 위치는 그대로 해야 하니 골목길이 여전이 많습니다. 몇년전 해방촌에 사는 고향 친구네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한 친구가 골목길에 차를 몰고 들어 오다 식겁했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계단이 나타나서 하마터면 차와 함께 고꾸라 질뻔 했답니다.
지금도 막다른 골목길이 많고 경사가 웬만한 산의 등산 코스인 길이 대부분이고 갑자기 계단도 나타납니다. 단연코 운전연습 코스 난이도 최상입니다. 하지만 그 골목길들은 그 옛날 우리들에게 숨바꼭질 하기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족히 200미터도 넘는 해방촌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큰 길은 눈이 오면 썰매장으로 변했구요. 그때는 큰 길이라 부르고 넓어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겨우 차두대 지나가는 길이었네요.
그 비탈길 아래 쓰레기 수거 차가 종을 치면 골목마다 큰 고무다라이에 연탄재 및 배추쓰레기를 한가득 머리에 이고 나옵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배추와 연탄 가득 실은 트럭이 언덕길 오르느라 부릉부릉 거리는 소리가 온동네 요란하게 들렸던 동네
그 해방촌에 이제는 다국적 사람들이 삽니다. 이방인이라곤 미군부대가 근처에 있어 미국군인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십년전부터는 너무나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삽니다.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존 도시도 아니였던 해방촌의 과거엔 다른 동네와 다른이야기 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이북에서 빈털터리로 내려왔기에 불안정한 삶으로 인해 무당집도 많았고 교회도 많았고 고아원도 있고 미국의 구호물자로 유지되던 탁아소 모자원도 있었습니다.
해방촌에서 태어나 이십년을 산 내게 그 곳은 친척하나 없지만 고향 입니다. 몇몇 친구들은 결혼해 그곳에 여전이 살고 있고 눈을 감고도 예전 그 동네 약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집이 새로 지어지고 길이 넓어 지기도 하는 것은 바람직 하나 그 곳을 찾을때 마다 마치 해외여행을 하는듯 마주치는 외국인들과 다양한 이국 음식점 그리고 이름조차 생뚱맞은 퓨전 카페들
신흥시장 방송보고 고향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해방촌은 역사적으로 크게는 아니더라도 그 나름 격동의 한 축을 겪은 동네 인데 이리 변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글쎄요. 피난민들이 살던 동네에 미군들이 들어 왔었고 이젠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이 것도 역사의 어쩔 수 없는 흐름 이겠죠.
덧붙임 :언제 일지 모르지만 글을 쓰는 날이 온다면 해방촌 이야기를 제대로 쓰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렸을적부터 사진을 찍어 준 까닭에 옛날 해방촌사진도 있고 친구들에게 예전 사진 부탁도 하고 요즘 모습도 다시 찍어서 한번쯤은 적어보고 싶은게 제 작은 버킷 리스트에 들어 있습니다. 이글은 어쩌면 연습작이지만 그 출발점이기도 하겠네요. 언제 쓸지는 모르지만요ㅎㅎㅎ 일단 글쓰는 법부터 배우고 써야겠죠.
군인이던 남편을 잃은 엄마와 아이들이 살던 모자원 담위엔 아카시아 냄새가 진하게 풍겼었고 미국 구호물자로 유지되던 탁아소 장난감들은 평소엔 유리진열장안에 갖혀있다가 미국 선교회분들 오는날에만 갖고 놀 수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정신 이상한 분들도 많고 무당집에선 늘 징소리가 울렸으며 닭을 키우던 집 마당에 저녁밥상이 내동댕이쳐지면 닭들은 날뛰고 아이들은 저녁이면 좁은 판자집을 나와 비탈진 큰 길에서 넘어 지지 않고 고무줄도 하고 다방구도 했습니다.
21살에 이사했습니다. 이사 올때 아빠는 집안 여기저기를 사진 찍었죠 생각해보니 빈손으로 내려와서 흙벽돌 집을 손수 짓고 시멘트 불럭 담으로 바뀔때 까지 아빠의 힘겨운 삶이 녹아있던 집이었네요 그 곳을 떠난 십년후에 재개발 된다 해서 번듯한 아파트는 아니어도 빌라라도 들어설 줄 알았으나 그렇지 못하고 그냥 작은 다가구집으로 바뀌었죠 윗집과 옆집과 같이 지어야 했기에 우리집 들어가던 골목은 사라졌더군요. 그 집이 부모님에게 어떤 의미였고 그 시절 삶의 힘들었음을 나이들며 알아갑니다. 이사 나울때 동네분들이 손에 대야 화분등 이삿짐 하나라도 옮겨주고 할머니는 눈물로 작별하며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초우가끔은 경치도 교통도 좋은 해방촌이 기와집으로 개발되어 유지 되었다면 북촌이나 인사동 보다 멋질텐데 라는 생각도 합니다. 집 한채가 유일한 재산이었던 그당시엔 꿈도 못꿀 사치였겠죠 전세 월세는 가계수입의 중요 공급처였으니까요. 그래도 참 아쉬워요. 글 써본김에 조만간 사진기 들고 해방촌 가야겠어요. 이사 온후에도 결혼때까지는 거기 교회다녔고 친구들도 살고 있어 가끔 가곤 했어요. 부모님은 여전이 해방촌교회 다니구요.
첫댓글 초우님의 어린시절 추억은 해방촌이군요.
남산도 가깝고, 언덕이라서 조망도 좋고.
해방촌은 주거지로 참 좋은 위치예요.
사진 찍어주던 아버지.
멋져요.ㅎ
21살에 이사했습니다.
이사 올때 아빠는 집안 여기저기를 사진 찍었죠
생각해보니 빈손으로 내려와서 흙벽돌 집을 손수 짓고 시멘트 불럭 담으로 바뀔때 까지 아빠의 힘겨운 삶이 녹아있던 집이었네요
그 곳을 떠난 십년후에 재개발 된다 해서 번듯한 아파트는 아니어도 빌라라도 들어설 줄 알았으나 그렇지 못하고 그냥 작은 다가구집으로 바뀌었죠
윗집과 옆집과 같이 지어야 했기에 우리집 들어가던 골목은 사라졌더군요.
그 집이 부모님에게 어떤 의미였고 그 시절 삶의 힘들었음을 나이들며 알아갑니다.
이사 나울때 동네분들이 손에 대야 화분등 이삿짐 하나라도 옮겨주고 할머니는 눈물로 작별하며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초우 가끔은 경치도 교통도 좋은 해방촌이 기와집으로 개발되어 유지 되었다면 북촌이나 인사동 보다 멋질텐데 라는 생각도 합니다.
집 한채가 유일한 재산이었던 그당시엔 꿈도 못꿀 사치였겠죠
전세 월세는 가계수입의 중요 공급처였으니까요.
그래도 참 아쉬워요.
글 써본김에 조만간 사진기 들고 해방촌 가야겠어요.
이사 온후에도 결혼때까지는 거기 교회다녔고 친구들도 살고 있어 가끔 가곤 했어요.
부모님은 여전이 해방촌교회 다니구요.
@초우 해방촌 나들이에 동참해서 야그듣고 싶네요~^^
맛난 추억이 정겹습니다.
시골에선 하루 한두번 지나는 버스 꽁무니에선 흙먼지가 날리고 배웅하시는 부모님들은 손사래치며 안녕을 기원하시던 가물가울한 기억.....
이 아침 초우언니가 기억소환했습니다.
즐감했어요.
초우님의 해방촌이야기 기대합니다.
kbs 프로그램에서 얼마전 해방촌 보았어요..시계 엄청 많이 갖고 계신 분 기억나죠....전망좋은 동네,,,,,,,가보고 싶죠..아직 제대로 못 본 곳이네요....서울 망우리공원 아차산 등 못 간 곳도 아주 많죠..ㅎㅎ
정감있는 이야기에 한참 머물다 갑니다 버킷리스트가 실현되길 기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