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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커플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간 날 본 집안 인테리어가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의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거실과 현관을 분리하게끔 오른쪽에 세워진 가슴 높이의 원목 책장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비스듬하게 책장 위로 옮겨 맞은편 벽을 보니, 더 큰 책장이 한쪽 벽면을 온전히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기성품이 아니라 치수에 맞추어 제작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림잡아도 족히 수백 권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나는 선물로 가져온 와인을 주인에게 건네주고 자연스럽게 큰 책장으로 다가갔다.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흘러왔고 나는 기분이 좋아져 손으로 냄새의 근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나뭇결에서 느껴지는 조금 투박한 감촉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벽 책장의 옆면은 베란다로 이어지는 통유리 창이었다. 유리창은 두 원목 책장과 잘 어울리는 은은한 느낌의 옅은 갈색 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벽 책장의 맞은편에는 두 사람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짙은 빨간색이었다. 소파 자체만 보면 팔걸이와 다리가 고동색의 원목으로 되어 있어 빨간색 가죽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실의 원목 책장과 커튼 그리고 하얀 벽지와의 조화를 생각할 때 빨간색 소파는 도발적인 색깔이었다. 소파와 작은 책장 사이에는 내 키 높이의 검정색 스탠드 전등이 세워져 있었다. 소파에 앉으니 시선이 낮아지며 시야에서 빨간색이 사라지고 책들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나는 볕이 잘 드는 어느 카페에 앉아 책을 읽을 때의 포근함과 여유로움을 느꼈다. 주인 커플이 스탠드에 불을 켜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것을 잠깐 상상했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함께 책을 읽겠지.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해서 함께 토론을 할 거야. 때로는 서로의 생각이 달라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날 밤 침실에서 사랑을 속삭인 뒤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함께 아침을 먹겠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나에게 이 집 거실의 인테리어는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혼기가 꽉 찬 미혼의 여자가 완벽한 결혼을 상상하는 일은 해도 해도 부족한 법이니까.
내가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커플은 주방에서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손을 거들 겸 주방으로 갔는데, 남자분이 초대받은 다른 사람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하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식탁 위에는 벌써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의 양쪽으로 파스타와 샐러드가 각각 보였고, 가운데에는 큰 접시에 담긴 불고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남자분이 자리에 먼저 앉으라며 의자 한 개를 뒤로 빼주었다. 곧 내가 사온 와인을 따서 내 앞에 있는 잔에 채워주었다.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다른 손님이 온 것이다. 막바지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가 손이 바빠서 남자가 현관으로 나가 손님을 맞이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 사람이 주방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남자분의 뒤를 따라 주방에 나타났고, 그는 나를 보자 이 커플의 오랜 친구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이름을 말하며 간략하게 내 소개를 했더니, 나에 대해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는 눈치였다. 키 큰 남자는 사온 케이크를 여자분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 앉아 각자의 잔에 와인을 채운 뒤, 건배를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3년 전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가족과 직장에 실연의 상처를 극복한다는 핑계를 대며 추석 연휴에 여행을 떠났다. 당시 미국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에 심취해 있던 때라 여행지는 뉴욕으로 정했다. 꽤나 즉흥적으로 결정한 여행이었던 터라 뉴욕 왕복 비행기 표를 싼 값에 구하기는 어려웠다. 미국 동부 여행 책을 살펴보던 나는 필라델피아가 뉴욕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필라델피아 왕복 비행기 표가 더 싸다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표를 사버렸다. 멀리까지 가는데 뉴욕만 보고 오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나는 필라델피아의 어느 카페에서 이 커플을 만난 것이다. 여행 책자에 안내된 필라델피아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 중에 이 카페가 있었다. 최고의 커피 맛을 자랑하며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여행 책자의 지도에 표시된 그 카페를 찾아 길을 나섰다. 가을 아침 날씨는 맑았지만 한국과 비슷할 정도로 선선했다. 낯선 외국 도시에서 내딛는 내 발걸음은 어느덧 시차로 인한 몽롱함을 잊어버릴 정도로 경쾌해졌다. 고층 건물 사이로 보이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상쾌함을 더해 줬다. 책자의 안내대로 월넛스트릿을 따라 걷다보니 리튼하우스 스퀘어 가든이라는 공원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다시 북쪽 길로 접어들자 왼편으로 책에 나온 카페를 찾았다. 토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담한 카페 안은 현지인들로 제법 북적였다. 주문을 하기 위해 서너 명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고 줄의 맨 끝에 섰다. 곧 내 차례가 되자, 더듬거리는 영어로 커피 한 잔과 크림치즈 베이글을 주문했다. 필라델피아에 가면 크림치즈를 한번 맛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돈을 건네고 커피와 베이글을 받은 뒤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빈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여행 책자를 뒤적거리며 베이글을 한 입 먹었다. 한국에서 먹던 크림치즈 베이글 맛과 크게 다른 것을 모르겠다. 이번엔 커피를 들어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갔다. 책자에 적힌 대로 커피 맛은 좋았다. 진하면서 약간의 시큼함이 느껴지는 뜨거운 커피가 서늘한 아침 기운을 몰아내는 것 같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혼자서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년의 남자나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젊은 남녀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한번 불고 잔을 다시 입에 갖다 대었을 때, 카페 안으로 들어온 한 젊은 동양인 커플을 보았다. 왠지 삼십대 초반의 내 또래 한국인처럼 보이는 이 커플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커플 중 남자는 짙은 베이지색 면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고, 검정색 테의 안경을 쓰고, 적당히 뒤로 빗어 넘긴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스키니진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에서 엿보이는 자연스러움은 그들이 나와 같은 여행객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점원은 커플을 보자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억양으로 반갑게 인사를 했고, 커플 또한 점원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들은 유창한 영어로 커피 두 잔과 크로와상 두 개를 주문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커플 중에 남자가 음료를 받아가는 카운터 옆에 놓인 우유병을 들어 커피 잔에 조금씩 부었다. 여자는 옆에 서서 크로와상이 담긴 접시를 든 채 두리번거리며 빈 테이블을 찾았다. 이윽고 그들은 내 옆자리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남자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앞에 커피 잔을 놓았다.
“그러게, 지난주보다 많아진 것 같은데?”
여자가 대꾸를 하며 큼지막한 크로와상 두 개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한 가운데에 놓았다. 둘은 접시 위의 포크를 들어 크로와상을 찍은 뒤 입으로 가져갔다. 때때로 커피를 마시며 한국말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둘의 얘기를 엿들으니, 이 커플은 여행객이 아니라는 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라고 소개를 하니, 그들은 내가 말을 건 것에 대해 대단히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자신들은 유학생이며 필라델피아에 산 지 5년 째 라고 했고, 집에서 가까운 이 카페에는 커피 맛이 좋아 자주 온다고 했다. 특히 토요일에는 이곳에서 아침으로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고 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자리를 거실로 옮겼다. 커플 중 남자분이 소파 밑에 있는 접이식 테이블을 꺼내어 펴고, 키 큰 남자가 사온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와 키 큰 남자 손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커플은 식탁에서 의자를 가져와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키 큰 남자는 자신이 사온 케이크를 꺼내어 자르기 시작했다. 커플 중 여자는 할 일이 생각난 듯이 주방으로 갔고, 남자는 내가 앉은 소파 옆에 있는 스탠드 전등을 켠 뒤 거실 천장에 있는 형광등을 껐다. 스탠드의 백열전구는 거실 천장을 향했고 옆으로 삐져나온 빛만이 은은하게 거실을 밝혔다. 맞은편 책장의 책들이 새롭게 연회색 빛을 입어 거실 분위기를 더 아늑하게 만들었다. 소파의 색깔도 검붉은 피를 연상시키는 암적색으로 변하며 주변의 어두워진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소파의 색깔은 애초에 스탠드 전등만 켜는 것을 생각하고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렇게 하면 분위기가 조금 살거든요.”
남자분이 웃으며 말했다. 줄어든 빛으로 인해 얼굴에 음영이 생기면서 표정의 변화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미국에 살 때는 아파트 천장에 등이 없어서 스탠드 전등을 써야만 했어요. 처음에는 어두워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차츰 그 어두운 분위기에 익숙해지니 한국에 와서도 그립더군요. 그래서 스탠드 전등을 사서 종종 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남자분이 말하는 사이, 여자분이 커피 넉 잔을 내왔다.
“이 커피 맛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어요. 그때 필라델피아에 오셨을 때 저희를 처음 만난 그 카페에서 사온 커피에요.”
여자분이 나에게 커피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 커피 맛이 그리울 것 같아서, 귀국할 때 잔뜩 사왔거든요.”
남자분이 덧붙여 말했다. 나는 커피가 가득한 잔들이 탁자 위에 놓일 때부터 이미 향을 통해 그때 그 커피 맛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맛있어요. 정말 그때 그 커피 맛 같아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이따가 가실 때 거기서 사온 커피백 하나 드릴게요.”
여자분이 말했다.
“나는 안 주는 거야? 이거 섭섭한데. 올드 프렌드는 안 챙기고, 이제 뉴 프렌드만 챙기는 거야?”
내 옆에 앉아 있던 키 큰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어 말했다.
“알았어, 너도 갈 때 하나 줄게.”
여자분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내가 이 커피 맛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나도 그 카페에서 커피백을 한 개 사와서 한국에서도 한 동안 마셨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커피 잔을 들었을 때, 어딘가에서 조용한 음악이 시작되었다. 음악의 근원지는 벽 책장의 좌우 상단에 있는 조그마한 스피커였는데, 남자분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음악을 선택한 것 같았다. 느린 재즈풍의 피아노 연주가 귓가에 감겨왔다. 우리가 잠시 조용한 사이 정적은 음악으로 채워지며 공간에 커피 향을 흩뿌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테이블을 거의 내 쪽으로 붙여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다음날 뉴욕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말하니, 하루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가볼만한 곳들을 추천해줬다. 주로 본인들이 좋아하는 가게들을 소개해주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카페 밖에 있는 리튼하우스 스퀘어 가든 맞은편으로 가면 필라델피아에서 꽤 유명한 베이커리가 있는데, 요즘 철에 나오는 펌킨 머핀은 꼭 먹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여기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가면 도넛과 치킨을 같이 파는 가게가 있는데 치킨은 너무 짜서 별로지만 도넛만큼은 정말 맛이 좋으니 먹어보라고 했다. 그 밖에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피자 가게 등을 추천해 주었다. 모두 여행 책자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생한 정보들이었다. 나는 카페를 나서면 여행 책자에 소개된 대로 영화 ‘록키’ 의 촬영지로 유명한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계단이나, 미국 독립의 상징물인 자유의 종 따위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 본 영화 록키는 기억도 나지 않았고, 내가 언제부터 미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는지 되물으며, 이 커플이 추천해준 유명한 가게들을 하나씩 둘러보기로 생각을 고쳤다.
“버거 집은요? 여기 책자에 보면 필리 치즈스테이크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생긴 게 꼭 버거 비슷하게 생겼더라고요.”
나는 미국에 왔으니, 유명한 버거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궁금해 하며 물었다.
“필리 치즈스테이크는 시내에도 파는 곳이 많이 있는데, 정작 맛있는 집은 시내에는 없어요. 조금 멀리 가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시내에 정말 맛있는 버거 집이 한 군데 있어요.”
남자가 답했다.
“이따가 저녁 때 저희도 오랜만에 거기에 갈까 했는데,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희랑 같이 가셔도 돼요. 그 집은 버거 안에 들어가는 고기를 훈연해서 스모키한 맛과 향이 정말 좋거든요.”
여자가 덧붙여서 말했다. 나는 즉석에서 좋다고 말하며 지도에 식당 위치를 표시해달라는 뜻으로 여자에게 지도와 펜을 건넸다. 처량하게 혼자 버거를 먹고 있는 상상을 더 이상 안 해도 돼서 안심이 되었다. 저녁 7시에 그 버거집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그 후로 그들이 추천해준 가게들을 하나씩 찾아 나서며 시간을 보냈다. 가까운 베이커리를 시작으로 도넛 가게, 피자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는데 모두 아담하면서 개성 있는 분위기를 뽐내는 가게들이었다. 다른 음식들도 전부 내 취향에 잘 맞았는데, 그중 적당히 달착지근하면서 느끼하지 않은 머핀을 파는 그 베이커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들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피넛버터 아이스크림콘을 하나 사먹으며 문득 이런 가게들을 지척에 두고 있는 그 커플이 부러웠다.
“거실에 책들이 참 많아요. 두 분 모두 책 읽는 것을 좋아하시나 봐요.”
내가 옆에 있는 작은 책장에 손을 스치며 말했다.
“네, 저보다 철민씨가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해요. 여기 있는 책들은 거의 철민씨가 산 것들이에요. 저는 이 중에 철민씨가 추천하는 것들만 읽는 편이구요.”
여자분이 말했다. 이에 남자는 자기는 책 읽는 거 빼면 별로 좋아하는 일이 없다며 따분한 남자라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겸손해 했다.
“책장은 벽에 꼭 맞는데, 맞춤 제작하신 거죠?”
나는 거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책장은 여기 이 친구가 만들어준 거예요. 우리 귀국 선물로.”
남자분이 내 옆에 앉아 있는 키 큰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이 친구가 재료비밖에 안줘서, 제가 대충 만들어준 겁니다. 하하.”
키 큰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남자분은 오랜 친구가 가구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서 특별히 부탁을 했다고 했다.
“일류 가구 디자이너를 고작 이런 책장 만드는데 쓰다니, 인력 낭비야.”
키 큰 남자가 친구를 향해 말했다.
“그럼 이 소파는요? 지금 이 분위기랑 색깔이 참 잘 어울리는데.”
나는 앉아 있는 소파를 만지며 말했다.
“그건 저희 회사 신상품 카탈로그를 보더니 이 친구들이 저한테 직원 할인가로 사달라고 해서…”
키 큰 남자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철민이가 전화가 와서 어떻게 안 되겠냐고 그러더니, 다음날 민주까지 전화가 와서 부탁을 하는데… 아무튼 두 사람이 쌍으로 친구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현정씨도 이 친구들이랑 가까이 하지 마요. 위험 종자들이야, 아무튼.”
“뭐, 친구를 잘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죠.”
내가 웃으며 답했다. 이제 막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한국에 자리를 잡았는데, 학생이 무슨 돈을 모았겠냐며 커플이 혀를 빼죽 내밀며 변명을 했다.
“앞으로 자주 놀러와. 대신 맛있는 밥으로 보답할게.”
여자분이 말했다.
“그래, 너 혼자 저녁밥 먹기 싫을 때마다 놀러 와라.”
남자분이 옆에서 거들었다. 나는 이들이 티격태격하며 대화하는 것을 한동안 재미있게 지켜보면서 때로는 이쪽 편을, 때로는 저쪽 편을 들며 끼어들었다. 그날 자리는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한나절이 넘게 필라델피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산 것들을 놓기 위해 숙소에 들렀다. 사실은 그것보다 오랜만에 많이 걷느라 지친 다리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눈이 감기며 깜빡 잠들 뻔 했지만, 찬물로 세수를 하고 한번 꾹 참고 나니 다시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약속시간 전에 식당에 도착하기 위해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섰다. 조금 쉬고 나니 무거웠던 발걸음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식당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커플을 만났다. 남자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인사한 뒤, 자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보던 여느 패밀리 레스토랑과 같은 버거 집을 상상했으나, 막상 식당 안을 보니 고급 레스토랑처럼 보였다. 은은한 밝기의 조명들이 벽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빛을 내고 있었고, 테이블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서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흰색 유니폼과 검정색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남자가 한 웨이트리스에게 일행이 왔다고 말을 하자, 그녀는 우리를 창가 옆의 빈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네 개의 포크와 나이프 세트가 놓여 있었다. 커플이 나란히 앉았고, 나는 여자의 앞자리에 앉았다. 웨이트리스는 우리들 각자에게 준비한 메뉴판을 주고 내 옆자리에 있던 포크 나이프 세트를 들고 갔다.
“많이 둘러 보셨어요?”
커플 중에 여자가 먼저 물었다.
“네, 덕분에 잘 둘러봤습니다. 추천해주신 가게들 모두 다 마음에 들고, 또 음식들이 너무 맛있었어요. 머핀이랑 도넛이랑 피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오늘 버거를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들뜬 기분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 버거는 다 드실 수 있을걸요? 정말 맛있거든요.”
남자가 말했다.
나는 커플에게 메뉴 추천을 받아 클래식 버거를 시켰다. 커플은 클래식 버거와 치즈 버거를 하나씩 시키고, 우리는 모두 음료로 맥주를 시켰다. 웨이트리스가 먼저 맥주를 가져왔다. 우리는
“반갑습니다.”
하고 건배를 하며, 한 모금씩 마셨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우리는 내가 찾아 갔던 가게들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했다. 베이커리는 가을철에만 나오는 계절 빵에 대해서 얘기를 했고, 아이스크림 가게는 맛의 종류에 대해서 얘기했으며, 피자 가게는 그 집 화덕의 모양에 대해서 얘기했다. 어느덧 나는 개성 있는 가게들로 가득한 곳에서 살고 있는 두 분이 부럽다는 말을 말끝마다 붙이고 있었다. 커플이 별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사이 주문한 버거가 나왔다. 커다란 접시위에는 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길게 잘라진 오이 피클이 함께 담겨있었다. 버거 속의 고기가 너무 두툼해서 고기위의 빵이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나는 커플이 포크로 버거의 가운데를 아래까지 찍어 누르고, 나이프로 버거의 반을 자르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 커플은 잘라진 버거의 반쪽을 서로의 접시에 옮겨 담았다. 나는 잘라진 내 버거 사이로 흘러나온 검붉은 육즙을 보았다. 야채들도 옆으로 삐져나왔지만, 나는 손으로 적당히 정리를 하고 잘라진 버거 반쪽을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한국에서 맛보던 버거들과 달리 풍미가 깊은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자가 아침에 말한 대로 훈연된 고기의 맛과 향이 입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나는 충분히 씹으며 맛을 음미한 뒤, 맥주와 함께 목으로 넘겼다. 커플에게 정말 맛있다며 웃음을 내비치었고 커플도 나를 따라 같이 웃었다. 나중엔 맥주를 한 잔씩 더 시켰는데 취한 탓인지 훌륭한 음식 맛 때문인지 아니면 식당의 분위기 때문인지 대화의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었다. 나는 어차피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되었다. 남자친구와 소개팅으로 만나서 3년간 사귀고 결혼까지 약속했는데 갑자기 이별을 통보해 와서 알고 보니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게 내 얘기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맞장구를 쳐주며 듣고 있던 커플은 나를 위로하며, 자신들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서울에 있는 한 명문대를 졸업한 그들은 1년의 간격을 두고 이곳에 유학을 와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대학을 다니고도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가 타국에 나와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며 인연은 따로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갈 무렵, 우리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한 젊은 백인 커플이 내 앞의 커플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자들끼리는 서로 안고 뺨을 맞대는 서양식 인사를 했고, 남자들끼리는 서로 악수를 했다. 언뜻 들리는 바로는 자기들은 식사를 다하고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합석을 할 걸 그랬다는 말을 한 것 같았다. 내 앞의 커플은 미국인 커플에게 나를 한국에서 온 게스트라고 소개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며 한국식으로 인사를 하고 말았다. 미국인 커플 중 남자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미국에 온 걸 환영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땡큐’ 하고 답했다. 우리도 곧 식사와 대화를 마쳤다. 커플은 나에게 즐거운 여행을 빌어주는 의미로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며 내 몫까지 돈을 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는 식당 앞에서 헤어졌고, 나는 곧장 숙소로 돌아와서 다음 날 오전에 뉴욕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내가 그 커플을 다시 만난 것은 필라델피아에 다녀온 지 거의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하루하루 기록적인 폭염으로 텔레비전을 비롯한 온 나라가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8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 선배가 시켜주는 소개팅을 하게 되어 강남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먼저 도착한 나는 구석진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땀을 식히며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창밖에 오가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있는 사이 한 남자가 내 자리에 나타났다.
“김현정씨… 맞으시죠?”
라고 말하는 남자를 나는 앉은 채로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사진보다 더 통통해 보였다.
“네, 맞아요.”
라고 나는 짧게 답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오겠다며 뒤를 돌아설 때 남자의 허리 벨트 위로 살짝 삐져나온 뱃살이 보였다. 남자가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올 때부터 내가 저녁 약속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뜰 때까지 지루한 두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남자에게 즐거웠고, 잘 돌아가시라는 말을 인사치레로 하고 카페를 나왔다. 낮 동안에 받은 더운 기운이 아직 길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남아 있는 햇빛을 피해 그늘 길을 찾아다니다가 전철역을 향해 꺾어지는 길 모서리를 돌 때, 창 안쪽에서 나는 그 커플을 보았다. 커플은 모퉁이의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무척 반가운 마음에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앉은 자리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내가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둘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어, 안녕하세요. 어떻게 여기에…”
남자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말을 했다.
“한국에 언제 들어오셨어요? 와, 이렇게 만나다니 되게 신기하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지난달에 아예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둘이 같이 학교 졸업하고 한국에 취직해서 돌아왔거든요.”
이번엔 여자가 말했다.
“와, 이제 둘 다 박사님 되신 거예요? 너무 축하드려요.”
나는 커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자와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혹시 제가 귀국 기념으로 저녁 한번 사고 싶은데 지금 시간 어떠세요? 그때 필라델피아에서 제가 얻어먹은 것도 있고요. 덕분에 여행도 잘하고 돌아왔는데…”
내가 커플에게 즉석에서 제안을 했다. 커플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뜻밖에 저녁 약속이 잡히면서 나는 소개팅 한 남자에게 한 거짓말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근처의 냉면집이었다. 내가 더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으나, 커플은 굳이 냉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필라델피아에도 한국 식당들이 몇 개 있는데, 냉면을 파는 곳이 없었거든요.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냉면이 먹고 싶네요.”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냉면집 안은 시원했다. 우리는 구석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물냉면을, 커플은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각각 하나씩 주문했다. 나는 추가로 만두 한 접시를 주문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서로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때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한두 번 연락이 왔지만 다시 만나지는 않고 아직 솔로인 상태라고 말했다.
“몇 다리 건너 친구를 통해 알아보니까, 글쎄 그 자식이 저 몰래 바람피운 여자랑 동거까지 했더라고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얼마 못가서 헤어지니까 저한테 다시 만나자고… 더럽게.”
나는 그때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역력히 상기된 내 억양과 표정으로 인해 커플은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고자 다시 원래의 억양으로 한국에서는 어디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커플 중에 여자는 서울의 한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어 9월부터 강의를 시작한다고 했고, 남자는 대기업의 연구소에 이미 출근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두 분 모두 너무 잘 되었네요. 축하드려요. 너무 완벽한 한 쌍이라니깐.”
나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교수와 대기업 연구원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의 미래가 부러웠다.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갔던 가게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마침 주문했던 냉면과 만두가 나왔다. 우리는 유일한 공통 화제인 그 가게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며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가게들을 더 이상 못가서 어떻게 하느냐하는 내 걱정에 그들은 이제 한국에서 맛있는 집을 찾아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여자는 나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다. 나는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었고, 나도 여자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저장했다. 여자가 언제 자기네 집으로 초대를 할 테니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남자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락만 주세요.”
이 커플이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나는 기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2주 뒤에, 나는 그 커플의 집에 초대받아서 저녁식사를 함께 한 것이었다.
그 커플의 집에 다녀와서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면 나도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오랜 외국생활에서 묻어난 자연스러운 세련됨은 따라잡을 수 없겠지만, 교양 있어 보이기 위해서라도 나는 책을 열심히 읽기로 결심했다. 전부터 베스트셀러 소설은 나도 종종 찾아 읽기는 했지만, 그밖에 책들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강남에 있는 대형 서점에 갔다. 책의 종류가 많아서 둘러보는 재미가 좋았다. 어느 평일 저녁, 나는 퇴근 후에 곧장 서점으로 가서 베스트셀러 서가 앞에서 책들을 들춰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놀라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뒤를 돌아보니 그날 그 커플의 집에서 만난 키 큰 남자였다. 나는 당황해서 꾸벅하며 인사를 한 뒤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서가에 다시 꽂아 넣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서로에게 동시에 물었다.
“네, 저는 책을 좀 살까 해서요. 그러는 그쪽은요?”
내가 먼저 대답하고 다시 물었다.
“이름이 현정씨라고 했었나요? 저는 일 때문에 왔다가 현정씨를 우연히 봐서요. 이 서점에 있는 서가들을 전부 저희 회사에서 만들었거든요. 이번에 디자인을 일부분 바꾸고 싶다고 해서 와봤어요.”
남자가 말했다.
“일류 가구 디자이너도 이런 책장을 디자인하기도 하는군요.”
나는 그날 밤 남자의 말이 생각나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저녁식사 하지 않을래요? 현정씨 저녁식사 하셨어요?”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직 안했는데, 그렇게 해요.”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남자는 내게 먹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며 메뉴판을 넘겼다. 점원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왔을 때 나는 고르곤졸라 피자와 크림소스 파스타를 시켰다. 남자는 재빨리 맥주 두 잔을 시켰다.
“맥주 괜찮죠?”
하고 뒤늦게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정씨는 책 읽는 거 좋아하나 봐요.”
“사실 그렇게 자주 읽는 편은 아닌데, 그때 친구 부부네 집에 초대받아 갔던 날, 거실에 책이 많은 것을 보고 조금 감명 받아서…”
하고 내가 말하는데, 남자가 내말을 잘랐다.
“엥, 걔네 부부 아닌데? 걔네 결혼 안했어요. 그냥 동거하는 거예요.”
“뭐라구요?”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동거라고요?”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남자에게 되물었다.
“걔네들이 현정씨한테 결혼했다고 했어요? 흠, 그럴 리가 없는데. 자기들이 동거한다는 사실에 떳떳해하는 편이거든요.”
라고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커플은 자기들이 결혼했다는 말을 나에게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들이 결혼했으려니 생각한 것은 나였다.
“그렇다고 저한테 동거하는 사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는데요?”
나는 알 수 없는 불편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뭐, 아직 말하지 않은 거겠죠. 조금 더 친해지면 말하려고 한 것 아닐까요?”
라고 남자가 말했다. 뒤이어 남자는 그 커플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유학생활 중에 만나서 그냥 같이 살기 시작했고, 그들의 부모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동거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난 후였다. 여자의 부모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현재 서로 연락하고 있지 않으며, 남자의 부모는 마지못해 인정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귀국한 뒤 아직까지 남자 집에도 여자 집에도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 커플은 그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아직도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왜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 거래요?”
“저도 모르죠 뭐, 둘의 사정은. 하지만, 예전에 철민이가 저에게 슬쩍 말해준 게 있어요. 언제든 서로 떠날 수 있다는 긴장감이 없으면 완벽해 질 수 없다나, 뭐라나.”
라고 남자가 말했다. 마침 주문한 음식이 와서 우리의 대화가 끊겼다.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동거를 했다는 사실을 그 커플에게 말하던 상황이 생각나서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음식에 제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때, 말끄트머리에 뭐라고 욕을 했던 것 같은데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키 큰 남자로부터 그 커플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 나는 그 커플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언젠가 여자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문자메시지가 왔으나 나는 답하지 않았다. 당시에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동거한다는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은 일종의 배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들 앞에서 헤어진 남자친구의 욕까지 해가며 동거를 이해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훌륭한 예술작품에 난 작은 흠집을 봐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는 내일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하필이면 왜 지금 그 커플 생각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던 그 커플 생각이, 왜 하필이면 지금….
-끝-
첫댓글 이 소설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그 완벽한 커플과 더이상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일부러 모호하게 그렸습니다.
읽고나면 독자마다 생각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살다보니 저도 말로 설명하기 힘들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하는 행동들이 있더군요.
그 '모호함'을 소설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결혼을 하지않고 동거를한다는것에 대한 거부
반응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옛남친이 동거를하면서도 자기를 만나왔던것에대한 배신감이 들지않았을까요?
말씀하신 점도 의식하면서 썼습니다.
남자친구와 이 커플과는 무관하지만 비슷한 거부반응이 들 수도 있을까?하는 건 사람마다 다르겠죠. ㅎ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감해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제 다른 소설도 읽어주세요~!
잘 봤어요 !!!!
감사합니다!!
잘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모호함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다른 작품도 읽어봐주세요. 이것과 비슷하게 재미있을겁니다. ㅎ
제 소설을 '듣고'싶은 분들은 제 Youtube 채널을 방문해 주세요. https://www.youtube.com/@read-me-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