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빛!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가톨릭 신자가 아닌 18살 여학생 한 명과 수학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오나학교에 입학 한 것은 며칠 지났지만 제 개인사정상 제대로 대면한 것은 그 날 수업 시간이 처음이었어요.
아이는 수업 시작 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너무나 낯선 제 세례명과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고
저는 성인의 뜻과 아가다 성녀, 그리고 우리 수녀회의 창립자 까르멘 수녀님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적 호기심이 풍부한 아이는 화이트보드에 혼자 이것저것 개념 정리를 해가며 그 의미를 되새기더군요.
그리고 본격적인 수학수업.
그 날 오후 기숙사에서 잠깐 아이 옆을 스쳐 지나갈때 아이가 별안간 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성녀가 되는게 꿈이에요?"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 라는 게 그 순간의 솔직한 제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정신을 차려 일단...
"가톨릭 신자는 거룩하게 살라고 불림 받았으니까 모두들 성인, 성녀가 되는 걸 꿈꾸는 게 맞아."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가톨릭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생각을 했는지...
아이가 무슨 의도로 질문을 한건지, 제 대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의 질문이 며칠간 제 마음을 따라 다녔습니다.
누군가가 '성인이 되는 게 꿈이에요?'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하실건가요?
'되긴 뭘 돼! 아무나 성인이 되는 줄 알어?'
'성인 되려면 얼마나 힘든데! 순교하던가, 이것저것 극기 희생하고 기도도 많이해야 하고...난 안돼!'
이런 대답이 가장 나오기 쉽지 않을까...
그건 아마 <성인> 하면
바티칸에서 시성되는 성인들, 우리나라의 순교성인들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에 더 이상 제 생각을 주절주절 쓰기보다
5년전 이맘때쯤 일기에 옮겨적어 놓은 토마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 일부분을 적습니다.
성인, 거룩함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의 좋은 설명이 될 것 같아서...
내용이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찬찬히 읽어보세요.
(P.19)
하느님이 우리의 성화를 바라신다면, 그리고 거룩함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사실 그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빛과 힘과 용기를 틀림없이 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반드시 주신다.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받은 은총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P.37)
'완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부지런히 그리고 사심없이 하느님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발견되고 사랑받고 소유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심으로써 우리를 완전히 관대하게 만들고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게 하며 우리의 약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극복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과 고통을 성령의 힘과 순수함으로 맞바꾸도록 허용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과 성령의 탄식을 잊은 채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켜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 토마스 머튼, '삶과 거룩함'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