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글로 남겼듯 저는 '왕좌의 게임'이 대너리스를 띄워주느라 주변 인물들 모두를 종잇장처럼 만들어 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부응해 대니는 점점 더 생기발랄해지지만 너무 일찍 완전체가 되어선지, 존 스노우랑 썸타느라 전전긍긍할 때정도 빼고는 좀 지루하기도 하고요.
재기넘치는 또라이, 와일드파이어로 최강함대를 날려버리고 킹스랜딩 귀족들 모두에게 뻑큐를 날리던 티리온은 이제 사람만 좋은 책상물림, 여왕님의 활약 뒤에서 찌질대기만 하는 징징이 캐릭터가 돼 버렸고요. 리틀핑거와 둘이서 사실상 왕국을 양분해 움직이는 것 같던 바리스는... 기껏해야 해설자, 아니면 뒷방노인네입니다. 그 왜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같은 사극에서 활약이 끝나버렸는데 아직 죽지는 않은 캐릭터가 왕궁 뒷방에서 "아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 이것 참 큰일이구먼. 이 일은 이러저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해설해 주고는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빠지던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심지어 존 스노우조차도 대니네 동네에 온 순간, 다 큰 아저씨가 괜히 일 없이 어슬렁대면서 지나가는 강아지, 가 아니고 드래곤이나 쓰다듬어주는 한량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웨스테로스 최대영역이라는 북부의 왕이라는 사람이! 왜 남의 집 대문에서 찾아온 손님한테 그 집 주인 집에 없다는 이야기나 전해주고 있죠? 아무리 봐도 동네 백수 형인데, 오로지 가끔씩 대니 여왕님한테 끼부리는 걸로나 밥값을 한다는 느낌입니다.
역으로 대니 곁에서만 떠나면, 조라처럼 갑자기 캐릭터가 확 살면서 타지에서 불치병에 직면한 그의 남자다움과 성실함이 새삼스레 부각되고 그러더군요. 바리스도 6시즌 피날레에서 마르텔네 언니들과 가시여왕 앞에 "불과 피죠." 하고 나타날 때만은 간지가 철철 넘쳤었어요. 그러게 빨리들 대니 곁에서 도망쳐야, 캐릭터 면에서나 생존율 면에서나 살아남을 수 있는데 말이죠. 안타깝게도 회색벌레마저도 예고편에 보니까 대니 휘하로 돌아오는 것 같더군요.
이쯤 되니 차라리 대니가 죽어버리면? 대니가 죽고 남은 드래곤과 군대들을 두고 생존자들이 '왕좌의 게임'을 벌인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7시즌 6화의 백귀 원정대 부분이 왜 그닥 임펙트가 없었을까 생각해 봤는데, 역시 원정 자체가 뜬금없었다는 게 컸지 싶었습니다. 뭔가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올스타 멤버들의 '소풍'이잖아요.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의미가 막중하거나 대세에 영향을 준다고는 보기 어려운... 오히려 그 소풍으로 인한 삽질의 결과가 훨씬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됐고요.
그 소풍 역시, 근본을 따지자면 대니네 집에 갇혀서 한량이 되어버린 존 스노우가 심심해서 답답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벌인 일 같았어요. 존이 하도 할 게 없으니까 먼저 할일이 없어져버린 티리온이 남의 집에서 빈둥대는 게 꼴사나워서 "그러면 나가서 백귀라도 한 마리 잡아오지?" 해서 역시 또 다시 병풍이 될 위기에 처한 조라까지 가세해가지고 이루어진 일이었달까요. 어쨌든 그렇게 본질상 한가한 삽질이었으니 올스타 멤버들이 설원에 갇히고 해도 5시즌의 하드홈이나 6시즌의 서자전쟁 같은 절박함을 도저히 느낄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것도 원흉은 대니이네요. 대니가 모두를 병풍 내지는 종이인형으로 만들고 있고, 어떻게든 종이인형을 벗어나겠다고 뛰쳐나갔던 존이 결국 뜻대로 안 되어 섹시한 복근을 드러내면서 '걍 저는 애틋한 히로인 할래요...' 끼 부리는 것으로 마지막 존재 가치를 찾으려는 발버둥이 이번 에피 같았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웨스테로스에 밤의 왕 이상으로 위협적인 존재는 대너리스가 아닐까 싶어요. 밤의 왕이 모두를 얼어붙은 시체로 만든다면, 대니는 모두를 재미없는 종이인형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말이에요. '얼음과 불의 노래'는 의외로 밤의 왕과 대니가 한쪽에서는 세상을 얼려버리면서 또 한쪽에서는 자신을 빛내기 위한 땔감으로 태워버리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래서는 누가 이겨도...
첫댓글 동감합니다. 전투씬이 특수효과가 잔득 들어갔음에도 처연함과 생동감이 없었던 이유는 그 전투의 시작과 존재가 명분도 개연도 없어서 시청자의 감동을 못 끌어내서인 것 같아요.
대너리스 옆에만 가면 종이처럼 평면이 되는 등장인물들... 도대체 어찌 끝낼지 몰라 주인공을 다 죽여버리는 옛날 소설들 같기도 해요
역시 대니가 죽어주어야... 근데 대니가 죽으려면 예언상 다른 여왕한테 몰락당해야 하는 세르세이가 먼저 죽어야 하고, 근데 세르세이는 8시즌 끝날 무렵까지 안 죽을 것 같고요. (답이 없;) 걍 세르세이한테 정 붙이고 인간적인(?) 세르세이가 모든 인간을 종이인형 내지 땔감 만드는 낮의여왕과 대적하다 장렬히 쓰러지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요.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