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김 회장의 질문에 지혁은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 이유까지 말해야 합니까?"
"…단지, 이럴 이유가 없으니까…."
"의심된다, 이거군요."
"… …."
김 회장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의 속내가 쉽게 일기는 것 같아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겉으로는 티 한 번 내지 않았지만.
"그럼 무르시죠."
"…뭐…라고요?"
"무르시라고요. 의심하고 계시는 분에게 그 어떤 호의도 보여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단호한 그의 태도에 아쉬운건 오히려 김 회장이었다.
단순한 웨딩드레스를 주는 게 아니었다. 산다는 것과 선물받은 의미는 차이가 컸다. 그게 기사화 되는 순간 많은 연예인들이 자신들의 의상을 선호할 것이고, 웨딩드레스 의상 협찬 뿐만 아니라 촬영 요청도 끊이질 않겠지.
그것만 해도 벌어들이는 수익이 엄청날 것이다. 거기다 서로의 관계가 선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하다는 걸 공표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니 득이면 득이었지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찝찝한 것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였다. 이럴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받기로 했던 투자금도 몇 배로 되돌려주면서까지 쳐냈는데, 그랬던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계 런웨이에 많은 투자금을 내는 BH를 쳐내도 그들은 아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굳이 우리가 아니어도 패션 업계에서 금방 발을 디디고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투자금을 몇 배를 물려주며 돌려주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온전히 패션 업계를 그들에게 내어주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의심이라뇨. 그럴리가요."
"그럼, 웨딩 드레스 초안부터 완성본까지 메일로 보내드리죠. 이번 봄 시즌에 선보이려했던 웨딩 드레스가 있으니 마침 그걸 드리면 되겠군요."
"어이쿠, 이렇게나 빨리…."
김 회장은 지혁의 속내를 떠보고 알아내는 것보다 곧 눈앞에 닥칠 큰 이득을 더 바라보기로 했다.
하나가 절대 BH와 관계 맺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사업이란 것을 딸의 얘기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웨딩 드레스를 선물해주기로 결정되니, 그 이후의 일들은 일사천리였다.
런웨이 투자 대신 웨딩드레스를 런웨이에 선보이게 해달라는 조건, 그리고 너무 BH의 스타일대로 만들면 튀어버리니 전담 디자이너를 붙여줄 것.
두 가지의 조건으로 얻는 것들이 꽤 많다는 걸 알기에 김 회장은 냉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BH의 웨딩드레스를 처음 선보이는 곳이 자신들의 런웨이라면 그건 꽤나 오랫동안 기사화되어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계약은 쉽게 마무리 되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지혁이 원했던 KM 그룹의 디자이너가 BH 전속으로 붙게 되었다.
지혁과 강산이 원하던 그 디자이너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런웨인 웨딩 드레스를 함께 작업하게 될 민다해입니다."
BH그룹의 디자인 팀 내의 분위기는 회사 내에서도 최고라고 불릴 정도였다.
물론 신상 시즌이 될 때마다 좀비마냥 흐느적 흐느적 거리며 귀신 한 무더기가 되긴 하지만 그 때마저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팀 내의 불화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힘든 사람이 힘든 사람을 위로하며 함께 작업해 나가는 게 이제는 익숙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그래서 지혁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온 민다해 라는 디자이너가 팀 내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줄 수 밖에 없을 거라고.
현재 근무하고 있는 KM과 비교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혁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끝없이 비교하고 비교하는 끝에 이곳에 오겠냐는 스카웃 제의를 듣는다면 누가 쉽게 그 말을 거절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일주일에 세 번씩 이곳으로 출퇴근 하시면 됩니다. 출근시간은 똑같이 9시이지만, 워낙 야근이 잦은 팀이니 정시퇴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사장님! 왜 겁을 주고 그러십니까!"
"겁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무서워서 도망가면 어떡하려고 그러세요~우우우."
엄지 손가락까지 아래로 내려가며 사장을 비하하는 모습에 다해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직원들과 사장의 관계는 이렇게 편하지 않았다. 사장에게 이렇게까지 편하게 장난치고 놀릴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될까.
다해는 KM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가 어려운지 머뭇거렸지만, 디자인 팀원들은 그녀가 어색해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민다해 씨라고 했죠? 그렇게 유명하던데!"
"KM에서 제일 잘 나가는 디자이너라면서요?"
"세상에 피부 좀 봐, 역시 젊은게 장땡이라니까."
웅성웅성 왁자지껄한 팀 내의 분위기 가운데, 중심에 서서 어쩌질 못하고 바동바동 대는 다해를 보며 픽 웃은 지혁은 그대로 디자인 팀을 빠져나왔다.
일이 생각보다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빠른 시일 내에 누리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은 지금 당장 달려가서 끌어안는 건데.
누리 생각에 다시금 가슴이 뻐근해지자 지혁은 애써 숨을 크게 들이 마시었다가 내쉬었다.
그런다고 가라앉을 통증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괜찮아질 것만 같아서.
사장실에 도착해 문을 연 지혁은 책상 앞에 서있는 강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저기서 왜 저러고 있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강산이 고개를 돌렸다.
한껏 굳어진 표정을 본 지혁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늘 생글생글 웃기만 했던 그였다. 이렇게나 표정을 굳히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건데.
"진정하고 들어."
"뭔데."
"우선, 병원을 좀 가야 될 것 같다."
"병원? 갑자기 무슨…."
"사모님 쓰러지셔서 병원에 실려갔대."
"…뭐?"
지혁은 지금 자신이 뭘 들은 건지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강산을 바라보았다.
누가 쓰러져?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쓰러질 일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왜?
혹시 쓰러진 게 아니고 누가 그녀를 해치려고 했던 거라면?
그의 뇌가 빠르게 굴러가며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그 중 어느것 하나 제대로 된 생각은 없었다.
당장에라도 차키를 들고 뛰어나가려는 지혁을 붙잡은 건 강산의 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나중에 해. 지금 당장 누리…."
"손은결이 옆에 있어."
"… …."
지혁의 손이 멈칫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갈 것 같았던 몸이, 천천히 강산을 향해 돌아서기 시작했다.
픽, 바람빠진 웃음을 머금은 표정과는 달리 그의 눈은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기가 흘러나와 몸을 감싸는 것만 같은 착각에 강산은 오한이 돋았지만 내뱉은 말을 수습해야 할 때였다.
"병원에 실려갈 때부터 같이 있었다고 해. 그걸 보면 둘이 뭔가 있었던 것 같아."
"이 새끼를…."
"네가 붙인 경호원들도 쓰러지는 모습만 봤다고 했어. 손은결이 물리적으로 손을 대진 않았다는 거야."
"하."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손은결을 찾아가서 잔인한 고문을 해서라도 실토하게 만들고 싶어질 테니까.
"경호원들 말로는 사모님은 처음부터 끝가지 무표정이었고, 화 한 번 안 냈다고 하더라."
"… …."
화 한 번 내지 않고 무표정으로 대응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질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설마, 손은결 때문이 아닌 진짜 병이라도 걸린 건가?
다급해진 지혁이 강산에게 키를 던지며 말했다.
"사고내고 싶진 않으니까 운전은 네가 해."
"고맙다. 사고내기 전에 맡겨줘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둘은 빠르게 엘레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누리의 얼굴을 봐야 할 때였다.
*
*
'바람난 사모님? 다른 남자와 은밀한 만남!'
'무엇이 그녀를 기절케 했는가!'
누리가 병원에 입원해 실려가고 몇 시간 뒤. 터진 기사들의 반은 악의적이었으며 반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의적인 기사에 더 열광했으며, 댓글에는 끊임없이 누리를 욕하는 글들이 달렸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오는 내내 얘기를 들은 지혁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지혁은 누리가 바람폈을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가 손은결을 만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나 그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그녀가 쓰러진 일이다. 손은결이 해치려 했던 걸까.
그랬다면 몰래 붙여놓았던 경호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경호원들의 얘기 역시 강산에게서 전해들은 것과 똑같았다.
갑작스럽게 의자에서 쓰러져 기절했고, 당황한 손은결은 누리의 의식을 확인하다 구급차를 불렀다고 했다.
왜 갑자기 쓰러진 거지?
지혁의 머리속은 온통 누리의 걱정으로 가득찼다.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들은 병실로 이동하며 엘레베이터 안에서 초조하게 있던 지혁에게 강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지금 그렇게 들어갈거야?"
"뭐?"
"너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잊었어?"
"… …."
서로가 서로에게 질려서 이혼 위기에 처해있는 부부.
그러나 지혁은 피식 웃었다. 이젠 상관 없었다. KM은 두번다시 계약을 물리지 못할 테니까.
김하나와 손은결을 처리하는 건 어렵겠지만 그 어려운 일들을 쉽게 해내기 위해서 누리와 떨어져야 하는 거라면….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차라리 옆에서 함께 손을 붙잡고 어려운 일들을 해내고 싶었다.
그녀가 옆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그렇기에 지혁은 이제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네가 마음 먹었으면 됐다. 빨리 가 봐."
"고맙다."
지혁은 누리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기억하며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그리고 병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가히 가관이었다.
"… …."
"…지혁 씨?"
"… …."
문이 열리면서 등장한 지혁으로 인해 정적에 휩쌓인 병실 안.
지혁은 그대로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바닥에 누워있는 손은결과 그 위를 점령해 멱살을 쥐고 있는 누리.
그가 생각하고 있던 그림과 많이 달랐기에 당황스러웠지만 금방 정신을 차린 그는 은결에게서 누리를 떼어냈다.
"잠깐, 이거 놔봐요."
"… …."
"콜록, 콜록."
멱살이 잡히면서 숨이 잘 안 쉬어졌던건지 급하게 숨을 들이 마쉬며 기침하는 은결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내는 누리.
"지혁 씨, 잠깐만 놔줘요."
"…그만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손은결도, 그에게 분노하는 누리의 모습도.
"이혼한다더니, 사이 정겹네?"
그 와중에 또 다시 비웃음을 짓는 은결의 모습에 눈이 돌아간 누리는 거칠게 자신을 잡고 있는 지혁의 팔을 뿌리쳤다.
퍽-
그리고 바닥에 앉아있는 그에게 무작정 주먹을 날렸다.
볼에 맞은 건지 어디에 맞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리는 자신의 손이 무척이나 얼얼하고 아팠다.
은결에게 세 번째 주먹을 날릴 때에서야 지혁이 누리를 확 잡아당겼다.
그 역시 화가 난 건지 조심스러운 손길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지혁에게 잡혀서 다시금 그의 옆에 서게 된 누리는 발버둥 쳤지만 지혁은 싸늘하게 은결을 쳐다보며 누리를 꽉 잡았다.
"놔 봐요!"
"그만하라고."
낮게 읊조리는 그의 말에 멈칫한 누리는 떨리는 눈동자로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게 자신에게 꽂히는 그의 눈동자에 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왜 나한테 그런 눈빛을….
"넌 당장 꺼져."
"후,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누리 씨를 데리고 왔는데 말이지."
"그 입을 다물게 만들어줘야 나갈건가?"
"이미 충분히 맞은 것 같은데 더 맞아야 하나?"
"두 발로 나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은결은 알겠다는 듯 두 손을 어깨 양 옆으로 들어 항복을 선언하고는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누리 씨, 내가 한 말 잘 생각해봐요."
"…나가 이 새끼야."
험악한 욕짓거리를 듣고도 기분이 좋다는 듯 은결은 해맑게 웃으며 병실을 나갔고, 그가 사라지자마자 병실은 또 다시 정적에 휩쌓였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미안해요? 아니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도 아니면 고마워요?
애초에 이런 그림은 누리의 생각에 안에 없었다. 그래, 내가 쓰러질 줄 누가 알았겠어?
쓰러진 것에 있어서는 누리도 꽤나 당황스러웠다. 설마 고작 그 정도에 쓰러질 줄이야.
지혁은 언제 그녀를 거친 손길로 잡아당겼냐는 듯 누리를 조심히 침대 위로 이끌었다.
누리 역시 조용히 그를 따랐고 침대 위에 얌전히 앉게 되고 나서야, 제대로 지혁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싸늘하게 빛나고 있는 눈을, 차마 오랫동안 마주할 수 없어 누리는 금방 시선을 내려야만 했다.
"뭐야."
"… …."
"왜 여기 있어?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해. 당장."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잔뜩 꽉 막힌 목소리였다.
누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더듬더듬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저기…. 처음에는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물론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 그 새끼… 아니. 그 자식이 지혁 씨 일로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그렇다고 그냥 거길…!"
버럭, 화를 내던 지혁은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 얘기하라는 듯 누리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한숨에 어깨를 움찔 떨던 그녀는 곧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오늘 만났어요. 별거 아닌 얘기였어요. 그냥 제안 아닌 제안이었죠. 나한테 해 끼치지 못하게 하나 언니를 막아주겠대요. 그 대신…."
"… …."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하나 언니를 만나게 해달라 했어요."
"… …."
"내가 아니라 지혁 씨가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누리 앞에서 험한 말을 쓸 수 없었던 지혁은 와락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채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쉬었다 내쉬었다.
그럼에도 울렁이며 진정되지 않는 감정들에 눈을 꼭 감았다.
"왜 쓰러진건데."
"… …."
말하면 혼날 것 같은데,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눈치를 보던 누리는 단호한 빛을 띄고 있는 그를 보고는 우울하게 말했다.
"…그냥, 밥 조금 먹고 운동을 조금 격하게 했더니 잠깐 어지러워서…."
"… …."
누리가 크게 아픈 게 아니라는 걸 그녀의 입으로 확인 받자마자 술렁이던 마음과 가슴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내가 네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미안해요."
"혹시 내 걱정을 사고 싶어서 일부로 이러나?"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날이 선 그의 목소리에 누리는 번쩍 고개를 들고 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싸늘하던 그의 눈은 어느덧 아픔으로 젖어있었으니까.
"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해서 온갖 생각을 다 했어. 너랑 닿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 …."
"내가 어떻게…."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던 아까 전의 모습이 떠올라 목구멍이 뜨거웠다.
"미안해요."
누리는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손을 뻗었지만 지혁은 그 손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의 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이게…뭐야?
적잖게 당황한 누리는 방금 전, 자신의 손길을 피한 그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나한테 화난 걸까. 내가 너무 잘못해서? 그래도 나를 좋아하면서.
그가 여전히 나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손길을 피하는 일이 상처가 되지 않을리는 없었다.
그러나 누리는 얌전히, 앉아 있었다. 자신의 소식을 듣고 잔뜩 힘들어 했을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 거려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해 이제."
"… …."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누리는 되묻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닐테니까. 나를 놔줄리가 없으니까.
"이딴 짓 그만하자고."
"… …."
"못하겠어 이제. 누리야, 못하겠어."
잔뜩 무너진 지혁이 침대위로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대었다.
그 작은 손에 얼굴을 묻은 지혁의 말에는 물기가 잔뜩 어려있었다.
"그만하자. 나 너무 힘들다."
힘들다고 고백하는 그의 말이, 누리에게는 너무나도 아픈 가시가 되어 날아왔다.
내가 이혼한 척 하자고만 안 했으면, 이 사람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내가…, 내가 조금 더 잘 했으면….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서러움과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외로움들이 밀려오면서 차오르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누리가 유독 조용하다는 걸 눈치챈 지혁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고, 소리 없이 엉엉 울고 있는 누리를 보며 꽈악 끌어안았다.
"미안. 미안해."
"왜, 왜 사과 해요? 지혁 씨가 뭘 잘못했다고…."
"너 울려서 미안해. 그만하자.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나 때문, 흐윽. 나 때문에…,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힘들게 하려고, 흡.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울면서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입에 길게 입을 맞춘 지혁은 코끝이 맞닿는 거리에서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첫댓글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현실의
상황때문에 가짜로 이혼의 모습을 연기해야 햇던이들의
모습이 짜안하게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