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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아르벤
Chapter.11
[모든 것의 끝에]
산맥이 가깝자 제느는 긴장이 되는 모양인지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 오면서부터 느꼈던 그 불길한 기운이 뻗을 대로 뻗어서 넘실대고 있었다. 비행선 창문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산맥은 여전히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올라 있었는데 위에서 보니 산맥을 따라 행성 반대편이 짙은 구름에 빈틈 없이 갇혀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당신한테 정신 팔려서 다짜고짜 들어왔긴 한데, 여기 이미 틀렸어. 저 아래는 완전한 악마의 영역이야.'
'그런 것 치고 저기엔 악마 흔적도 못 찼겠던데.'
'이 우주를 침공하려는 이유가 뭐겠어? 계약한 인간을 빌렸다지만 사랑의 여신님이 있는 곳에도 당당히 나타난 녀석들이 내 분신까지 잡아먹고 뭘 원하겠냐고?'
'갑자기 까칠해진다? 당연히 그 바알인가 뭔가하는 작자를 살려내라고 하는 짓 아냐?'
'그것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내가 무슨 소원 이뤄주고 뿅 사라지는 부적도 아니고 계속 붙잡아두려 할거야. 이런 저런 다른 것도 시키려 들겠지.'
이를 갈은 제느는 창턱을 잡고 있는 내 손에 손가락을 걸었다. 악마에게 신이 붙잡히면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쉬운건 자기네들인데 이런 식으로 원한을 쌓아야 하나? 이게 악마들의 방식인가?
"10km 전방이군요. 적당한 착륙지에 내려가겠습니다."
관성이 느껴지며 비행선은 산맥을 피해 선회한 다음 밑으로 펼쳐진 푸른 초원에 강하했다. 발 밑으로 다가오는 초원은 산맥과 느낌이 전혀 틀려서 어디에나 있는 흔한 벌판처럼 느껴졌다. 바로 지척에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리는데 여기는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가 없다.
'무서워.'
손등을 덮은 손가락들에 힘이 들어가며 등 뒤에 다가온 몸이 바짝 밀착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흔들림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사실은 이렇게 두려운 마음을 나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뭐가 무서워. 내가 있는데.'
'어디서 근거도 없는 자신감은 있어 가지고.'
'근거 없어도 이번엔 내가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비행선이 땅에 착륙하며 가볍게 흔들렸다. 창문에서 몸을 일으키자 제느가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려 징징거렸다.
'나 정말 무서워. 제 발로 지옥문으로 기어 들어가다니, 말도 안 돼.'
'그럼 어떻게 할거야. 카킬레스 오브의 힘을 뚫어보던가.'
'히잉.'
캣시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돌아보았다. 오두막에 남겨둔 아이들을 제외하고 연합회의의 인물들이 비행선을 타고 왔는데 그 중에서도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제외해서 쉬텐르겐과 마들리아나, 베탈단 주교와 아르파만이 남았다. 사실 이들을 데려온 캣시틸도 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렇게 부리는 기계가 많으면 무인기만 모아도 반대쪽을 다 뒤덮을 것 같은데?
"산맥 건너편은 통상 관측 수단이 도달하지 않는 완전한 미지의 공간입니다. 저 안에 들어가는 일은 매우 큰 위험을 동반하니 준비상태에 차질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질문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얼굴들이 다들 비장했다. 숫제 죽으러 들어가는 분위기다. 제 발로 걸어 온 양반들이 그러니 어쩐지 되게 찜찜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존망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죽으러 온 건 아니다.
"뭐 쓸만한 거 있어?"
일부러 큰 소리를 내서 분위기를 환기하자 죽을상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캣시틸도 마침 그걸 반긴 모양인지 조종석 옆에 있던 서랍을 하나 열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효력이 있을 법한 것을 가져왔습니다.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총이었다. 멋없게 생긴 직사각형 상자 밑에 손잡이 하나가 달린 단순한 모양이었다. 캣시틸의 배나 비행선들도 다 단순한 모양이던데 효율성만 강조한 모양새다. 제느는 목에 매달리던 팔을 풀더니 캣시틸에게 총총 걸어가서 총을 받아들던 쉬텐르겐에게서 당당히 빼앗았다.
"엇!"
캣시틸의 시선이 나를 한번 스쳐 지나가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른 것을 꺼내서 나눠주었다. 제느는 제느대로 아랑곳하지 않고 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만졌다.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 양상을 고려하여 선택했습니다. 사용법은 손잡이를 쥐면 알테니 추가로 주는 갑옷과 함께 장비하고 강습정 밖으로 나옵니다. 더 필요하면 다른 서랍에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시죠."
캣시틸은 다시 제느를 흘긋 보고 팔짱을 끼더니 비행선 뒤편으로 걸어갔다. 정말 아무리 내 여자라지만 저렇게 행동하는 건 못 봐주겠다. 아주 민폐네. 민폐야.
비행선 뒤편 해치가 낮은 구동음을 내며 열리자 무언가 비릿한 냄새가 섞인 바람이 실내를 휘저었다. 밖으로 보이는 푸른 들판은 창문 사이로 본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악마의 영역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뭐해?"
등뒤에서 툭 건드는 손길이 있어 돌아보니 제느가 왼손에 쥐고 있는 총을 내밀고 있었다. 투박하게 생긴 녀석을 받아드니 조금 묵직했다. 군대도 아직 가지 않은 나이에 벌써 총을 들고 싸워야 하다니, 나도 참 기구하지.
"저기 바람 부는데 너 치마 날릴까봐."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무릎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데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벌써부터 펄럭펄럭 날렸다. 제느는 멀뚱히 내려다보다가 문득 놀란 것처럼 너스레를 떨며 치맛자락을 잡았다.
"어머. 어떡해. 자기가 가려줘."
속으로는 무서워 죽겠다고 징징 울면서 겉으론 이렇게 여유만만하게 구는 모습을 보이니 그 성격 하난 칭찬 받을 만 했다. 어쩌면 내가 없었던 제느의 모습은 좀 더 날이 서서 빈틈을 전혀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조금 무뎌져가고 있는 것 같지만 앞날에 혹시라도 다시 헤어지게 된다면 어디까지 다시 벼려질지 가늠할 도리가 없었다.
"화창한 봄날에 소풍간다고 차려 입고 나온 것도 아니고 복장은 좀 정숙하게 갖추지? 저거 입는 게 어때?"
쉬텐르겐이 걸치고 있는 국방색 갑옷을 가리키자 제느는 입술을 삐죽이며 노려보았다. 노리고 한 말이니 당연하다. 방금 전에야 의외의 이미지 체인지에 놀라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부터 싸우러 가는 여자애가 노닥거리는 폼새여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쳇. 그 머리 속에 기름은 죄다 말라서 뻑뻑해졌나봐?"
"너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 이번엔 제발 좀 혼자 막 앞서가지 말고 같이 좀 가자."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목덜미를 매만졌다. 조금 뜨듯하고 말랑한 살결이 촉촉했다. 목과 머리가 분리된 꼴을 봤을 때는 정말 나도 목과 머리가 분리되는 줄 알았다. 그런 꼴을 또 한번 봤다간 정신이 온전히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진짜 너랑 다니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봤네. 내 신경이 굵은 건지, 아니면 정신 줄이 쇠사슬인지 모르겠다. 참."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학교 다니며 성적에 쪼들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이렇게 불길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곳에서 멸망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건 영화 속 주인공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제느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왜 멍하니 있어?"
입술을 앙다물고 사람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제느의 눈동자가 왠지 뒤를 켕기게 했다. 설마 하지만 방금 조금 깐 것 갖고 그렇게 화가 났을 일은 없을 테고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뼈빠지게 중노동을 해준 참이다. 아니, 혹시나 옛날에 뭔가 잘못했는데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사건이 하나쯤 생각났을지도 모르겠다.
"흥."
눈을 흘기며 코웃음을 친 제느가 휙 몸을 돌려 출입구 아래로 내려갔다. 쟤가 아무래도 보통 여자들을 닮아 가는 모양이다. 사람 쫄리게 말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뭔가 화가 나다 만 사람처럼 터벅터벅 걸어가니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뒤가 켕긴다. 방금 그 한마디에 짜증이라도 난 건 아닐까? 차라리 그냥 예쁘다고 해줄걸, 조금 우쭐해서 타박했더니 괜히 등골이 서늘했다.
먼저 아래로 내려간 캣시틸은 비행선이 착륙한 곳에서 조금 벗어나서 링과 통신하고 있었다. 여전히 바깥에서 전투는 벌어지고 있었지만 안쪽은 지나치게 평화로워서 꽃이 가득한 들판에 한가로운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가까이 와서 본 산맥은 직접 올라가 보았을 때보다 더 음산한 위압감을 뿜고 있었다.
"분신은 얼마나 남았어?"
"변화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재빨리 진입하도록 하죠. 통신이나 관측은 불가능해도 일단 물리적인 접근은 가능하니 함대가 구름 위에서 대기하며 지원할 겁니다. 저런 불확실한 곳으로 함부로 전력을 집중시켰다 잃어버리는 꼴은 겪고 싶지 않으니 양해바랍니다."
"그래. 뭐. 빨리 해결 봐야겠지."
멀리 지평선 저쪽에 캣시틸의 전함 한대가 떠 있었다. 거리가 굉장히 멀어서 구름에 가리고 실루엣이 울렁거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다. 저번에 싸웠던 전함들보다 훨씬 크다. 아니, 큰 것만으로 모자라서 엄청나게 거대했다. 저런 것을 준비해 놓고 동원할 수 있으니 조금은 안심해야 할까?
제느는 비행선에서 조금 벗어난 풀밭에 서서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마와 머리카락이 바람에 정처 없이 휘날리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저 산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아니 가만히 둘 수가 없다.
"괜히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이건 미친 짓이야."
뒤에서 끌어안았지만 제느는 한번 어깨를 떨치고 돌아보았다.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입술을 꾹 다문 얼굴은 매섭게 굳어져 있었다. 이렇게 정색하고 나오는 태도는 또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너 스스로도 여기서 막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거라는 걸 알지 않아? 너 똑똑하잖아. 아니, 적어도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그만큼 현명해야지."
제느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에서 나오는 눈빛에 애처로움이 담겨 있어서 마냥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아무렇게나 받아 넘겨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쯤 속 편히 할 수 있겠지. 자기는 아직 어리니까. 나만 믿으라고?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이 어떻게 되었더라?"
"내가…."
"희생이란거, 빛 좋은 개살구야. 난 그런 식으로 살았어.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까 여태까지 온 거야. 끝장나면 아무것도 소용없어. 그리고 우리는 약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약해. 자기가 지금 나를 데리고 저 안으로 간다한들 뭔가 할 수 있어?"
"그렇지 않아! 할 수 있어. 분명히."
분명히 산맥을 직접 보고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제느를 품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등허리를 팔로 감았다. 키에 걸맞지 않게 작고 왜소한 몸은 강철같은 의지로 그 세월을 견뎌왔을 텐데 왜 이제 와서 약해지는 걸까?
"무서워. 나. 설사 모든 것에 행운이 겹쳐서 다 잘되더라도 그 뒤엔 어떻게 할 건데? 그냥 해피엔딩이 아니잖아."
"그래도 의미가 있어. 어차피 죽는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손을 놓지는 않잖아. 난 네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그 운을 쓴 만큼 어떤 댓가라도 달게 받을 거야. 한심해 보이겠지? 그런데 남자가 여자한테 어깨라도 으쓱대야지 덜덜 떠는 꼴을 보여줘야겠어?"
제느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마지막 내 말이 혹시 너무 멋있어서 감동 받아 심장이라도 멈춘 줄 알았지만 저편으로 묵묵하게 뛰고 있는 박동이 느껴진다. 그다지 감정적으로 격해진 것도 모르겠다.
"그 대가로 나는 혼자가 됐어."
몸을 떼고 제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전혀 울거나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붙잡은 제느가 뺨을 어루만졌다.
"나한테 자기는 골칫거리야. 이렇게 말 안 듣고 뻗대고 아무 보장도 없이 불 속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누가 걱정을 안 해? 그렇게 자신만만한 만큼 어디 실력이라도 제대로 있어? 난 자기 인생 최고의 행운이 아냐. 그런 행운이 있으면 이런 때에 써."
"허세는 좀 봐주지 그래? 그래 나, 네 말마따나 쥐뿔도 없어. 그래도 지금 이게 우리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는 거야. 그냥 믿어 줘."
한순간 욱하고 뭔가 올라왔지만 더 이상 싸우기는 싫어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자기는 함부로 부르는 것도 하지 말라고 타박하면서 나보고는 골칫덩이라고 하니 솔직히 실망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억울한 얼굴이네?"
"야."
"야라고 하지마. 제느라고 불러. 내 이름 당당하게 있어."
얼굴을 놓고 다시 돌아선 제느가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 들었다.
"내가 꼭 곧이곧대로 말해줘야 이해가 가지? 여자가 말하면 억울해할게 아니라 좀 머리를 굴려봐. 골칫덩이라고 한다고 무슨 버려야할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그렇진 않지만."
"그렇지 않지만 뭐? 애초에 소중하지 않으면 골칫덩이일 것도 없잖아. 이 바보야."
다시 보니 제느는 전혀 화가 난 표정도 아니었고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목소리가 조금 먹먹한 감이 있었지만 지옥문을 앞에 두고 긴장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한순간에 눈치 없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같이 지낸 것이 얼마인데 아직도 말 사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도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럼 내 기분은? 나도 눈치 못 채는 자기 볼 때마다 답답해서 죽겠거든? 물론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답답한 마음까지 그냥 넘어가는 건 아니잖아. 난 모든 걸 다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냐. 우리, 같이 사랑하는 거잖아."
제느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이상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난 정말로 무서워. 저 안에 뛰어드는 것보다, 자기를 또 다시 잃고 아니면 내가 헤어나올 수 없게 돼서 우리 예나도 못 보게 되면 이젠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 이렇게 내 남자의 온기가 가까이 있는데 그걸 다시 잃어버리는 건 정말, 싫어.'
울먹거리려 하는 눈빛에 무어라 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어 그대로 무작정 제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깊게 얼굴을 묻는 제느의 숨결을 느끼며 아득하게 하늘로 뻗은 산맥을 올려다보았다.
제느가 날 찾아왔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렇게 될 결말도 언제가 됐든 예정이 되어있지 않았나 싶다. 바알이 누구며 그 실체가 어떤지 조차 모르겠지만 분명히 저 밖에는 악마들이 진을 치고 있고 눈앞의 산맥은 지금 당장이라도 덮쳐올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어쩌면 내가 했던 말들이 너무 뻔했지 않았을까? 스스로도 허세라는 것을 아는데 눈치가 구백단은 되는 여자가 그걸 모를리가 없다.
"내가 너무 안이하다 생각해?"
"혼자서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는 얼굴로 뛰어다니던 때보단 훨씬 좋아."
"나 참. 너도 좀 칭찬은 직설적으로 하지?"
"이만큼 친절하게 알려주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제느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손으로 몸을 밀어냈다. 눈치를 보니 다른 사람들이 온 모양이었다.
"회포는 끝나고 나서 풀었으면 좋겠군요. 우리가 넘어가면 미네루스가 상공에서 지원을 맡을 겁니다. 흐트러짐 없이 집중해 주세요."
캣시틸은 몸에 쫙 달라붙는 전신타이즈를 입고 한 손에 길다란 장총을 들고 있었다. 요소요소가 장식이나 장비들로 가려져 있었지만 몸매가 아예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디자인된 물건이라 무슨 게임에 나오는 섹시한 여전사쯤으로 보였다. 반면에 다른 일행들의 국방색 갑옷은 워낙 커서 다들 머리 하나는 더 커져 있었다. 거기다 우락부락한 모습은 그냥 군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오해하지는 마라. 눈이 간다고 다 보는 거 아니거든?'
'어련하시겠어.'
손가락이 옆구리를 살짝 훑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경직돼서 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제느는 입가를 올리며 피식 웃더니 그대로 팔을 허리에 둘렀다. 이건 완전히 조련 당하는 기분인데?
유일하게 맨살이 드러난 얼굴에서 하얗게 눈빛을 빛낸 캣시틸이 제느를 노려보았다.
"내 공학이 어디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각자의 목숨은 알아서 챙겨야 합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위축될 수밖에 없군요. 출발합시다."
공중에 뜬 비행선이 사방을 경계하는 가운데 숲으로 들어서자 불길한 공기가 확 느껴졌다. 피부를 자극하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분 나쁜 기운은 여전히 가득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계곡 사면을 따라 이어진 길도 없는 산비탈은 평범한 녹색 수풀과 곧게 뻗은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분위기는 귀신이 나돌아다닐 것 같이 을씨년스럽게 가라앉아 있다.
'자기, 여기 와 본적 있어?'
'응. 처음엔 반대쪽에 떨어졌어. 그때는 경황이 없고 뭔지 몰라서 그냥 조금 싸늘하다 싶었는데 이게 악마의 기운일 줄은 몰랐네. 거기다 저 반대쪽, 죽은 사람의 혼이 그냥 돌아다니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죄다 온몸을 갑옷으로 두르고 허공에 빙빙 날아다니는 육각철판의 호위를 받는 데다 나무들 위에는 비행선이 떠서 사방을 감시하고 있다. 거기에 1km 떨어진 곳부터 갖은 정찰기와 전투기, 작은 함선들이 방진을 펴고 총과 포를 움직이며 레이더파를 어지럽게 날렸다. 전파 때문에 하늘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데 어지러울 정도였다.
거기서 제느는 하품을 하며 다리를 놀렸다.
'문제는 가서 뭘로 어떻게 이 지옥문을 부술 거냐는 거야.'
나풀거리는 치맛자락과 빨간 구두로 험한 산길을 가뿐히 걸으며 제느는 머리카락을 헤치고 그 안에서 작은 막대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너무 긴장감 없는 모습이라 내가 오히려 뒤가 팔렸다. 정말 깊숙이 들어가기 전에 뭔가 몸을 보호할 거라도 줘야 하겠다.
"쉬텐르겐 사령님. 마력 운용이 쉽지 않습니다. 뭔가, 여기는 숨이 막힙니다."
앞장서서 전위를 맡고 있는 것은 몸 주위를 떠도는 구슬을 가진 마들리아나와 캣시틸이었다. 다들 똑같은 국방색 장갑복을 입고 있는지라 들고 있는 무기를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제대로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른 장갑복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들고 있는 검은 쉬텐르겐 사령의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뭐긴 뭐야. 저 밖에 있는 놈들하고 같은 거야."
"그렇소? 마왕성에서 느꼈던 그 사악한 기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더니, 실체는 이곳에 있었군."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빛을 거둬들여 손안에서 모양을 만들었다. 전파들이 섞여 들어오자 빛 막대는 무지개빛이 섞여 어지러운 색깔을 띄었다. 어린애들 가지고 노는 장난감 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지만 어차피 빛이란건 다 똑같으니 상관은 없었다.
"뭐야. 나주는 거야?"
"갖고 있어. 혹시 또 모르니까."
손을 내밀자 입을 가리며 새초롬하게 웃은 제느는 사양 없이 넙죽 받아들고 자기가 꺼낸 막대기와 맞댄 다음 나사를 조이는 것처럼 빙빙 돌렸다. 그러니 마치 물감이 섞이는 것처럼 두개가 섞여 들어갔다. 다들 발걸음도 멈추더니 그걸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아무런 에너지 출입도 없군요. 양자변환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다니 당신들은…."
캣시틸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빨리 가지? 시간 없어."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제느를 보니 허세를 부리는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갑자기 앞으로 걸어가는 저 등이 정말 작고 애처로워 보였다. 속으론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데도 거친 산길을 걷는 걸음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일부러 뻗대고 있는 저 작은 어깨가 얼마만큼 무거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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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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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입에 풀칠은 하고 있습니다.. 작가님도 무탈하신가요 ?
무소식이 희소식이죠 ㅎㅎㅎ ㅠㅜ
오매불망하던 연재
..좋다 ..
어...어어...??
2개월 만에 컴백하신...ㅎㄷ;
오랜만에 뵈니 좋......지 않아요! ㅠㅠ..자주 오셔요 ㅠㅠ
아 어느새 또 연재가 되었구나....^^
오오 2개월만에!!!!!!!!!!! 내년쯤엔 완결 날 수 있을까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작가님도 감기걸리시지말고, 따듯한 겨울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