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裸木, 그 이후…
옛 마을 치고 이야기 한 개쯤 전해 내려오는 곳이 없는 게 있을까. 이야기는 시간의 강을 건너고, 공간이라는 벽을 넘어 전해온다. 한가로운 전원 경치며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자그마한 산마을 풍경에는 도시와 다른 원시적인 스산함이 무수히 감추어져 있다. 난데로 떠돌다 멈칫멈칫 고향으로 돌아가는 탕아의 발걸음을 닮은 후미진 에움길은 인간에게 허락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이산 저산 빨랫줄 걸쳐놓은 듯 오지의 산골마을, 먼발치에 버선코를 닮은 지붕이 솟으면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려 걷기를 즐긴다. 길에서 만난 근원을 알 길 없는 고목의 용트림에 짧은 인생의 덧없고, 시간조차 그 의미를 잃어갔다. 숲은 햇살에 짙푸르고, 공기는 더 달게 느껴졌다. 등굽잇길을 에두르자 세상구경에 들뜬 마음으로 제 어미를 불안케 하는 연생이 고라니가 폴짝폴짝 엉덩이의 잔상만을 남긴 채 숲으로 사라진다. 자연이 살아가는 세상에 살짝 발을 담그는 순간 환영 인사 치고 제법이다.
“지난 태풍에 나무가 뽑혀 넘어졌는데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다.”
자연에 반쯤 몸을 숨긴 처가에 도착하자 장모의 압력이 인사를 대신했다. 땔감으로 잘라오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의 메밀눈이 결정적이었다. 전동 체인톱과 손바닥에 손잡이가 꼭 맞는 톱까지 챙겨 잡목 우거진 자드락길을 올랐다. 생각보다 굵은 은사시나무였다. 한 아름으로도 한참 부족한 굵기의 은사시를 넘어뜨릴 바람이라니? 새삼 자연의 힘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운이 없게도 둔덕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드러난 뿌리로 부실하게 지탱했던 탓일 게다. 문득 은사시 나이테의 순 자연산 다탁茶卓을 떠올렸다.
풋내기 나무꾼의 터수없는 솜씨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찻상에 어울리게 굵은 밑둥치를 대각선으로 공략했다. ‘빠바바방!’ 전동 체인톱날이 돌아가며 내는 소리가 계곡에 울리고 산허리에 퍼졌다. 손목이 덜덜 떨리는 것도 삼분의 이까지였다. 가슴을 파고드는 외마디 비명, 은사시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마지막 외침이었다. 태풍에 뿌리가 뽑히던 날에 이어 태어나서 두 번째일 것이다. 비틀려 쓰러지며 전동 톱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최후의 반항, 감히 너 같이 인생을 무턱대고 살아가는 유의 인간에게 쉬이 당할 내가 아니란 듯 감사납다.
반대쪽으로 넘어서 상황을 살펴야 했다. 다리 한쪽을 올려 나무에 걸친 후 등걸에 올라탔다. 가랑이로 몸을 지탱하면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안쪽 발목을 할퀴는 통증이 전해졌다. 공룡발톱에 긁힌 듯 붉은 사선 셋, 거칠게 난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몹시 아렸다. 둥치의 부러진 삭정이 공격에 무방비로 당했다. 욱신거리는 상처에도 힘겹게 반대편으로 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별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참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란 느낌이 들어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도 그럴 수 없었다. 언제 따라 나온 아들아이의 시선이 짓눌렀다.
이젠 애면글면 달래야 했다. 비탈로 내려가 쓰러진 나무를 살폈다. 두 뼘으로도 부족할 굵은 곁가지가 땅에 박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계산속머리는 회전이 빨랐다. 잔가지 몇몇을 수동 톱으로 솎아냈다. 그런 후에 곁가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지구 중력에 의해 밑둥치 틈이 벌어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톱밥이 흩어졌다. 이마에 비지땀이 흐르고, 숨이 턱밑에 차올랐다. 잠시 쉬기 위해 손목에 힘을 푸는 순간 가지는 톱을 문 채 입을 다물었다. 얕봤던 가지에 수동 톱마저 당했다. 감시 차 올라온 볼만장만 아내의 시선을 느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표정만을 남기고 내려갔다. 이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원병을 기다려야 했다.
몇 마장 떨어진 마을에 내려가 전동 톱을 빌린 장인이 비장한 얼굴로 올라왔다. 멀뚱하게 서 있는 무기력한 사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전동 톱 시동을 걸어 굉음으로 나를 나무라는 듯했다. 삶에는 켜켜이 두른 나이테만큼 경험이 중요했다. ‘V’자로 홈을 만들어 자르기 시작했다. 죄인이 된 듯 옆에서 물고 늘어진 톱날을 잡았다. 기름이 타면서 내는 연기와 냄새, 얼굴로 향하는 톱밥의 파편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어차피 세상은 견디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은사시의 마지막 반항 역시 기계와 경험에 제압당했다.
다른 나무들은 온전하게 뿌리를 내렸건만, 너는 어이하여 자연의 기반을 잃어버린 채 나이테를 드러내는 치욕을 당하는지, 사회에서 기반을 잃고 짜인 틀에서 튕겨 나온 뒤 야만의 상태로 퇴보를 거듭하는 나를 닮았다. 작은 바람에도 이파리 앞뒤를 흔들어 하늘에 인사하며 그렇게 세상에 존재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잘려나간 은사시를 향한 측은지심은 사치였다. 한 줄 나이테를 위해 물을 준 일도, 비료 한줌도 건넨 적도 없었다. 온전했던 시절에 찾아와 귀를 기울이기커녕 말을 걸어본 일도 없었다. 예를 갖춰 양지바른 담장에 보기 좋게 줄지어 세워놓았다. 네댓 뼘 길이의 늘어선 나무토막이 하나의 띠를 이루고 온전했던 삶은 그렇게 전설로 남는 듯했다.
벌거숭이 나무들이 북풍을 견디자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지난 일은 까마득한 세월에 유린되어 잊혔다. 처가에 들렸을 때 깜짝 놀랐다. 메마른 고목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있었다. 위아래 잘린 채로 은사시의 영혼이 깃든 고목은 자연의 비장함을 노래하고, 생명의 신비로움을 찬양했다. 자연의 회생본능을 얕보지 말라고 강건했다. 삶은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다며 얼핏 설핏 살아온 그간의 과정을 질타하고 있었다.
꿈속, 어머니의 시선을 닮았다. 마냥 포기하고 싶은, 무리한 행복추구, 난폭한 쾌락을 앞둔 날에 하늘에서 보낸 응원의 메모였다.
첫댓글 강력한 힘을가진 엔진톱 다루기도 연륜이 주는 기술이 있습디다.
울집양반 . 고기 좀 눌러라 톱낀다.
내가 하는것은 아니여도 이제사 나도 쬐끔은 알수 있습니다.
어느쪽에 톱을 데야 하는지를 . . .
선비에게 노가다 시키는 마나님의 답다비 마음 느낌옵니다.
오랫만에 초시님글 반갑습니다.
다치신데는 눈치껏 퍼뜩 나으실깁니다.
초시님글 너무 반갑습니다~^^
초시님 오랫만이네요. 이렇게 소식을 들으니 반갑고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