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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감독. 2011년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통산 2,728승 2,365패로 코니 맥(통산 3,731승), 존 맥그로(통산 2,763승)에 이은 역대 MLB 감독 최다승 3위에 올라있는 감독이며 나아가 MLB와 현대 야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명감독으로 명성이 매우 높다 카즈 팬들은 흔히 "TLR"로 부른다.
2. 젊은 시절
선수시절에는 별 볼일 없는 유틸리티로 뛰었지만, 자신이 선수로서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먹고살기 위해서 은퇴 후 공부를 시작해서 고향 플로리다 주립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면허까지 땄다.
그래서 로펌 입사가 보장되었는데도 야구가 너무 좋아서 마이너 감독으로 갈까 하는 유혹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문제로 나름 진지하게 교수들과 상의까지 했는데 교수님들의 반응은 "니 나이가 몇갠데 철 좀 들어라 멍충아" 라는 말만 나왔다고(...) 그래도 고집을 부려서 야구 감독으로의 미래를 밀고 나갔고, 덕분에 197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이 되면서 MLB 사상 7번째로 변호사 출신 감독이 되었다.
훗날 이 결정은 변호사로 밥 벌어먹기보단 버스타고 돌아댕기며 마이너 감독을 하는게 낫다(I decided I'd rather ride the buses in the minor leagues than practice law for a living.)는 명언으로 남게 되었다.
3.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8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더블A 팀의 감독이 된 TLR는 1979년 중 시카고의 트리플A 감독이 되었다가 빅리그 팀 감독들이 삽질을 거듭하면서 빅리그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는 시즌이 ⅔에 머물던 시점에 46승 60패에 머물던 팀을 시즌 마감 때 5할 승률에 맞춰놓는 기염을 토했고, 삭스는 TLR를 계속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자리에 안착한 TLR는 초반 커리어를 화려하게 시작했고, 블랙삭스 스캔들 이래 콩라인으로 전락한 화이트삭스에서 비록 WS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1983년 99승 63패 시즌을 지휘했고 삭스를 ALCS까지 진출시켰다. 비록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패배했지만 성과를 인정받아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1984년에는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경기에서 25이닝 연장전에서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8]
하지만 1986년 팀은 26승 38패라는 영 좋지 않은 스타트를 끊었고, 팀은 성적의 책임을 물어 TLR를 경질했다. 이것은 토니 라 루사가 30년 감독생활 동안에 경질된 유일한 경우이다. 그 외에는 타의로 잘린 적이 없다. 어찌하던 백수가 된지 몇 주만에,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TLR에게 연락을 해왔다.
4.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오클랜드[9]에서 TLR는 현대 야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큰 실험을 단행하게 된다. 1988년에 구위가 급격히 떨어졌던 어느 투수[10]를 불러서 "너 오늘부터는 이기는 경기 9회에만 던져라"고 명령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9회이다. 이 장면이 1이닝 마무리의 탄생인 것이다. 2~3이닝을 던지는 다이닝 마무리, 요즘 표현으로 중무리는 당시에도 있었다.[11] 그럼 그때는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가 별 차이가 없었네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그 역할을 선발 투수가 겸업하던 시절이다. 선발로 7이닝 던지고 이틀 쉬고 나서 7회에 구원등판 경기 마무리짓고, 다시 하루 쉬고 선발로 나오는 방식으로... 80년대 후반 한국프로야구에도 권영호나 김용수 등 전문 마무리 투수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12] , 선동열처럼 선발 투수에게 체력적 여유가 좀 더 있으면 다음 등판 사이에 마무리로 등판시키는 전략이 90년대까지 남아있었을 정도.[13][14]
당초 전문가들은 이런 전례없던 시도에 대해 "대체 뭣하러 이런 쓸데없는 보직을 만들었냐"는 반응이었고, 에커슬리에 대해서도 다 이긴 경기 9회에만 등판하여 연봉 받아먹는 먹튀라며 혹평했지만, 이런 TLR의 개혁은 1988년 AL 우승[15]과 에커슬리의 사이영상 투표 2위와 104승 58패 시즌으로 대성공을 거뒀고 결과적으로 1988년에 AL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다. 또한 198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누르고[16]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뒀으며, 1992년에는 TLR의 황태자 데니스 에커슬리가 사이영상과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17] 이후 이런 전담 마무리 투수는 현대 야구의 불펜 운용에 있어 필수요소가 되었으며, 과거 브루스 수터 같은 2~3이닝 마무리들과 달리 1이닝만을 투구하는 클로저들이 나타났고 지옥의 종소리, 샌드맨 같은 600세이브급 전설적인 클로저들이 출현했다.
또한 선발 투수들의 등판 간격을 조절하던 끝에 5선발 로테이션을 제대로 정착시켰으며, 선발과 마무리 투수도 중요하지만 좌타자가 많아지고 있는 현대 야구의 특성을 꿰뚫어보고 중간계투에서 좌타자만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Left-handed Specialist들을 기용하기 시작하여 현대야구의 불펜 운용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선발로서 효용가치가 떨어진 노장 좌투수들의 선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려놓았다. 불펜, 나아가 투수진 운용에 있어 TLR가 만든 이 시스템은 오늘날 전 야구계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18].
1990년에도 AL을 우승, 월드시리즈 3년 연속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으며[19], 1991년에는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월터 하스 구단주가 사망한 뒤 에이스는 매각 처분되어 리키 헨더슨 등 그간 에이스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스타 선수들은 떠나기 시작했고 졸지에 돈없는 그지구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20] 결국 TLR 역시 1995년을 마치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옮기게 되었다.[21]
5.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부시 스타디움 덕아웃에서 반복해서 라인업 카드를 살펴보는 모습은 TLR의 트레이드마크와 다름없다. 아래의 영상에서 카일 로시가 TLR을 흉내낼 때에도 이 모습을 깨알같이 코스프레했다.
TLR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감독으로 남게 되었다. 전임 조 토레 감독[22]의 말년인 1994년과 1995년에 53승, 62승에 그쳤던 세인트루이스에서 첫 시즌 96년에 88승을 거두며 NLCS까지 진출시키며 호성적을 보였고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여 카디널스의 10년을 육성했다. 그리고, 마크 맥과이어가 노쇠하면서 발전이 없는 잉여를 발굴했다.
여기서도 실험은 계속되었는데, 내셔널리그가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며 주로 9번을 치는 바람에 테이블 세터들의 작전 구사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아쉬워했던 AL 출신 TLR는 투수를 8번에 기용하고 9번에 그림자 테이블세터를 배치하는 기상천외한 타순배치를 시도하기도 했다.[23] 결과적으로는 딱히 생산력이 뛰어나지는 않은 결과가 나왔지만, 작전구사와 데이터를 중시하던 TLR의 습관에서 이런 시도는 충분히 가치있는 것이었고 이후로도 정규시즌마다 종종 시도했다.
2002년 다시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는데, 올해의 감독상을 양대리그에서 모두 수상한 역대 두번째 인물[24]이 되었다. 또한 서로 다른 세 팀에서 이 상을 수상하는 유일한 감독으로도 남게 되었다. 2003년에는 통산 2000승을 따내기도.
그리고 2004년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여 양대리그를 모두 우승하는 기록을 갖게 되었...는데 그해 ALCS가 워낙 흠좀무해서 묻혔고 WS에서도 스윕당했다. 안습. 그래도 2006년 월드시리즈를 기어이 우승하며 스파키 앤더슨에 이어 양대리그에서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2번째 감독으로 이름이 남았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고집과 참견만 늘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는데, 실제로 카디널스에 오자마자 노쇠화 기미가 보이던 아지 스미스를 반 강제로 은퇴시켜서 지금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으며[25], 말년이 다가오면서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인물들과 척을 지며 팀 케미스트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명단장 월트 자케티와 스캇 롤렌, 짐 에드먼즈 등 여러 선수들이 그렇게 카디널스를 떠났고[26][27], 심지어는 새파랗게 젊은 선수인 콜비 라스머스도 제대로 휘어잡지 못해서 콜비의 아버지와 다투다가 결국 팀에서 내보내게 되었다.[28][29][30] 또한 내야수로 활동하는 유틸리티 선수들을 억지로 외야 겸업을 시키느라 선수들이 혼란을 겪기도 했다[31]. 그 외에 2007년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흑역사도 있고, 맷 홀리데이나 알버트 푸홀스가 카디널스와 협상을 진행할 때 어련히 프런트가 알아서 해줄 문제를 괜히 참견해서 이리저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32]
때문에 대상포진으로 잠시 2011년 자리를 비웠을 때 카디널스 팬들은 TLR 없으니 속 시원하다며 통쾌하게 웃었고(...) 감독이 노망이 들었다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게다가 대단한 역전극으로 포스트시즌에 나갔음에도 경기 후반에 외야 불펜에 전화를 걸었다가 웜업 지시를 잘못 내리는 바람에 경기를 말아먹은 사건[33] 등 여러가지로 까임거리가 많았다.
회춘한 라루사...는 아니고 대상포진으로 인해 자리를 비웠을때 팀오더 교환을 나간 카일 로시다. 부스스한 뒷머리가 똑같다 마침 카일 로시는 라루사 감독과 생일이 같다.
여담으로 대상포진에 걸린 토니 라루사는 제대로 출장을 할 수가 없었다. 덤으로 좀비 같다고 해서 농담거리가 되기도 했다. 좀비 이미지는 정말 혐오물이라서 링크로 대체한다.
5.1. 2011년, 정상에서 내려오다
2011년 카디널스는 이러쿵 저러쿵 하는 스캔들이 있었음에도 후반기 푸홀스의 부활[34]에 힘입어 기적적인 상승세를 보였고 2011 MLB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역전해서 와일드카드를 따낸 것으로 모자라 만패에 빛나는 現 MLB 최강팀, 홈워키 브루어스를 연파하고 크리스 카펜터의 역투와 데이빗 프리즈의 맹활약에 힘입어 콩사스 레인저스를 꺾고 WS 우승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웜업 사건 정도를 제외하면 작두 탔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제대로 된 불펜 운영을 보여주면서 새삼스럽게 한국 언론에서 주목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메이저리그의 김성근이라는 식의 표현이 많아서 메이저리그 팬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기도 했다 2016년 현재 그 말은 라루사에게 엄청난 실례가 됐다.죽어라고 까던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반응도 '상대팀 감독을 보니 그래도 TLR는 양반인듯?'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이슨 마트의 마지막 투구를 쳐낸 데이빗 머피의 타구가 좌익수 알렌 크레익에게 잡히는 순간 랜스 버크먼과 붙잡고 펄쩍펄쩍 뛰는 TLR의 모습은 노망났다는 비판을 받는 감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귀여웠다(...)
이로서 TLR는 통산 3번째 WS 우승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우승과는 별개로 팬들의 여론이 자신에게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던 TLR는 정상에서 은퇴를 선언했다.[35][36] 은퇴 기자회견에서 "서점이나 열란다"고 했다고. 이런 은퇴 선언에 카디널스 팬들은 요 몇년 실컷 욕이나 먹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우승까지 해놓고 물러나신다니 아쉽다 츤데레?면서 그동안 메이저리그 최고의 감독으로 보여준 역량과 카디널스를 명문으로 키워낸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카디널스의 새 감독은 과거 야디어 몰리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카디널스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던 마이크 매시니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6년을 재직하면서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세 번의 내셔널리그 우승, 7번의 지구 우승, 9번의 PO 진출, 두 번의 100승 시즌을 만들고, 야구사적으로도 한 시대의 획을 그은 명감독의 공로를 기리는 차원에서 그의 등번호 10번이 카디널스 프랜차이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2012년 5월 11일 기념식을 가졌다. 그리고 2012년 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 감독으로서 진정한 마지막 경기를 가졌는데 아메리칸리그를 8-0으로 떡실신시켰다.
6. 그 이후
2013년에는 사무국에서 커미셔너 자문역으로 일하고 있했다. 2013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감독으로서 헌액되었는데, 감독으로 데뷔한 시카고 화이트삭스,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룬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중 어느 한 팀을 선택할 수 없다며 입회식에 팀 로고가 없는 모자를 쓰겠다고 밝혔고, 2014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4년 시즌 중반부터 토니 라 루사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새로 신설한 직책인 CBO(Chief Baseball Officer)에 취임하였다. 구단은 이 직책이 GM보다는 상위 지위이며 사장보다는 하위 지위라고 밝혔는데, 구단 전력구성에 관한 최상위 책임자의 권한을 가진다고 한다. 타 구단에서는 이 역할을 GM이 수행하고 있으니, 실질적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GM은 라 루사라고 보면 될 듯. 그가 취임한 이후 케빈 타워스 단장은 경질됐으며, 커크 깁슨 감독과 수석코치도 시즌 3경기를 남겨놓고 나란히 경질됐다. 본격적으로 애리조나의 리빌딩에 들어가는 걸로 보인다. 그리고 디백스는 멸망했다. 2016년의 디백스는 희대의 웃음후보로 전락하면서 처절하게 망했고, 토니 라 루사 본인도 권한이 대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2017년에는 데이브 스튜어트 단장이 경질된 후 새로 부임한 마이크 헤이즌 단장과 함께 디백스를 와일드카드에 올려놓으며 2016년의 실패를 만회하였고, 10월까지 활동한 뒤 CBO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야구계에서의 완전한 은퇴인가 했는데, 데이브 돔브로스키 사장의 특별보좌로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며 야구계와 다시 연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레드삭스가 부임 첫 해에 월드 시리즈 트로피를 탈환하면서 개인 통산 네 번째 우승의 기쁨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