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깍으며 - 이해인
오랜만에
연필을 깎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깎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망
너무 억지로 깎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채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깎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웬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에서
카페 게시글
수녀님 시 & 글
연필을 깎으며
숲속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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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7
24.04.16 21:41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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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쓸쓸해도 즐거운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할까요...
수도자의 즐거움이 녹아 있어요 ^^
수도자의 즐거움이
녹.아.있.다.
음,,,
@솔방울 수녀님의 시로 제 정신병을 케어합니다 ㅎ
30년 전에 수녀님께
몽땅연필을 모아서
선물해드린 적이 있어요
그 편지를 찾아서 숲속강가님께 보내고 싶네요.
정말 감사해요
일반사람이 생각할 수없는 기발한 아이디어.. 솔방울님은 예술가적인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 ㅋ
몽당연필 같은 값진 삶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