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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의 신비체험
-김광일,이부영의 심리학적 분석
신비체험 이해의 심리학적 방법
심리학적으로 신비체험을 확증하고 규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초월적 절대자와의 신비로운 만남인지, 아니면 정신병리학적 현상인지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신비체험은 체험자의 주관적 경험인 까닭에, 그/그녀의 구술과, 연상에만 의존해야 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그녀가 과거사의 인물일 경우, 특히, 신앙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는 신도들에 의한 신앙적 각색의 가능성으로 인해 규명이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김광일은 수운 신비체험을 분석할 때 전제해야 할 세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생활사의 자료가 사실이건 조작이건 '심리적인 사실'로 인정하는 것, 둘째, 논의하는 내용은 상대적이라는 것(새로운 자료가 발견될 시 수정되는 것), 셋째, 해석자의 관심에 따라 다른 해석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체험을 자아성장의 통합기능으로 보는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생활사의 재구성을 중시한다.
한편, 융의 '집단적 무의식' 이론에 의거하는 이부영은, 생활사로는 신비체험의 동기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Amplification의 방법을 통해 신비체험의 비합리적 요소의 상징적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즉, 수운 신비체험의 여러 상징들을 다른 유사한 상징들과 비교하여 그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다.
수운의 생활사
김광일과 이부영이 다루고 있는 수운의 생활사는 공통적으로 한 인간의 불행을 지목하고 있다. 유아시절의 생활사를 중시하는 김광일은, 유아시절 아버지의 '과보호'속에 자랐던 수운이 이후의 불행 - 어머니의 죽음(6세때), 아버지의 죽음(16세때)으로 인한 충격, 상민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출이라는 신분적 제약, 13세때 아버지에 의해 강압적으로 했던 조혼에 대한 염증,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을 수 없는 풍토, 가난 등 - 에 직면해, 내,외적 갈등을 모두 받아들여, '고통의 화살을 자신을 향해 쏘아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고통의 상황과 번뇌는, 사회의 고뇌로 확장되어 한말의 복잡한 사회상과 동일시된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수운의 노력은 기성종교 연구, 가출, 방랑, 구도 고행 등, 치열히 전개되었으나, 어떠한 희망도 얻지를 못하고 만다. 그 위기의 불안정성을 결정적으로 해소한 것은 그가 삼십대 이후에 하게 된 일련의 신비체험들이었다.
수운의 신비체험
첫 번째 체험
최제우, 32세 되던 1855년 3월에 '乙卯天書'라는 종교적 체험을 한다. 어느날 비몽사몽간에 금강산에서 왔다는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천하의 異書라는 것을 가지고 그 뜻을 아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며 책을 놓고 간다. 승려도, 책도 다 사라지고, 그 내용만이 기억에 남았는데, 그것은 49일간 기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체험
그 다음 해, 49일 기도를 한 마지막 날, 25리 밖에 있는 숙부가 임종하는 모습을 보았고, 실제 그 순간 숙부는 죽었다.
세 번째 체험
그로부터 3년 후, 36세 되던 해인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신비체험이 일어난다. 목욕재계하고 단정히 앉아 묵념할 즈음, 이동에 잇는 조카 맹운이 인마를 보내어 초청하므로 이를 거절학기가어려워 응락하고 지동에 이르렀다. 이곳에 간지 얼마 안 되어 몸이 덜리면서 심신에 이상을 느끼게 되므로 곧 용담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즉시로 다시 목욕재계하고 묵념하더니 이 때에 오히려 전보다 몸과 마음이 더울 덜리어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가 없고 말로는 표현키 어려울 즈음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천지를 진동하듯 하였다. 이에 놀래어 일어나 물은 즉 공중에서 대답하기를 "두려워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고 이르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내 또한 공이 없었으므로 너를 세상에 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니 의심말고 다시 의심말라."..."내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과 같고 도 궁의 형상을 한 것이다. 나의 이 영부를 받아 사람들의 질병을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서 사름을 가르치고 따라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네 또한 장생하여 그 덕을 천하에 펴리라"고 하였다. 동시에 휘황찬란한 빛은 어떤 힘을 지는 듯 약동하면서 움직이는 형태가 우주의 영묘불가사의한 원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무한한 허공에 뒤고 번쩍이는 빛이 가득차며 쉴 새없이 움직이는 거이 우주의 한 끝과 한 끝이 서로 맞닿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영부임을 깨닫고 눈을 뜨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얼마후 다시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네 백지를 펴서 나의 부도를 받으라."는 두 번째 지시였다. 백지를 펴본 즉 종이위에 전과 같은 모양의 그림이 비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들과 부인을 불러 백지위를 보라고 하니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수운이 미쳐버렸다고 걱정을 하였다 이 때 공중에서 다시 소리가 있기를 "그 영부를 종이에 그려 불살라 냉수에 타 먹으라"고 했다. 그대로 했더니 병이 나았다.
신비체험의 심리학적 분석
김광일의 분석
수운의 신비체험을 그의 '생활사'를 통해 해석하고자 하는 김광일은, 다음과 같은 분석 내용을 이끌어낸다.
첫째, 수운은 유아시절부터 축적되어온 불만과 갈등을 신비 체험이라고 하는 환상적 통로를 통해 해소하고, 이를 통해, 개인적 사회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존재로 승화되었다.
둘째, 종교체험을 '퇴행'의 개념으로 설명할 때, 수운의 퇴행은 일시적 퇴행으로, 곧 일시적 퇴행의 상태로 돌아가 자기 불만과 갈등을 상징적으로 해소하고, 상징적으로 원망을 성취하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수운에게 있어서 정신병과 신비체험의 구별이 가능해진다.
셋째, 프로이드의 '세계멸망의 환상'과 '세계재건의 환상'을 원용하여, 개인적 불행속에 자기 자아의 와해를 외부세계에 투사해 경험하는 세계멸망의 환상이 수운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배했다면, 장년기에는 이 번뇌의 단계를 거쳐 자기 능력을 재발견하고, 세계를 재건하는 환상속에서 자기와 세계를 구원함으로써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분석을 종합할 때, 김광일은, 수운의 종교체험은 그 자체가 오래 쌓여온 개인적,사회적 갈등의 총집약임과 동시에 그 갈등들을 해결하고자 몸부림치는 하나의 노력의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김광일의 논의는 수운의 신비체험을 개인사적 맥락에서 밝힘으로써 체험 순간만의 단절적 해석을 보완해준다.
이부영의 분석
이부영은 원형이란 한 개인의 것도, 한 특수한 민족의 것도 아닌 보편적이며 인간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수운의 신비체험은 수운의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것'(인간에게 보편적인)이다.
융은 무의식의 원형이 지니고 있는 강한 에너지를 지적하는데, 그것은 때로는 '창조적'(신비체험, 종교적 카리스마)이고, 때로는 '파괴적'(정신분열증)이다. '집단적 무의식'이란 우리 마음 '안에'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수운의 의식에 느닷없이 나타난 원형인 [상제]는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집단적무의식 이론에 따른다면, 이 외부에서 온다는 느낌은, 실은 수운 개인의 무의식 가운데, 생소하게 느껴지는 부분일 뿐이다. 곧 집단적 무의식의 심층을 구성하고 있는 원형이 창조적으로 발현한 것이다.
또한 이 집단적 무의식은 개인과 민족의 차원을 벗어나기 때문에, 이부영은, 수운이 체험한 상징들의 의미는 보편적인 인간의 상징으로 규명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우선 '太極'은, 만다라의 원과 비유될 수 있는데, 원은 '조화감'을 일으키게 하는 상이며 통일의 상징으로 모든 인간의 무의식속에 있는 원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분열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나타나 안정감을 부여하여 인격의 통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는 수운에게는 종교적으로는 동과 서의 대극을 넘어서는 전일의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부영의 분석은 보편적인 설명을 하는데는 설득력이 있으나, 수운이라는 개인과, 그의 시대상황이라는 특수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불충분한 설명을 보여준다.
토론거리
1. 수운 신비체험의 사회적 맥락은, 그 시대적 절박함이 체험 자체의 내용과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신비체험의 사회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피해가거나, 불충분하게 다루는 해석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신비체험자들의 일부는 그 체험이 외부로부터, 압도해왔다는 것, 즉, 자신은 아무런 사전노력이나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대부분 '은총'이라는 모티브에 지배당하는 경우이다. 이는 체험의 사회적 배경을 경시하게 만든다. 둘째, 이와는 달리,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느껴지는 그 체험이 실은 자신의 무의식 안에 있었던 '원형'이 등장했을 뿐이라고 하는 분석이 있는데, 이 역시,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는 적절한 관련성을 맺지 않는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불안과 안정의 상호작용만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앞의 둘보다는 상대적으로 균형을 갖춘 입장은 체험자 개인의 생활사를 짚어보는 것인데, 이는 이부영의 지적대로, 동기는 파악할 수 있게 하나,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까지는 밝히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입장으로는 신비체험의 사회적 맥락을 정확히 밝혀낼 수 없다. 그렇다면, 대안적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내용을 사회학적으로 대체하는 것 자체가 대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운이 신비체험을 하던 19세기의 사회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은 역사적 사료들이 풍부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 없다. 19세기 중반의 사회적 상황, 곧 오랜 봉건제도의 폐습으로 인한 사회 계급의 대립, 분극화, 민생고, 동요된 민심, 탐관오리의 횡포, 외세의 침략 등의 혼란상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수운의 체험 내용 안으로 들어가, 사회적 맥락을 발견하는 것을 시도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수운의 세 번째 체험에 나오는 중요한 개념인 '치병'을 들 수 있다. 신적 체험에서 치병이 전면에 내세워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질병의 만연에 대한 신적 해결을 수운이나 민중 모두가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1821년 평양에서 구토와 설사를 수반하는 괴질이 유행, 순식간에 1천여명이 죽었고, 1822년 해주에는 돌림병으로 1만여명의 사망자가 생겼고, 1833년, 순조 재위때는 5월에 돌림병이 한양에서 번져 환자가 거리에 방치되어 죽어갈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조선조 사회를 공포 속에 휘몰아쳤던 괴질은 콜레라였던 것으로 추측되지만,당시의 의약, 의술 순준으로는 고칠 수 없는 절망적인 병이었다.(박영학, 동학운동의 공시구조, 나남, 1990, pp.43-54)
곧, 당시의 인간상황중 하나는 괴질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고, 이는 단순한 의료적, 주술적 치병의 차원이 아니라, '신적 구원'의 기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운이 체험한 것은 시대 상황에 정확히 근거해서, 가장 절실한 부분이 신비적으로 부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체험의 상징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집단적 무의식'에 근거하기 보다는, 연상과 표현에 있어 드러난 수운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태극'의 생김새가 원형이니, 그것은 안정을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 기대의 반영이고, 궁궁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양으로 창조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 등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체험의 해석을 철저한 무의식의 산물로 제한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수운의 체험을 알게 된데는, 수운 자신이 그 체험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야기했던 순간은 이미 체험이 지난 뒤이고, 그 체험을 자신 안에서 기억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끝난 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하는 과정에서 수운의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부영이 융의 원형이론을 빌어 해명한 상징들은, 종교적으로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박종천은 영부도 부적이라는 점에서 무속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되, 그 이름은 선약이라고 한 것은 도교적인 것이요, 그 형상이 태극이라 한 것은 역학적이고 유교적인 것이며 또한 弓弓이라 한 것은 [정감록]에서 유래된 민중종교의 요소를 갖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박종천, "포월의 해석학", [기어가시는 하느님], 도서출판 감신, 1995, p.184,) 이처럼 상징의 '모양'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서 수운의 표현을 해석하는 것이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부 상징에서 종교혼합의 방향을 예시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의도였을까? 우리는 수운이, 당시의 기성종교는 현실의 심각한 갈등상황에 적절한 해답을 줄 수 없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수운에게는 새로운 종교(만고없는 무극대도)의 구상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각 종교의 장점을 취합하는 종교혼합을 추구한 것이, 체험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있어서 종교혼합적 표현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3. 사회적 맥락과, 수운의 의도를 규명함에도 불구하고, '초월의 체험'이라는 종교체험의 성격 또한 보존되어야 한다.
사회적 '맥락'과 체험자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이, 자칫, 체험의 종교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으로 결과되어서는 안된다. 체험의 주관적 성격상, 그것을 체험 그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일 뿐이지, 종교체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험자 자신도 체험 그대로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 인간의 종교체험 자체를 그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정신병적 징후가 아니라 창조적인 종교체험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합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아킴 바흐는 종교체험을 정의하는 기준을 네 가지로 제의했다. 첫째, '궁극적 실재'로 체험된 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것, 둘째, 궁극적 실재로 파악된 것에 대한 인간 전존재의 전체적 응답(total response)이라는 것, 셋째,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체험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이라는 것, 넷째, 종교체험은 실천적이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헌신하게 하는 명령과 규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 네가지 모두가 충족되어야 종교체험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요아킴 바흐, "종교의 보편적 요소들", 김승혜 편저, [종교학의 이해], pp.119-121)
이런 기준으로라면, 수운의 체험이 갖는 초월적 요소들 또한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은 이름이 무엇이든 초월적 존재와 '대화'를 했으며, 자신의 모든 갈등과 번뇌를 끊기위해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응답했으며, 그 체험은 모든 지식과 종교적 방편들로도 해결 할 수 없었던 고통을 일거에 끊을만큼 강렬한 체험이었으며, 체험 이후, 사회구원을 위한 과감한 활동으로 바로 나아갔다는 실천적 체험이었다는 점 등에서, 종교체험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민족종교연구(1999.10.19), 발표 : 정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