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생성한 민족종교임에도, 현재의 천도교는 1900년대 초입의 천도교와 완전히 같지는 않으며, 수운이나 해월 당대의 동학과는 더욱 동일하지 않다. 한국사의 근대 격동기에 태동한 천도교는 역사의 흐름에 제약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모든 종교운동은 태동과 동시에 사회변동에 따라 제도화의 과정을 걷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종교와 제도권 사회에 대한 이반에서 시작한 민족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19세기 후반의 사회적 아노미상태에 하나의 대안적 힘으로 조직되었던 동학은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경험한다. 그것은 '교단'의 조직화와 유지라는 현실적 필요성의 대두였다. 그것은 의암 손병희와 새로운 동학 지도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단 유지라는 과제가 사회변동에 조응한다는 것이고, 주체들의 시행착오와 미성숙을 통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논자는 대표적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1900년대 초입 제도화과정 연구를 통해 당시 천도교가 어떠한 역사 제약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어쩌면 천도교에게는 부끄러운 과거일 수도 있으나, 이는 한 종교만의 오류는 아니다. 그것은 무력한 민족현실 앞에 좌충우돌하던 한국 근대사 주체들의 공동 책임을 밝히는 것이고, 이를 통해 종교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2. 1894년 이후 최시형의 종교운동 노선 및 시국관의 변화
동학군은 끝내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일군과 관군의 협동공략 앞에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패배 이후 무수한 양민들이 긴 기간동안 학살되었고, 동학 조직은 지하로 숨고, 지도부는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최시형의 당시 행적은 자료의 부족으로 분명히 알수는 없다. 다만 부분적 자료들을 재구성해서 1894년의 경험을 그가 어떻게 반추했는지 살펴본다.
1) 일본의 현실적 힘에 대한 재인식
혁명의 패배는 일본에 대한 추상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일본은 무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위력적 대상이라고 자각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전면적 저항보다는 타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시형은 일본군과 대치 중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귀순을 다짐하는 글을 충주에 주둔중인 일본군 병참서에 보낸다.
근래 한 지역이 겉으로 우리 교를 핑계대고 속으로 역적의 마음을 품고서 남접이라 자칭하고 徒衆을 규합하여 함부로 侵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화를 부채질 하였으니 지극히 통탄스럽습니다. (중략) 우리 북접은 차마 앉아서 그 곤궁함을 당할 수 없어서 부득히 擧義聲討하려고 합니다. 대중이 모이는 날 저희들은 마땅히 이해로 깨우쳐 귀순케 하겠습니다. (이이화, "인간과 신의 차이 - 최시형의 역사적 재평가", [역사비평], 1988, 봄, pp.268-269.)
매우 굴욕적이고 친일적인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동학 지도부가 일본의 위력을 매우 충격적으로 실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향후 동학교단의 제도화와 친일화에 영향을 미친다.
2) 교단의 통일성 강화 필요성 인식
1894년 봉기는 동학교단의 일치된 준비 속에 발생하지 않았다. 후대 사학자들에 따르면 최시형은 초기에는 개입하지 않다가 봉기의 여파가 커지자 비로서 북접의 참여를 지시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참여 이후에도 교단 내 불일치와 지도체제의 불안정성에 대한 최시형의 문제의식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봉기의 실패는 교단체제 일원화를 가속화시켰다. 남접 지도부는 대부분 체포되었고 조직망이 위축된 상황에서 남접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해월은 종교적 연원을 강조하여 동학의 지도체제를 연원제로 바꾼다. 수운연원, 즉 龍潭淵源의 제시가 그것이다.
교단 정비 과정에서 남접 세력이 제외되었다는 것은 동학의 계급적 기반의 변화를 의미한다. 결국 손병희 대에 이르면 의도적으로 저항적 동학 농민세력과의 결별이 나타난다. 여전히 변혁적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농민들은 동학 조직으로부터 소외되고, 그 결과 동학당, 영학당, 활빈당 등 비종교적 의병운동에 흡수되거나 강일순 등의 신비주의적 종교운동에 흡수된다.
3) 민중 기대심리의 진정과 내면화
1894년 봉기가 그토록 전면적으로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전봉준조차도 대원군과의 제휴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지도부는 새로운 나라 건설보다는 체제개혁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농민층이 대거 참여하면서 양상은 바뀌었다. 양반 출신 지도층은 봉기의 상한선을 설정했지만 농민들은 완전한 자치를 기대하며 새로운 나라의 종말론적 이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정치적 기대심리의 상승이었다. 하지만 최시형은 객관적 조건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기대에 따른 무력 행동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혁명은 진압되고 수 많은 양민이 학살되고 교단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봉기의 패배 후 최시형은 동학이 불어넣었던 개벽의 이상을 내면화할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민생안정의 시급한 필요성 때문이기도 했다. 동학혁명 이후 살해된 농민들의 수는 학자에 따라서 적게는 5만에서 많게는 50만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비공식적' 학살이 집요하게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사상'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해월의 사상으로 볼 때 당시의 반생명적 현실을 심화하는 외적 행동성의 고양은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1894년 이후 교설에서 외형적 사회변화보다는 향아설위 같은 개인의 내면적 神化를 추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 動勢開闢에서 靖勢開闢으로 전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벽의 정신화, 내면화는 동학의 혁세주의를 상당히 위축시켰고 이후 사회활동에서도 체제 내적 개량운동의 성격을 초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최시형은 과도한 사회참여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자 했으며, 이는 종교성의 재강화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변화된 인식은 그의 체포와 처형으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1894년 이후 잠행 시기 동안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손병희는 스승의 일본에 대한 인식 변화, 교단 조직의 통일성 추구를 철저히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저항적 농민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손병희는 스승 해월처럼 내면적 종교성의 강화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정치구조에 참여하는 적극적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고, 다만 민중적 '저항'에서 외교적 '참여'로 노선 변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그것은 1900년대 초입 동학의 개화운동 참여와 제도화로 나타난다.
3. 1894년 이후 손병희의 지향성 : 종교성과 정치성의 이중구조
1900년대 초입 동학 교단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도주 손병희의 개인적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시국관과 노선대로 초기 동학 교단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제우나 최시형만큼의 개인적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최시형 사후 교단의 최고 지도자로 오르기까지 손천민, 김연국 등과 갈등을 빚었고, 이후 교단 운영에 있어서도 다른 인물들의 도전과 이탈 앞에 수 차례 고비를 넘겼던 것을 보면 그의 지도력은 카리스마 의존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종교적 열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철저한 수도적 정진은 계기에 따라 매우 강렬했다.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철저성과 정치적 운동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손병희는 수도를 강조하는 종교적 철저성과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정치적 운동성의 두 가지 지향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지향성의 이중 구조는 동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강조점이 교차하며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894년 이후 그의 행적은 정치운동(친일적 개화노선)으로 경도되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운동적 지향은 어떤 계기를 통해 형성되었을까. 그것은 동학 혁명 시기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북접이 봉기에 어떠한 태도를 취했든 결과적으로 북접도 봉기에 참여했고 손병희는 북접 지도자로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민중의 폭발적 참여와 몇 차례의 승리 그리고 곳곳에서 실현된 민중자치의 현실(집강소)등에 고무되었을 것이다. 이는 개벽의 지상적, 정치적 실현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고, 그것은 동학혁명이 진압된 후에도 손병희의 의식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1897년 7월, 앵산에서, 각 接에 보낼 임첩의 명의를 놓고 최시형이 의견을 물었다. 이에 손천민은 '海月先生'이 좋다 하고, 김조균은 '龍潭'이 좋다 하고, 손병희는 '至尊天皇'이 적당하다고 했다.(작자미상, 설동관 역, "해월선생문집", [한국사상] 24, 한국사상연구회, 1998. p.423.) 결국 김조균의 '용담연원'으로 결정되지만, 우리는 여기서 손병희의 정치적 지향성을 포착할 수 있다. 최시형은 혁명의 좌절 속에서 내면적 종교성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손병희는 여전히 새로운 나라의 지상적 건설이라는 비전에 따라 해월을 지존천황으로 내세워 정치적 현실 개조를 열망한 것이다.
그러나 최시형의 이러한 현실 개조의 기대가 농민층 중심의 저항운동으로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농민전쟁의 역량 미숙을 자각하고 있었고, 또한 동학과 농민운동을 동일시한 정부의 탄압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정치 참여를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과거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그의 정치적 기대는 민중의 힘과 의지보다는 국제 역관계를 이용해서 국가제도의 개혁과 교단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것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친일적 개화운동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4. 개화운동으로의 전환이 갖는 의미
1) 개화노선 채택 배경
손병희의 노선을 변화시킨 원인은 첫째, 정부의 극심한 탄압이었다. 1894년 이후에도 정부는 동학 교도들을 억압했다. 이러한 탄압은 손병희로 하여금 동학을 농민운동적 성격에서 벗어나도록 강제했다. 둘째는, 개화파 지식인들과의 교류였다. 1901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도일한 손병희는 그곳에서 망명해있던 개화파 지식인들을 만나 그들의 사상을 수용하며, 동시에 세계의 사상조류와 정치적 역관계 등을 파악한다. 이러한 개화노선의 상징적 선언은 동학교도들의 단발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 문명에 참여하는 표현이며 동학의 제도적 단결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이때 단발을 하고 검은 옷을 입은 교도들이 20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개화운동이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던 조직형태인 결사체를 구성하게 되고, 이것이 1904년 2월에 民會운동, 곧 大同會(이후 중립회, 진보회로 개명하여 결국 일진회에 통합됨)의 건설을 가져왔다.
2) 계급적 기반의 변화 - 농민운동으로부터의 이탈
개화운동으로 노선을 전환한 것은 동학의 계급적 기반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손병희가 주도했던 진보회 임원중에는 양반 출신으로 추정되는 자가 49%에 달했다. 결국 하층 농민층의 기반을 가졌던 동학 교단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류층을 흡수하는데로 나아간 것이다. 농민들이 동학에 강하게 매달린 것은 동학의 종말론적 유토피아도 한 이유였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철저한 평등사상이었다. 불평등한 사회관계에서 피해당하는 계급에게 동학이 제시한 평등은 혁명적 메시지였다. 그러므로 그 자신 머슴 출신이었던 최시형도 事人如天의 평등사상 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개화파 역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형식적 평등일 뿐이었다. 결국 하늘로 여겨지던 동학의 민중은 이제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할 무지몽매한 계급으로 전락했고 계몽의 주체인 교단 엘리트와 신앙하는 민중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3) 반외세 민족주의의 약화
이상의 계급적 기반 변화는 1900년 이후 동학 교단의 친일 개화노선을 초래하는 필연적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민중의 종교적 기대와 분리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개화노선이 민중적 민족주의와 일정한 선을 긋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반증된다. 개화운동의 성격은 지식인 중심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이었다. 그것은 개화파 사상가들이 당시의 의병운동이나 동학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때 명백해진다. 서재필 등이 주도하던 [독립신보]의 논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조선 백성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둔 미흡한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것이 반란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무뢰지배의 일을 행하여 동학당과 의병의 행세를 하니 (중략) 그것은 곧 匪徒라. 비도가 되면 難民인즉, 난민은 법률상의 큰 죄인이라
이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일고 있었던 민족주의적 의병운동 및 민란을 국권 회복에 장애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상적으로는 탄압과 외침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체의 소요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전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본격적인 외세 의존의 추구가 숨어 있었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의 '개화파'는 민중적 민족주의와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이라든가 미국, 혹은 러시아에 의존하여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의존의 대상 선정은 도덕적, 이념적 기준이 아니라 세력관계에 따라 이루어졌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속적으로 승리한 일본을 의존 대상으로 인식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의 현실적 위력을 인식한 개화파는 결국 친일의 방향에서 근대화를 추구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개화운동의 중심 결사였던 대한자강회는 고문으로 일본인을 영입했고, 그 후신인 대한협회는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의병운동을 일본이 나서서 토벌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의 분견대였던 일진회 주요간부들도 대부분 독립협회 간부들과 기독교도들이었다.
하지만 개화파 운동의 한계에 만족할 수 없었던 민중과, 반외세 민족주의자들은 현실적 세력의 불리함에도 일본의 침략책동에 대한 전국적 저항을 시도하고 있었다.(1906년에서 1911년까지, 의병의 정규일본군과의 전투는 무려 2,800회에 달했고, 참여 인원도 14만명, 살육된 사람만 17,779명이었다.(이종범,최원규 편, [자료 한국근현대사 입문], 혜안, 1995) 이는, 당시 민중이 지식인 중심의 개화운동과는 달리 본질적 반외세의 저항정신을 지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반외세 민중 저항의 상징이었던 동학교단이 개화노선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경향의 약화를 의미했고 심지어 친일매국집단이라는 의심조차 받게 되었다.
4) 본격적 친일화의 교단적 전개
교정일치를 추구한 손병희는 일본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실천한다. 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성에 군자금 1만원(약 5,000불)을 부조했고,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대동회(진보회)를 조직했다. 이는 국제관계의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승전국의 위치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손병희와 교단의 친일적 인식과 행동은 전면적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이해와 일치했다. 일본이 진보회에 대한 조직적 지원을 통해 동학 교단을 제국주의 확대에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을 입증한다.
당시 정부가 진보회 탄압을 강화하고 많은 간부들을 구속했음에도 불구하고 1904년 주한일본공사의 보고에 의하면 진보회 조직은 11만명에 달하고 있었다. 반면 일진회는 서울 중심의 지역적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광범위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던 진보회와 일진회의 통합을 원하여 진보회 탄압 철회를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1904년 10월 23일 일진회는 진보회 토벌 지시 철회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내고, 25일에는 참정대신 신기선에게 대표 2명을 파견하여 진보회 토벌 취소를 촉구한다. 뒤이어 26일에는 각 신문을 통해 "지금의 정부는 모두 러시아에 아부하는 무리들"이라고 강력히 비난한다.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상황에서 일진회의 압박은 위협적이었고 결국 정부는 11월에 진보회원들을 석방한다. 그후 진보회는 동년 12월 2일 일진회라는 이름 그대로 통합을 하게 된다.(유병덕 편저, [동학·천도교], 시인사, 1987, pp.301-30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40여년 동안 지하에서 활동하던 동학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조직적 지원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반외세를 지향했던 동학이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어 공식성을 확보하며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인 동시에 동학의 민족주의 약화와 친일 경도라는 결과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진회로 통합된 진보회는 일본의 대동아 공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경의선 군용철도 부설과 군수품 운반에 협조했다. 본격적으로 매국적 친일 행위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진보회의 이용구는 일진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통해 민중들은 동학 교도들을 친일집단으로 인식하게 된다. 동학은 더 이상 민중적 민족종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친일화는 교단 정체성의 위기마저 초래한다. 결국 귀국한 손병희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친일화된 이용구 중심의 진보회(당시는 일진회)와 결별을 시도하게 된다. 1900년대 초기 교정일치의 실패를 경험한 동학은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를 선포하고 이용구 등 62명을 출교함으로써 정교분리로 선회한다.
5) 소결 - 민중주의, 반외세 민족주의의 약화
손병희의 개화 노선은 외세를 이용해서 동학 교단의 입지를 넓히려는 의도였다. 반외세보다는 반봉건에 중심을 둔 것은 정부의 탄압에서 교단의 와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반봉건 개화운동의 전개는 결국 일본에 의해 동학 교단이 이용되고 마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치밀한 침략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수많은 첩자와 낭인들을 보내 한국의 근대화 주체들을 포섭 이용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동학이 그들에게 이용당한 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손병희가 철저한 친일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일본의 침략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을 축출하고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 또한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근대화의 이념적 주체라 할 수 있는 개화파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것이었다. 오히려 인종주의적 맥락에서 '차라리 일본이 낫다'라는 자조감 섞인 수용성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결국 손병희 중심의 개화운동은 동학 교단의 민족종교적 위상을 현저히 약화시켜고, 더 나아가 친일매국집단이라는 오명이 동학 교단에 상당 기간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손병희 교단은 본질적인 친일집단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도 천도교 공식 역사에서는 이 시기의 교단 상황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천도교의 공식적 역사 중 하나인 [천도교운동사]등을 보면, 1900년 초입의 손병희와 교단의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용구 등 친일세력을 축출한 것만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 친일세력 형성의 배경은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홍장화 편저, [천도교운동사], 천도교중앙총부, 1992, pp.68-71.)
5. 개화노선의 실패와 천도교로의 전환
1) 개화노선 실패와 교단 제도화의 추구
1900년대 초 손병희의 개화노선은 민중기반 유실과 민족주의 약화를 초래했다. 이는 교정일치관의 근본적 문제점으로 부각되었으므로, 천도교로의 전환은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향했다. 손병희는 이 전환을 통해 동학의 정체성을 근대적 종교운동으로 정립하고자 했고, 이는 교회와 교리의 본격적인 근대화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 확립이 교회와 교리 체제 정립이라는 '제도화'로 나타난 것은 동학운동의 질적 전환을 의미했다. 즉 최제우와 최시형의 민중적 동학운동으로부터 한 걸음 더 벗어나는 것이었다. 비록 손병희를 비롯한 동학 지도층이 1900년대 초입 개화운동의 친일적 경도에 따른 실패를 자인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原 동학'의 복원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새로운 동학 지도층은 서구 민본주의와 근대적 교회 원리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종교성의 재강화 역시 근대화된 기성종교의 제도와 교리에 유사한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2) 교단 조직의 근대적 개편과 단일지도체제의 구축
최시형은 천도교로 개명 후 우선 천도교대헌을 제정하여 교회조직을 체계화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교단 조직의 모든 권한을 大道主에게로 집중한 것인데, 이는 교단 운영의 중앙집중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앙총부 아래 전국에 72개 대교구를 두어 각 교구의 교령을 선정했고, 아울러 종교의식의 체계화를 위해 시일예식과 수도조목을 제정하고, [만세보]와 [천도교월보]를 간행했다. 그리고 서울에 교리강습소를 두고 교리 연구에 치중해 많은 교리서를 출간했다. 한편 교회와 민회를 엄격히 분리하여 기존 교정일치 노선의 수정을 시도한다. 이러한 교단 조직의 개편은 우선 일진회와의 갈등관계 속에서 천도교 교단을 장악하기 위한 손병희의 위상 강화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천도교의 조직과 의례, 교리 등이 기성종교의 체계를 모방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곧 민족종교의 본격적인 제도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제도화를 가장 본질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교리체계'의 형성이다.
3) 교리체계의 철학적 심화와 제도종교화
손병희 시대의 교리적 특징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人乃天 교리이다. 이는 수운의 侍天, 해월의 養天을 교리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은 근대 철학사상의 형식을 차용한 교리적 세련화의 의미가 더 강하다. 즉 교리 체계 형성 과정에서 천도교 지식인들이 가졌던 사상적 기반은 수운이나 해월의 사상이라기 보다는 서구의 근대적 철학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의 계기가 된 것은 일본유학의 집단적 경험이다. 교리체계화를 주도한 천도교 청년지도층 대부분은 손병희와 함께 일본 유학을 경험한 인물들이었다. 손병희는 1901년 이후 2차례에 걸쳐 모두 64명의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켰다. 1868년에서 1911년에 이르는 이 시기, 곧 일본의 명치시대는 서구 사상들이 대거 유입되어 있던 때였다. 이미 칸트, 헤겔, 베르그송, 니체 등의 철학과 생명철학, 실존철학, 위기신학, 니힐리즘, 데카당스등 모든 사상이 빠짐없이 수용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天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던 일본의 계몽사상가인 후꾸자와가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일본에 유학간 동학 지식인들이 민본주의 사상과 서구 철학의 근대적 논리를 접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대표적인 천도교 청년지도층은 양한묵, 최창조, 정광조 등이었는데, 이들은 철학에 특히 관심이 많아서 동학 교리의 철학적 재구성에 열의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하에 교리체계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지강 양한묵은 손병희 시대의 인내천 교리의 철학적 기반을 제시했다. 그는 1907년 [대종정의]를 지어 동학사상의 요지를 인내천으로 정식화했는데, 이것이 손병희에 의해 전면적으로 수용되어 교리로 확정된 것이다.
물론 당시 양한묵의 인내천 교리화는 성리학적 논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인내천을 사람의 마음이 곧 天이라는 것으로 추정했고, 이를 性과 心의 관계로 풀어나갔다. 인내천은 사람과 만물이 天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사람과 만물에 性과 心이 내재한다는 논리로 天人의 관계를 동일시했다. 성리학의 性卽理設에 의하면 理는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으로서의 天이며, 性은 사람의 천부적인 마음이므로 곧 사람의 마음은 天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天은 전체적이고 사람의 性은 부분적이므로 천인의 관계는 질적으로 규명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수양하여 정신이 大天에 융합하면 인내천에 이른다고 했다. 즉 天과 人의 공통 요소를 '정신'으로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양한묵이 '정신'을 강조한 것은 서구 근대사상의 키워드인 '이성'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수양을 통한 정신적 융합은 인간 이성의 제한없는 자기 발현이라는 근대적 이성관과 공통점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내천 교리의 바탕에는 서양의 근대적 사조인 무신론적, 합리주의적 방향이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내천 교리의 이성주의적, 무신론적 경향은 원 동학의 종교성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인내천의 철학적 논증 자체가 종교적으로 무신론으로 흐를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교리체계화 과정에서 야기된 종교성 손실을 보완하고, 天에 신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이 이후 천도교 교리의 지속적 과제로 남게 된다.
이상의 교리체계 형성은 기성종교로 전환한 천도교 운동의 필연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교단 사상의 합리성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교리의 철학적 강화를 주도한 것이 소수 지식인 집단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실제 신앙하는 민중과 분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은 서구화되고 합리화된 교리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고, 교리는 그것을 만들고 해석하는 소수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전형적인 교리의 독점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과연 암울한 시국과 비참한 삶의 지평에서 고통받던 민중에게 교리의 철학적 심화가 절박한 과제였을까. 그들은 여전히 타력적 구원, 외부적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었고 후천개벽의 종말론적 지평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의 내면화와, 신과 인간의 '정신적 합일'을 의미하는 인내천의 교리는 당시의 민중에겐 매력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을는지도 모른다. 민중종교로서의 동학의 역동성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기 보다는 엘리트적 수련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질 수 있고 또 그 체험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소수 종교 지식인만의 제도종교를 추구하는 것은 한 민족종교의 제도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4) 소결 - 제도종교화된 천도교
손병희에게 근대화는 절대적 과제였다. 손병희는 동학이 지역제한적이고 열등한 민중종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새로이 일어난 자신들의 종교를 근대적 개화운동을 통해 성장시켜 다른 제도 종교들과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태도는 제도 종교의 답습을 초래했고, 이 과정에서 모든 기성 제도종교에 반기를 들었던 최제우의 도전적 문제의식은 상실되고 말았다.
6. 결론 : 心身回水
1894년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천도교의 제도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 위상에 대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천도교는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민족주의의 제 역할을 당대에 수행했는가. 그들은 과연 민중과 함께 외세에 저항하고 봉건을 철폐하며 수운과 해월이 제시한 이상사회의 건설을 위해 노력했는가. 손병희 교단이 시도한 '제도화'와 '개화운동'은 민중의 절망과 한숨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는가. 오히려 저항적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만이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며 승산 없는 싸움에 임하고 그것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나가지 않았는가.
이러한 질문 앞에 1900년대 초입의 천도교 역사는 분명한 답변을 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천도교만의 잘못은 아니다. '일본'은 한국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매우 집요한 영향사적 의미로 남아있다. 일본의 지배력은 20세기 전반의 한국인에게는 불가항력적 위세였고,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국가 주권 회복 이후 항일의 '신화'가 형성되고 그것이 과거로 소급되어 적용되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한일합방 전까지 '소수' 친일파 - 을사오적 등 - 를 제외하고는 전 민족적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다고 신화화한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소수' 철저한 반일 세력을 제외하고는 다수가 일본의 힘 앞에 굴복했거나 이용당했다는 사실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적 사실 때문에 손병희 교단의 친일적, 비민중적 행태를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같은 시대 조건에서도, 봉건 지배체제와 무력을 동반한 외세의 협공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반응하며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학의 제도화 과정과 비슷한 시기에 태동했던 강일순의 종교운동은 손병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국제 역관계의 격동 현장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강일순 마저도 일본의 현실적 운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일순의 종교운동은 현실적 외교와 정치적 방략 속에서 민족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 민중종교성의 길을 통해 언젠가는 克日할 것이라는 비전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실의 압도적 무력감, 식민지 전야의 상황에서 민족정체성을 종교적으로 지켜나간 비극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민족주의와 종교적 철저성은 반드시 외적 합리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쩌면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역동적 사회변동을 이끌어낸 것이 민족종교로서의 동학의 근본 힘이었다. 결과적으로 손병희 이후 천도교 교단이 합법화 되고 일제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사회활동과 정치참여에 활발했지만 제도화된 천도교 안에서는 어떠한 혁세성도 발견할 수가 없다. 종교는 현실부정과 긍정의 두가지 면이 공존하는 긴장속에서 생동한다. 현실 부정이 희석화된 종교는 세속 지배이데올로기에 용해되거나 이용당한다.
손병희 중심의 개화운동과 제도화는 천도교의 제도종교화를 가져왔고, 이는 민족종교가 가졌던 역사적, 종교적 역동성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후대의 손병희 교단에 비하면 조직적, 사상적으로 매우 거칠고 신비적인 사상과 실천이었겠지만 민중은 수운의 혁세주의적 열정과 민중주의적 종교성에 보다 강하게 매료되었다. 만년의 해월, 70 노구를 이끌고 끝없는 도피를 해야만 했던 최시형 역시 그런 수운의 혁세성과 종교성의 일치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는 전국의 동학 교도들에게 어떠한 설명도 붙이지 않고 '心身回水' 네 글자를 보낸다. '몸과 마음을 水雲으로 돌이키자'. 지금 그 말을 통해 천도교의 민족종교로서의 본질과 역할,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