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이란 무엇인가?
* 모순 개념과 반대개념
먼저 개념의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모순개념과 반대개념을 설명하겠습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예를 들겠습니다.
‘좋아한다’의 모순개념은 ‘좋아하지 않는다’입니다.
‘좋아한다’의 반대 개념은 ‘싫어한다’입니다.
두 개념의 차이는 중간 개념의 존재 여부입니다.
반대개념은 두 개념사이에 사이에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무관심이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모순개념은 다른 개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4부 니까야에서 이 두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는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특히 8정도를 이해하는 데는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그 의미를 세밀하게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정사유에서 악의와 악의 없음의 개념이 있습니다.
서로 모순 개념입니다. 따라서 악의 없음은 중간 개념인 악의 없음뿐만 아니라 반대 개념인 자애도 포함합니다.
* 정견이란?
(1) 의의
정견은 4성제를 아는 지혜입니다. 유학 이상의 성자들이 깨달은 통찰지입니다.
이것은 초기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세간적인 바른 지혜와 구별 됩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 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 했다고 합니다. (M9:14)
“비구들이여, '보시도 있고 공물도 있고 제사(헌공)도 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있고 과보도 있다. 이세상도 있고 저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화생하는 중생도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라고 하는 것이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이다.” (M117:7)
이러한 세간적인 바른 견해가 불교수행을 결심하고 정법을 공부하는 저의 수준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수준의 바른 견해에 부처님의 정법인 4성제에 대한 개념적인 바른 이해를 ‘바른 지혜’로 정의하겠습니다.
4성제는 우리의 귀결점이므로 바른 수행을 판단하는 지표입니다.
수행의 귀결점인 열반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에서 열반으로 음역한 nibbana는 nis+va(to blow)의 과거분사이며, 여성명사이다. 문자적으로는 '불어서 꺼진'이란 뜻이다. 초기경에서는 탐진치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의 특징은 고요함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p579)
따라서 모든 수행은 고요함의 조건을 갖추는 쪽으로 진행돼야 합니다.
(2) 수행에서 사성제의 의미
열반의 개념은 수행과정에서 ‘지금 이 순간 바르게 정진하고 있는가?’ 에 대한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지향점이 바로 ‘고요함’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수행과정에서 항상 중요한 것은 4성제의 2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갈애(원하는 것)라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어떠한 형태의 괴로움이든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원하는 것이 있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고요함의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4성제의 표현을 결과 원인 결과 원인으로 표현 하셨습니다. 즉 결과를 보면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을 통한 검증을 가장 중요시 여기셨던 부처님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괴로운가? 원하는 것이 있었다.
열반을 증득했는가? 8정도를 바르게 수행했다.
괴로움이 없는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
열반을 증득하지 못했는가? 8정도를 바르게 수행하지 않았다.
수행에서 우리는 대부분 결과를 통해서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번뇌는 미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린다는 것은 특히 초보수행자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수행과정에서 괴로움이 일어나면,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깊이 관찰하라는 부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3) 연기법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연기법입니다.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하므로 독립적인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연기는 거짓이 아니며 진실합니다. 존재는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조건 짓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것을 연기라 합니다. (S12:20*4)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은 땔감을 조건으로 존재 합니다. 세밀히 관찰하면 땔감인 장작은 타는 부분만 그 순간 연료입니다. 물을 뿌려 불을 끄면 그 순간 장작은 더 이상 연료가 아닙니다.
불과 연료는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간 것도 아닙니다. 어느 순간 서로 의존하여 일어나서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12연기에서 6입-촉-수-애-취는 어느 순간 서로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동시에 나타났다 존재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연기적으로 고찰해 보면 6입-촉-수-애-취는 서로를 조건하여 동시에 나타났다가 존재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여기에 세간적인 관점인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과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념상으로 보면 원인과 결과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라는 세간적인 인과과정으로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4부 니까야에서 나오는 원인은 원인의 조건입니다. 세속적인 인과과정에서 사용되는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조건 중에 결정적인 조건을 원인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콩이 자라기 위해서는 기름진 땅과 적절한 수분과 알맞은 온도와 빛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원인의 조건은 바로 콩입니다.
존재는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조건 짓는 성질이 있을 뿐입니다.
존재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라는 선형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세간의 이론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태어남과 죽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연기적으로 세밀히 분석해 보면 태어남과 죽음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관념일 뿐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정하여 죽음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없습니다. 다른 쪽의 삶의 처음 순간인 태어남을 이쪽 관점에서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는 이쪽 삶과 다른 쪽 삶만이 있습니다.
따라서 태어남과 죽음은 개념적으로만 서로를 조건으로 존재 합니다. 개념적으로만 있을 뿐 어느 순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의 과정에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관념이 괴로움이 일어나는 중요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고찰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연기의 예로서 즐겨 사용하셨던 12연기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괴로움의 조건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방법입니다.
즉 괴로움과 함께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살펴 본 것입니다.
세간적인 관점과 출세간적인 관점이 병존합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12연기는 괴로움의 조건을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이 순간 여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4부 니까야를 통하여 세부적으로 고찰하여 설명하고는 싶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삼생양중인과설의 이론적인 허점을 비판하고 새롭게 판을 짜야 합니다. 머릿속으로는 되어 있지만 여러분을 설득하려면 수많은 경전내용을 참고하여 분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은 개념적으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문구만 자세히 분석하여 기억하면 수행 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존재는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조건 짓는 성질이 있다.’
수행을 하시면서 ‘모든 현상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관찰해야 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정견으로 올바르게 정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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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