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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의 방에 자리를 펴고 누운 도현은 천정에 보이는 석가래를 세고 있었다 . 지난번엔 보지 못했던 석가래가 보인다. 아니 그땐 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 술에 취했었기도 했고, 또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기도 했었으니깐.
참 보기가 좋다. 무늬 찍힌 도배지보다 어른 팔뚝만한 굵기의 나무 열댓개정도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있는게 참 보기좋게 걸터있다. 어느 사극 드라마의 세트장 같기도 하고, 민속촌에 지어진 초가집 대청 마루에 앉았을때 봤음직도 하다. 아직까지 이런 집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떤 기분일까? 매일 이런 천정을 보며 잠이 들고, 저런 천정을 보며 눈이 떠진다면 혜진이처럼 이곳에 동화되어 살아갈수 있을까?
"찬혁아, 저 석가래 참 보기 좋다. 그지?"
팔을 베고 누워 마찬가지로 석가래를 세고있던 찬혁이 피식 웃음이 났다. 사람마다 생각하는건 다 비슷한 모양이다.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때 봤던 석가래가 떠올랐다. 첨엔 저게 뭘까하고 생각했었는데, 도현이 자식은 금방 석가래를 알아맞춘 모양이다.
"사고나고 하연씨 방에서 처음 눈 떴을때 저 석가래가 보였어. 첨엔 좀 생소해서 저게 뭐지하고 생각했었는데 민속촌에서 갔을때 봤던게 생각나더라구."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여기 드라마 세트장 같지않냐?"
"드라마 세트장?"
"그래, 굉장히 생소한게 많은데 근데 친숙하거든. 아마 몰라도 저 석가래, 다음주 내내 생각날거 같아."
"생각나지. 이 집 자체가 나른하고 느릿한게 문득문득 떠오른단말야. 참 이상하지?"
"내 말이."
"정말 혜진씨, 집에 소개할거야?"
찬혁의 목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속에서 깨어난 도현은 저도 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찬혁은 굳이 도현의 고민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참견을 하든 하지않든간에 선택은 오롯이 도현의 몫이다. 걱정을 하고 어줍잖은 조언이랍시고 해봤자 쓸데없는 참견일 뿐이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 있어?"
"..............."
도현은 쉽사리 대답 할수가 없다. 대답 대신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가 도현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대기업 버금가는 사업채를 가진 도현의 집이다. 외동아들인 도현에 거는 아버님의 기대 또한 만만찮다. 게다가 찬혁의 입장에서는 허영심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도현의 어머님의 극성은 아무리 좋은 쪽으로 돌려 생각 한다 해도 혜진을 허락 할 일 없다. 여지껏 도현이 봐온 선자리에 나온 여자들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혜진은 도현의 어머님 입장에서 본다면 내세울거 하나없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여자에 불과하다. 아니 지금까지 알아본 봐에 의하면 쳐져도 너무 쳐져 보통의 기준에도 다다르지 못한다. 그런 혜진을 도현의 집에서......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찬혁은 점점 깊어가는 도현의 시름이 방안 가득 한숨으로 메워지는 것을 느끼곤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잘 되겠지. 네놈 말처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대답이 없던 도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확 사고 쳐버릴까?"
"사고는 벌써 친 걸로 아는데."
"그런거 말구 확실한 사고. 임신."
"생각했다는게 겨우 그런거야? 혜진씨 입장은 생각 안해?"
찬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도현의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어째 심각하다 했더니 기껏 생각해낸게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 부모없이 자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말이 보고 배운 것 없다는 소린데, 만일 혜진이 정말 임신이라도 한다면 십중팔구 그 소리가 나올게 뻔하다. 울상이 된 도현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찬혁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우리 김 여사 혼자 사는 여자라 배운거 없다고 몰아붙치겠지."
"잘 아네. 그렇게 잘 아는 놈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냐."
자뭇 심각하게 풀이 죽은 도현의 하소연을 듣던 찬혁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 대답도 없이 조용한 찬혁이 이상해 고개를 돌린 도현은 진지하게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찬혁을 보았다.
"왜?"
"너 의외다. 혜진씨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혼까지 생각하고."
"그게........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하루종일 그 머그잔만 쳐다봐지고 그러면 여기가 생각나. 여기 생각하면 혜진이가 보고 싶고, 일 잘 하다가도 문득문득 이곳이 떠올라 약에 취한 사람처럼 멍하고 있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점점 미쳐가나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뭐 공감은 간다."
"너도 그래?"
" 이곳, 참 묘하게 끌리는 곳이야. 나도 가끔씩 여기가 그립곤해."
"아무래도 우리 여기에 중독됐나봐. 혹시 저 방에 있는 두 여자 여우아닐까?"
"뭐?"
찬혁은 어이없는 도현의 말에 웃음 지으면서도 어쩜 그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누운 하연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복잡한 머리속을 어떻게 할 줄 몰라 조용히 한숨만 내뱉고 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던진 혜진의 말 한마디에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
"야, 좋디?"
"뭐가?"
"아까, 찬혁씨랑 키스하니깐 좋더냐구?"
하연은 난 또 뭐라고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자세까지 바꾼 혜진은 하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대답을 보채고 있다. 마치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아이마냥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보인다.
"기집애......지는 같이 잔 주제에."
"나야 뭐.........야~ 좋았어?"
"왜 그래 쑥쓰럽게."
"좋았나 보네. 하긴 찬혁씨 좀 멋져보이더라.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아마 키스하는 것도 잘할거야. 그지?"
"키스도 잘하고 못하고 가 있니?"
"그럼! 텁텁하고 담배 냄새나고 역겹게 느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반면에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고 커피향처럼 향긋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거든."
커피향같은 향긋한 느낌이라...........하연이 혜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거지? 나 만나기전에 선수 생활이라도 한건가?
"기집애........꼭 실천을 해야 연애를 하는거니? 간접 경험!!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봐라. 그런건 얘기거리도 아니다."
"우리집에 컴퓨터 없잖아."
"넌 대학 다닐때 실기실에만 쳐박혀있었냐? 피시방 이런데 안가? 그리구 우리 과 얘들이 미팅을 좀 많이 했어야지. 이렇게 저렇게 심심찮게 들리는 연애사들 한번도 못 들어봤어?"
멍한 표정의 하연을 보며 혜진은 어이가 없다. 하긴 생각해보면 하연은 과 얘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좀 논다는 얘들은 이리저리 남자들을 비교 하고 양다리에 오다리까지 걸치곤 했었다. 그게 뭐겠냐구?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는건데 만나서 뭐 손 잡고 쎄쎄쎄하고 놀았겠냐구? 걔네들 말을 들어보면 금방 커피를 마셨는데도 담배 냄새 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담배 피는 사람 싫다. 커피 냄새까지야 바라지도 않지만 담배 냄새는 좀 그렇잖아. 이왕이면 커피 냄새가 났지. 가만 근데 찬혁씨가 담배를 피던가?
혜진의 말에 하연은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며 얼굴이 확끈 달아오르는걸 느꼈다. 목덜미를 감싸던 찬혁의 커다란 손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듯 하다. 입안으로 부드럽게 밀려들어오며 감싸던 커피향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금방 커피를 마셔서 그런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다. 근데 찬혁은 담배를 피나?
"커피 냄새가 났어? 우와 멋진걸. 너 여지껏 키스해서 커피 냄새 났던 사람 없었지? 그러고보면 찬혁씨랑 너랑 궁합이 잘 맞나보다. 아무리 퀘퀘한 냄새가 나도 자기 짝이면 그게 달콤하게 느껴진다잖아. 근데 커피 향이 났다며? 그럼 천생연분이지."
"그......런가?"
"왜 이렇게 대답이 성의 없으실까? 너 혹시 처음이야?"
"........"
"어머, 어머, 어머, 세상에..........넌 무슨 천연기념물이니? 나이 스물 여섯 되도록 첫 키스도 한번 안해봤어? 그 동안 사귀는 사람 하나도 없었어? 미치겠다. 아무튼 찬혁씨 완전 땡 잡았네."
"지는.......그러고보니 너도 첨 아냐? 내가 알기론 그런데......어땠어? 너는 도현씨한테 어떤 냄새를 맡았어?"
"어? 그게........솔직히 난 술 때문에 기억이 안나."
"뭐?"
"도현씨도 나도 술에 취했었는데 무슨 냄새를 맡냐? 그냥 비몽사몽에......사실은 섹스를 한 기억도 안 나는걸."
"어머나 세상에~ 미쳤구나. 그러면서 지금 나한테 어드바이스를 하고 있는거야?"
"좀 그렇지? 지금 살짝 불러내서 키스해볼까?"
"어휴~ 미쳤어."
혜진은 하연이 던지 베개를 받으며 헤헤거리고 웃었다. 혜진과 웃고 떠들면서 잊어버렸던 걱정이 자리에 눕자 천정의 석가래마냥 다시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유일 그룹일까? 대한민국 그 많은 회사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하연은 과연 아버지가 찬혁의 존재를 알게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걱정스러워 졌다. 여지껏 연애 한번을 하지않았던 이유도 자신에게 거는 아버지의 기대때문이었는데, 누굴 만나든 과연 그 사람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수 있는 사람일까를 먼저 생각했었고, 그때마다 고개를 저어버리곤 했었었다. 하지만 지금 찬혁의 존재를 알게된다면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부모도 없고 가진것 없이 혼자인 이 남자를 유일그룹의 유일한 상속녀인 정 하연의 짝으로 인정해 줄 것 같지가 않다. 하연의 머리에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못한채 지금이라도 회사로 나오라는 아버지 정 회장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만약 찬혁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인 정 회장이 알게된다면 어떻게 될까? 설마 회사에서 쫓아내거나 하진 않겠지. 회사에서 꽤 인정을 받는다고 했으니 어쩌면 잘 봐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쪽으로 생각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않는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한들 아버지 입장에선 유일그룹의 후계자로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인사다. 하연은 은근 자랑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던 찬혁을 떠올리자 다시금 한숨이 새어나왔다.
"왜 그래? 아까부터 계속 한숨이야."
"아니야. 소화가 안되서 그래."
"매실액이라도 가져다 줄까? 전에 앞집 할머니가 주신거 있는데."
"괜찮아. 그것보다 혜진아. 우리 아버지, 내가 찬혁씨랑 만나는거 알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왜? 못마땅해 하실거 같아?.........혹시 부모님이 안계셔서?"
혜진의 반문에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던 하연이 몸을 일으키며 앉아 혜진쪽을 바라보았다. 그와 반대로 몸을 돌려 눕는 혜진은 생각해보니 찬혁이 참으로 자신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도 안계시고 가진것도 별로 없이 혼자 살아가는게 정말 비슷하다. 하연의 아버지가 찬혁을 반대한다면 도현의 부모님 역시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게 뻔하다.
"찬혁씨가 나랑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도현씨도 그런 고민하고 있는거 같더라. 아까 직장 관두고 여기 와서 살면 어떻겠냐 그러더라구. 그게 무슨 말이겠니? 도현씨 집에서 날 받아주지않을거 같으니 고민하는거 아니겠어."
"혜진아.........."
"괜찮아. 나도 다 아는 사실인데 뭐."
"미안해. 혜진아."
"니가 왜 미안해. 니가 미안해야되는 일 아닌데."
돌아눕는 혜진의 한숨소리가 크게 느껴진다.
'하연아 니가 미안해 해야 할 일 아니야.'
첫댓글 어 휴 하연은 찬혁의 출신성분이 걸리고 혜진은 혜진자신의 출신이 또그렇구 ㅎㅎ 차라리 상대가 서로바뀌었으면 좋았을걸 ~~~~
잘 읽었습니다.!
즐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