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살벌했던 부부 싸움. 그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싸웠는가?'
그 날 이후, 누리와 지혁은 평소의 생활로 돌아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행복한 생활이었다.
어떻게 이 사람을 옆에 두지 않고 혼자 살았었나 싶을 정도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지혁 씨."
"어. 왔어?"
어김없이 지혁의 사무실을 찾아온 누리.
누리가 도시락을 들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오는 건 이제 그녀의 일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들락날락 거리며 함께 점심을 먹고 뭘 하는지 한참동안이나 사무실에서 나오지 않다가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지혁과 함께 퇴근하곤 했다.
그러는 날들이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회사 안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회사 사무실에서 뭘 해?"
"네가 생각하는 그거."
"하. 어이가 없네. 그래서, 그 소문이 지금…"
"어. 회사 내에서 계속 돌고 있어."
지혁은 헛웃음을 지었고 누리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음…, 야한 소문이 회사 내에서 돌 수 있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은 누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고 지혁은 여전히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만 계속 짓고 있었다.
"소문을 수습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가?"
"그렇진 않아."
"그럼 그걸 얘기하는 이유가 뭐야?"
"민다해 씨가 부러워하더라고."
"…뭘 해?"
"부러워 한다고."
"그건 또 무슨…."
대체 이걸 왜 부러워하나.
지혁은 이젠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해서 웃을 판이었다.
대체 뭐가 부러운 건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아니 어느 부분이 부렵다는 걸까.
"뭘 부러워 하는데? 뭐, 회사 내에서 관계 맺는 걸?"
"미친놈. 생각을 해도 꼭 그렇게…."
"네가 지금 그렇게 얘기했잖아."
"그게 아니라, 너랑 네 남편 사이가 좋은 걸 부러워 한다고."
"근데."
"근데 그것도 그거지만…. 아무래도 회사 내의 분위기가 달라서 부러운 모양이야."
"… …."
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해하지 못했으니 자세하게 설명하라는 그의 눈길에 그는 피식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KM과는 사뭇다른 회사 분위기를 이미 같이 프로젝트 진행하는 디자인 팀의 사람들 몇몇에게 얘기해서 전해들은 강산.
듣기로는 KM은 딱딱하고 사무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굳어진 느낌의 회사라고 했다.
일하기 어렵고 힘들고 어딘가 모르게 정말 일만으로 엮여져 굳어지고 굳어진 관계 같다고.
그래서 회사 내의 소문 역시 KM의 김 회장은 철저히 관리했다. 그 덕분에 직원들 역시 쉽사리 강 회장과 그의 아내에 대해 입에 오르내리락 할 수 없었다.
설사 누군가가 했더라도 강 회장은 그 누군가를 찾아내어 입단속을 무섭게 시킨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다해에게, 이렇게나 낯간지러운 소문이 회사 내에 퍼져 서로가 웃으며 농담 던지듯 얘기하는 분위기가 내심 부럽다고 했었다.
"우리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군."
"다해 씨도 성격이 꽤 많이 밝아졌어. 이젠 곧잘 웃고 다니더라고."
처음 만났을 때의 우중충한 표정은 거의 없어졌다고 얘기하는 강산을 보던 누리는 지혁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잘 됐다. 그쵸?"
"응. 처음엔 좀 적응 못하나 싶었는데 다행이네."
런웨이 프로젝트는 최소 반년은 넘게 잡아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그 반년 중 한 달은 KM의 투자금 반환으로 인해 싸웠고, 또 한 달은 누리와의 가짜 이혼 생활이라는 뻘짓을 하며 날렸다.
그 후 다시 누리와 살기 시작하면서 지난 3주. 다해는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을 BH에서 보낸 것이다.
그 사이 그녀 스스로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디자인 팀도 의욕에 불타 허구한날 야근을 한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지혁 씨, 오늘만큼은 쉬라고 한 번 저녁 사주고 오는 게 어때요?"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기는 무슨. 그 팀 먹는 건 얼마나 먹는지 알아? 술고래들보다 무서운 게 뭔 줄 아냐?"
"뭔데?"
"안주킬러들."
강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팀의 팀원들이 죄다 안주 킬러들이라고 유명해.' 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그 분들이 맛있게 잘 먹으면 됐죠 뭐."
"디자인 팀 아직 있나?"
"오늘도 야근이라고 팀장한테 전해듣긴 했어. 지금 쯤이면 저녁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내려가자."
"오~ 진짜 사주는 거냐?"
"그럼, 네 카드로 살래?"
"반지혁 이제 사모님 말에 끔뻑 죽네 죽어."
"너 지갑 어딨냐?"
"엘레베이터 왔다 내려가자!"
냅다 엘레베이터로 도망가는 강산을 째려보며 지혁은 누리의 손을 단단하게 그러쥐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행복하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또?"
"아니, 사모님 좀 살 찌신 것 같…."
"입 닫아."
"…나 살쪘어요?"
누리의 표정이 금세 우울함으로 물들었다.
"안 쪘어."
"네 조금."
엇갈린 대답에 울상까지 지은 누리는 강산과 지혁을 번갈아 째려보다가 엘레베이터가 층에 멈추자마자 디자인 팀으로 도도도, 걸어갔다.
흥, 하며 지혁의 손을 놓는 건 덤이었다.
"어디가, 손은 잡고 가야지."
"미친…."
뒤늦게 들려오는 말에 강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지혁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누리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저런 말을 저런 표정으로 하니까 적응 안 되네.
디자인 팀에 먼저 들어온 누리는 사무실 안에 긴 반원탁에 앉아 진지하게 얘기하다 말고 자신에게 인사하는 팀원들에게 밝게 웃었다.
"어이쿠, 사모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와, 사모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십니까!"
각각의 인사소리를 뒤로 하고 누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회의하고 있었나요?"
"아,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저녁 뭐 먹을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녁까지도 원탁에 둘러앉아 진지하게 얘기하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진 누리는 설핏 웃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뒤따라 들어온 지혁은 잡았다는 듯 누리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익숙한 스킨십에 놀란 누리는 빨리 손 놓으라는 듯 그의 팔을 툭툭 때렸지만 그는 어림 없다는 듯 더 꽉 그러쥐기만 했다.
"우우~ 사장님 여기 지금 애인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와이프가 보고 싶어지네요."
"나니까 누리만한 와이프 얻은 겁니다."
"뭐래 진짜!"
누리는 입 좀 다물라는 듯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홱 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식 얘기 꺼내지도 않는 거였는데.
지혁은 날이 갈수록 더 능청스러워졌고, 장소가 어디든 누가 같이 있는 그의 스킨십은 나날이 진해져만 갔다.
처음 만났던 딱딱하고 무뚝뚝했던 지혁은 어디갔는지, 이젠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장님 이렇게 저희 마음에 불을 지르려고 오신 겁니까!"
팀장은 자신도 와이프 데리고 출근하게 해달라며 우는 소리를 했고 다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중간중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지혁과 사원들 사이에서 말을 주고받던 누리는 그 모습을 세세히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사진으로만 봤을 때에는 우중충하고 어두운 면이 없지않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어딘가 헬쓱해 보였던 안색도 지금은 훨씬 좋아진 듯 했다.
"런웨이 웨딩 건으로 매일 야근하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아아, 예. 회의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KM과 BH의 디자인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맞춰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꽤 오래걸리네요."
언제 왁자지껄 떠들었냐는 듯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깔깔 웃으며 장난을 걸던 사원들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오늘 쉬시라고 저녁을 사드릴까 하는데. 다들 바쁘시면…."
"오늘 일은 다 접죠 팀장님."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또 접어줘야지. 자 모두 저녁 먹으러 퇴근 하자고!"
무서운 얼굴로 빨리 퇴근하라고 하자마자 모든 짐을 싸고 지혁 앞으로 집합한 사원들을 보며 누리는 또 키득키득 거렸다.
어쩐지 유치원생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뭘 사줄지 기대하는 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라.
다해는 채 자신의 자리로 움직이기도 전에 지혁의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을 보며 당황해 했다.
그런 그녀에게로 종종종 걸어간 누리는 반갑게 웃으며 손을 건넸다.
"우리는 초면이죠? 반가워요, 한누리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지혁 씨 와이프되는 사람입니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민다해라고 합니다."
다해는 허둥지둥 그녀의 손을 마주잡고 악수하며 꾸벅 인사했다.
"짐 챙기는 거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금방 챙겨 나오겠습니다."
딱딱한 대답에 누리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표정으로는 그저 온화하게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다해가 짐을 챙기고 오자 누리는 지혁을 쳐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제서야 지혁은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다해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뭐 먹고 싶어?"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에요?"
자연스럽게 메뉴 선정을 누리에게로 건네버린 지혁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했다. 자신은 누리가 먹고 싶은 걸 사주고 싶었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디자인 팀 회식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사장님. 보통 그런 건 저희에게 물어봐 주지 않으시나요?"
팀장의 볼맨 소리에 지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언제 그랬던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이것 참…."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팀장은 머쓱해 하다가 누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제발 맛있는 것들을 고르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고기! 한우! 소고기!
그들의 마음속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누리는 짧게 고민하는 척 했다.
"음…."
"없어?"
"글쎄요…, 다해 씨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네, 네? 저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해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시선을 어느 한 곳에 두지 못한 채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누리는 한 걸음 물러나며 미안하다는 듯 손을 올렸다.
"어, 미안해요.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아요?"
누리는 가방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해에게 건넸고 다해는 창백한 얼굴로 손수건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이 상태로 뭘 먹으러 갔다가는 체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KM 내외 사람들에게 꽤나 시달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리를 이렇게나 어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생각보다 더 심하게 힘들어 하는 모습에 누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혁 씨, 우리는 따로 먹어요."
"아, 아니 저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내가 제일 원하던 말이네."
"… …."
다해는 식겁하며 두 손을 가로저었지만 지혁은 그런 다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누리를 꼭 끌어안으며 웃음이 잔뜩 묻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게 어찌나 오글거리는지 뒤에 있던 사원들은 닭털이 날린다며 손발을 베베 꼬고 팔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해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서야 한 결 다해의 표정이 나아보이자 누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식은땀을 흘렸던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함께 저녁을 먹지 않는 게 답인 듯 했다.
"그럼 팀장님, 드시고 싶으신 곳으로 가서 마음껏 드시고 이 카드로 계산하십시오."
"사장님, 혹시 법인카드입니까."
"제 개인 카드입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법인 카드가 아니라는 말에 사원들은 휘파람을 불며 신나했고 다해는 어린애 같은 그들의 모습에 또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빤히 바라보던 누리는 지혁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우리도 가요 지혁 씨."
"그래."
"전 디자인 팀과 함께 회식 후에 들어가보겠습니다."
이미 그럴거라 생각했던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팀장은 팀원들을 모두 챙겨 데리고 나갔다.
다해도 뒤늦게 지혁과 누리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다가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졸졸 팀원들을 뒤따라 나갔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 들리지 않고 나서야 그들의 표정은 한껏 굳어졌다.
"…집에 갈까?"
"네."
같은 표정을 한 채 그들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또 하나의 실마리를 잡았으니, 이제 그 실이 썩은 실인지, 금실인지 확인해야 할 때였다.
첫댓글 경직된 분위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러움속에서 직장생활을 하는사람들 역시 분위기는 자연스러워야 생화하는데 활력이 생기는것같네요 ^^~
재미있게 잘보구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