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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한번 열어보고자 한 글을 스크랩 하거나 퍼가신분들이 계셔서 대원군에 대한 저의 소견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황사회 전체의 중론이라던지 그런 입장이 아닌 제 개인의 소견임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왕의 아버지 대원군
흥선대원군,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 된 뒤에는 흥선헌의대원왕으로 추존되는 그는 남연군의 4째 아들로 왕족들에 대한 견제로 살아남기 위해 파락호로 지냈다는 이야기와 달리 그의 아버지는 오위도총관을 지낼 정도로 우리가 알고 있던 만큼 가세가 기울진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가택은 안국동에 위치하였었다.
물론 순조대 이후 세도정치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의 위세가 대단하였으나 효종 이후로 왕손이 귀했고 실제 권력은 없으나 일종의 상징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하는 그러한 파락호 대원군은 말그대로 소설에서 비롯된 이미지임은 수없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조선 중건을 꿈꾼 정치가
앞서 윗글에서 이야기한것과 같이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정치참여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 조선은 세조대 이후 종친들의 정치 참여를 금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려면 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단순히 왕의 아버지인 것을 토대로 권력을 행사하기엔 난제였을 것이다. 물론 대원군의 대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고종 즉위 초에 이루어지긴 한다. 가마꾼의 규모 등..
여기서 대왕대비는 대원군을 대신의 지위로 대우할 것을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는 저런것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당시에는 작은 예법에도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고 이는 정치참여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선포한다. 그러면서 영건도감이 설치가 되는데 대원군은 바로 이 영건도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일단 경복궁 중건에 앞서서 다른 치적을 이야기하자면 조세제도의 문란인 삼정을 바로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한다. 이것은 철종대에도 이미 설치된바 있어서 조세제도에 대한 문란은 사실 세도정치기간 내내 문제시 되었던 부분이긴 하였다. 이 제도를 바로 잡는 것은 세도가와의 정면 대결과도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를 강행하였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지방관 혹은 향리 등의 고리대금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세원을 확보하고 양민들의 조세 부담을 축소시켰다.
혹자는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부분이기에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들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가 개혁적으로 볼수 없다는 이들도 있으나 적어도 내치에 있어서 그는 개혁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윗 글에 댓글을 남겼듯이 우리는 고려 충선왕 무렵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어 노비관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 이를 다시 공민왕 대에 실시하는데 이것 역시 개혁이라고 한다. 개혁이란 기존에 누적된 문제점을 개선하고 혁파하는 것을 말하니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하여 개혁이라 할수 없다는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다.
대원군 치세의 경제적 위기 초래와 민심 이반의 원인?
대원군의 정치적 입지 약화는 결국 3가지로 축약된다. 경복궁 중건으로 무리한 토목공사에 대한 피로감, 원납전 징수로 인한 폐단,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유발이다. 위 글은 단순히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 아니라 영건일기 등이나 당시 조선 재정의 흐름을 함께 참고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하지만 가장큰 민심이반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진 기간은 짧다. 1865년부터 1867년까지 이루어졌으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주변 도로 확장과 민가를 구입하여 오군영을 비롯한 각 관청들이 그 일대에 들어서도록 공사를 하였다. 이때 구입한 민가는 적절한 수준의 금액으로 보상하기도 하였으며 기와, 초가, 가가의 칸수에 따라 기준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또한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여러 건축자제는 경희궁이나 영조의 잠여였던 창의궁 등 기존 궁궐의 전각들에서 공수해오거나 관청 건물 중 사용하지 않는 건물들을 헐어 건축자제를 활용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수 있다. 인력을 동원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원군에 대한 숙소 문제 해결과 가급적 한성 부근에서의 인력을 이용하는 선에서 이루어졌고 일정량의 금전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원납전의 경우 750만냥 정도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이중 120만냥은 출처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280만냥이 개인들이 납부한 금액이며, 350만냥 정도가 지역단위로 납부된 금액이다. 물론 지역 단위로 하였을 떄에 일반민들의 금액 비율이 상당하겠으나 개인별로 납부한 금액들의 경우는 80%가 양반층이 납부한 금액으로 당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민에 준 부담이 매우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원납전의 경우 경복궁 중건에만 투입되지 않았다. 경복궁 중건 자체는 사실 한성부 내의 전통적 개념의 도시계획사업이었고 기존 민가를 헐고 관청을 옮겨 짓는 경우가 있었기에 정조가 수원 화성에 87만냥 정도를 소진한 것보다는 매우 큰 양이긴 하지만 이 원납전은 경복궁 중건기간 동안 있었던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군비증강에 돌입하였고 강화를 비롯한 지방 군영에 원납전으로 징수한 재정이 투입된 기록들 역시 존재한다. 원납전과 관련된 기록들을 보면 실제로 경복궁 중건 이외에 중요 국가사업에도 투입된 부분을 찾아볼수 있다. 물론 원납전 자체가 개인납부로 진행 된 부분에서 양반층 등이 80%달한다고하나 지방 단위로 할당된 원납전에서 강제적 성격을 띄면서 민간에게 부담이 전혀 안되었던 것은 아니나 결정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당백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라는 시각도 사실 당백전 자체보다 당시 조선에서 유통되던 기존 엽전 등보다 청전이 문제시 되었다. 엽전과 청전은 한중일에서도 쓰이고 있었으며 환율이 각기 달랐다. 1873년 11월 3일 최익현이 올린 청전의 폐해에 대해서도 당백전보다 더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물론 당백전의 폐해가 있었으나 인플레이션의 요인은 당백전보다 청전으로 인한 것이 더 컸다고 하겠다. 이것은 단순히 당백전 발행 자체에 있다기보다 또다른 요인으로 인한 통화량 조절에 대한 문제였다고 하겠다.
중앙군과 지방군의 정비
세도정치기를 거친 조선의 오군영은 본래 중앙군으로써의 역할보다는 세도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작용한바가 컸다. 이미 어영청과 금위영은 허설화 되었고 훈련도감은 향군의 번상이 아닌 그나마 급료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중앙군으로써의 역할을 이미 상실하였다. 교장, 습조 지시에도 군용을 이루지 못하였고, 포수가 장방을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훈련도감을 정비하고 포수 양성과 대대적인 무기 수리를 추진한다. 전국적으로는 2만명을 상회하는 포군을 설치하였고 전선수리와 양무서적을 통한 무기개발에 착수한다. 효과적이진 않았으나 지면배갑 개발이 있었고, 대원군이 직접 연포도설과 칙극록양 등의 양무서적을 내려 신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다. 일부는 일본으로부터 신식총을 밀수하기도 하였던 것으로도 보인다.
대원군기에는 5군영의 개편과 실질화는 있었으나 군영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아 5군영체제로 유지되었다. 다만 5군영에서 2군영으로 군영 수가 줄은 것은 1880년대 고종의 친정 이후시기이므로 이는 글쓴이의 오류라 하겠다.
쇄국화신?의 대외 정책
기존 교과서에서도 아직 크게 바뀌지 않은 입장인 만큼 대원군은 척화비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실질적으로 서양세력과의 무력충돌의 결과다. 물론 국내 정치적 요소로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프랑스 군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미국 역시 셔먼호 사건으로 충돌하게 되는데 처음 셔먼호를 발견한 조선 지방관리는 셔먼호와 비교적 평화적으로 소통을 하였으나 이 때 셔먼호는 교역을 원하면서 무리하게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지방군관이 막자 이를 납치,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를 소각하기에 이르고 배에서 20여명이 불타죽고 탈출한 선원들은 평양군민들에게 사살된다. 이사건으로 미국은 신미양요를 일으키는데 그 와중에 조선과 교섭이 이루어지고 미국은 평화조약체결을 원하여 국왕의 서신이나 동급의 고위관리 접견을 원하였으나 격에 맞지 않는다 하여 이기조는 거부하였다. 결국 이문제는 청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미국과 접촉하게 되는데 조선측에서 신미양요 당시 야간 기습으로 미군을 격퇴한 것으로 청에 알리면서 미국과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는데 이것 역시 오늘날 연구자료들에 의하면 조선정부가 외교적 현안을 만듦으로써 새로운 교섭시도를 하려던 것으로 보고있다. 다만 이러한 교섭시도는 청으로 인해 차단된다.
물론 이정도로 그가 개화론자까지라고는 볼수 없으나 위정척사적 쇄국론자라고 할수는 없다. 그는 경흥지방에서 해당지방관과 러시아 측 관리의 접촉 역시 청의 개입시도에도 불구 직접 소통하는 창구를 열어두었다는 것으로 보았을 떄에 내부적인 위정척사 분위기 외에도 당시 서구세력에 대한 경험이 미비한 현실과 청의 경계로 인해 문호를 개방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외치에 대한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수 있으나 이는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지 쇄국에만 목맨 결과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대원군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해보아야 할 점
대원군은 실제로 섭정이란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지 않았으나 그에 준하는 권한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고종이 장성한 뒤에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였고 이후 권력을 상실한다. 문제는 이후부터의 행보다. 대원군 집권 10년 기간동안에는 누적된 조선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군비를 개선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고 임오군란 등의 사건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비교적 민간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권력 추구적 형태가 강하게 나타난다.
1881년 이재선 역모사건에서도 대원군이 깊게 개입된 것은 아니지만 방조한 정황이 여럿 드러난바 있으며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점령 당시 일본에 의해 섭정에 추대되면서 이준용을 옹립하려던 시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된 의견이다. 다만 오늘날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개입에 관한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완용 평전'과 비슷한 논조의 주장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주로 유길준, 윤치호 등의 기록들을 증거로 내세우긴 하지만 사변 직후 일본의 대외적 입장과 흡사하다.
이미 이전에 사실 이에 대해서 주류 학계에서는 거사 이전에 일본측에서 대원군의 정사개입을 차단하고 궁중사무에 한하여서만 관여할 수 있도록 한 점과 일본 주류 거물 정치인이 이시점에서 조선 전면에서 물러나고 정치적 입지가 없는 무명에 가까운 인사가 일본 공사에 임명된 점, 일본 공사관기록을 비롯 내부 기록에 거사에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하는 점. 대원군을 수행하여 궁궐로 들어가는 무리가 일찍 도착했음에도 대원군은 양주에서 새벽 3시에 출발, 도성에 새벽 5시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움직임이 노출된점. 초기 대원군에 대한 외국 공사의 의심이 일본으로 방향을 바꿔 집중된 점 등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입장 혹은 방조하였을 수는 있으나 주도적 입장으로 볼수 없다고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대원군이 실각 한 이후에 시대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 볼필요가 있다. 사실 대원군의 권력욕은 대단했다. 1886년부터 제기된 이준용 옹립 시도 역시 대원군의 전적 의도보다는 갑신정변 이후 원세개가 고종을 의심하여 대원군을 선제적으로 이용하고자 함이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물론 1894년 이준용 옹립사건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고 신빙성도 있으나 당시 일본에 의해 섭정을 하는 상황에서 동학농민군과 결탁하고 청군을 끌여들여 일본군을 몰아내려고하였던 점에 있어서 명성황후를 본인이 직접 제거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희생량을 자처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적어도 궁중을 직접 겨눈 칼날에서는 임오군란이나 1894년 일본 경복궁 점령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이 사태를 수습하는 형태에서 권력 장악기도를 시도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양상이기도 하고 결국 정치적 자살을 의미하기 떄문이다.
나는 한번 되묻고 싶다. 오늘날 대원군을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을까?
첫댓글 의식의 흐름대로 적다보니;;; 글 모양새가 엉망입니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