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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온 하연은 그 길로 지난번 목걸이를 맡겨놓은 쥬얼리 샾으로 향했다. 도로를 빽빽히 메운 차들의 행렬속에 섞여 있자니 갑갑증이 몰려왔다. 화려하게 거리를 수놓고 있는 네온싸인과 자동차의 전조등,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며 사람들의 웅성거림까지, 모든 것이 갑갑하다. 20년을 넘게 살아온 서울이지만, 이곳을 떠난 3년의 시간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기에 이젠 서울의 공기는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나보다. 여전히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샾의 매니저에게서 목걸이를 건네 받은 하연은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매번 느끼게 되는 샾의 홀 중앙에 걸린 화려한 샹델리어는 그 밑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어깨가 짓눌려 질식할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차로 돌아온 하연은 큰 한숨을 몰아쉬었다. 매번 이곳을 나올때마다 다시는 오지않을것이라 다짐을 하지만, 이번처럼 어쩔수 없이 이곳을 찾게되곤 한다. 하연은 자신의 손에 들린 케이스를 열고 천연의 빛을 발하고 있는 목걸이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혼자가 아니라구.........유일 그룹의 유일한 상속녀라........."
하연은 예전에 엄마가 이 목걸이를 하고 있을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어려서는 날아갈듯 우아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목걸이며 귀걸이를 한 엄마의 모습이 마냥 예쁘게만 보였지만 철이 들고부터 그렇게 차려입고 장신구를 걸치는 날이면 유달리 경직되고 힘들어하던 엄마의 얼굴이 더 눈에 들어왔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쁘게 웃던 엄마는 잘 꾸민 서양 인형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엄마의 목에 족쇄처럼 걸려있던 목걸이.......언제나 집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차 안에서 풀러버리곤 했었던 그 목걸이. 사람들 앞에 나서기보다 조용히 혼자 그림 그리는 걸 더 좋아하셨던 엄마였지만 유일 그룹의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그런 엄마를 자꾸만 밖으로 끌어내곤 했었고, 그런 엄마를 감싸주지 못했던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었던 하연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시들어가던 엄마......결코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보석함의 뚜껑을 탁하고 닫아버린 하연은 전화기를 꺼냈다.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사무실은 조용하기만 하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간 자리처럼 전화기를 들고 악악대고, 전쟁이라도 난것처럼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며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이 고요한 적막에 휩싸여 있다. 그런 적막 속에서 제법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고는 조금은 여유롭게 남은 서류를 보고 있던 찬혁은 핸드폰 액정에 뜬 하연의 이름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힘들고 바쁘게 보낸 하루에 대한 보상처럼 그에게 날아온 선물이었다.
"여지껏 한번도 전화를 안해서 다음번에 만나면 핸드폰 사용법을 가르쳐 줄려고 했는데."
<어디야?>
"사무실."
<아직? 퇴근 안해?>
"퇴근하면 뭐해? 집에 간다고 여우같은 마누라가 있는것도 아니고, 토끼같은 자식이 있는것도 아닌데. 혹시 니가 와 있다면 모를까."
<응? 혹시 지금 나한테 청혼하는 거야?>
"청혼하는 거면 받아줄래?"
<글쎄......하는거 봐서.>
"놓치면 후회할텐데......"
<후회를 할지 쾌재를 부를지 지금으로썬 판단이 안 서는데.>
"나 꽤 괜찮은 남잔데......왠만하면 받아주지."
<괜찮은 남잔지 아닌지는 커피나 한잔 하고나서 생각해 볼래.>
찬혁은 문득 고개를 든다. 커피 한잔 하다니, 설마 공방이 아닌가?
"너 혹시 지금 서울?"
<좀 많이 늦었지. 아무래도 가야될거 같아.>
"장난해? 어딨는지 얘기 안해."
헤헤거리는 하연의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린다.
<지난번에 만났던 곳!>
"지난번.........알았어! 5분만 기다려."
두말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찬혁은 서둘러 윗옷을 찾아 들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정확히 5분 뒤. 하연은 차 창을 두드리며 환하게 웃어보이는 찬혁을 만났다.
"어떻게 된거야? 왜 갑자기 서울에 온거야?"
"아버지 만나려."
"오늘은 기분이 좋아보이네. 아버지랑 화해했어?"
"어른인데 화해라고 말하긴 좀 그렇고.......그냥 그 분이 좀 바뀐거 같아서 그래서 그래."
"어떻게?"
딱히 어떻게 설명 할 말은 없다. 다만 전보단 상냥해 졌다고 하면 맞을까? 어쨌던 그전엔 항상 만나면 긴장하게되고 불편했었던 세라가 오늘은 말을 먼저 걸어오며 지난번 일을 사과해왔다. 딱히 잘한 일도 아닌데 사과를 받고만 있을 수 없어 같이 고개를 숙이게 되면서 냉냉하기만 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편해졌다. 세라가 그렇게 나오니 아버지인 정 회장과도 좀 더 편하게 얘기하게 되고, 아무튼 이래저래 불편하지 않게 집에 다녀올수 있었던거 같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보이는 하연을 이야기를 듣던 찬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녀의 심정을 모두 다 이해할수는 없지만 편하지 않는 집안 얘기를 그에게 해주는게 고맙다. 하연은 그런 찬혁을 가만히 쳐다보며 빙그레 웃어보인다.
"웃으니깐 이쁘네. 가자, 맛있는거 사줄께."
"맛있는거 뭐? 저녁 먹었다면서."
"그래도 어디든 가야지 계속 주차장에 있을거야?"
"그럼.......... 오빠 집에 가도 돼?"
"우리집? 내 오피스텔에 가잖말야?"
"그럼 이 늦은 밤에 운전해서 공방에 돌아가라구? 그러다 오빠처럼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오피스텔로 가자는 하연의 말에 내심 놀란 찬혁이지만 그다지 싫지않은 기색이다. 처음도 아니고 지난번에도 재워줬는데 오늘이라고 안될건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찬혁도 남자인지라 지난번과는 확연히 다른 둘의 관계가 오늘이라고 안될거 없다 큰소리 치는 스스로를 자신없어 한다. 찬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연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찬혁은 자신의 팔 아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하연을 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수가 있는지.......
찬혁은 처음 여자를 안았을때가 떠올랐다. 자신이 남자이면서도 사랑이나 연민이 아닌 그 어떤 감정 없이도 여자를 안을수 있는게 남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상적인 통과 의례처럼 군대 가기전 친구 녀석들의 부추김에 술 몇잔과 어리석은 객기로 처음으로 여자를 샀다. 처음보는 여자와 오로지 섹스를 위해서 호텔이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이 어색했던 그는 잠시 그렇게 있다 방을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여자는 부끄러움이나 망설임 없이 한겹씩 옷을 벗었고, 여자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들이 벗겨지며 난생 처음 보는 여자의 알몸에 주체할수없이 욕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여자를 안았다. 그렇게 낯선 여자와 밤을 보낸 뒤 눈을 뜬 다음날 새벽, 자신의 옆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들어 있는 여자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짙은 싸구려 향수와 뒤섞인 술 냄새에 화장이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 얼룩이진채 엎드려 잠이 든 여자를 봤을때 찬혁은 그녀가 아닌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그 역겨움은 변기를 붙잡고 속엣것을 모두 게워내고도 여전히 남아있었고,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에 치를 떨며 그대로 그 방을 뛰쳐나왔다. 방을 나오기전, 그는 잠에서 깨어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벌거벗은 채 침대에 앉아 방을 뛰쳐나가던 그를 바라보던 표정없던 낯선 여자의 눈, 모든 것을 포기한듯 비참함이 서린 그녀의 눈이 한동안 잊혀지지않았다. 그때 당신때문이 아니라고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스스로를 경멸하는 것일 뿐이라 말해줬어야 했는데..........하지만 그땐 여유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꽤 환상적인 로맨스를 꿈꿨었던 그에게 감정없이도 여자를 안을수 있는 자신이 경멸스러워 남을 보살필 여유같은건 없었다. 그후로 그는 여자를 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
하지만 지금 자신의 침대에 여자가 잠들어 있다. 지금 자신의 침대에서 잠든 이 여자에게선 갓 짠 신선한 우유 냄새가 난다. 찬혁은 자신의 침대에 자신의 셔츠를 입은 여자가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는 하연의 뺨에 흘려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겨주며 뺨을 쓰다듬었다. 하연이 눈을 뜨곤 찬혁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잡았다.
"깼어? 배 안고파?"
하연은 대답대신 찬혁을 끌어당겼다. 하연이 이끄는 데로 그녀 곁에 몸을 눕히자 품속으로 파고드는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벼댄다. 마치 갓 태어난 부드러운 아기 고양이를 안고있는 느낌이다. 그런 그녀가 킁킁거리며 그의 목덜미에 코를 대며 부벼댄다.
"음.........오빠 냄새 좋다."
"무슨 냄새가 나는데?"
"커피 냄새. 금방 새로 내린 커피 냄새가 나."
"커피 냄새?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말 같은데."
"아니야, 정말 커피 냄새가 나."
"너한테선 무슨 냄새 나는지 알아?"
"나한테서도 냄새가 나?"
하연의 놀란 눈이 찬혁을 본다.
"우유 냄새."
"뭐? 뭐야 내가 지금 어리다 이거야?"
"그게 아니라 정말 너한테서 우유 냄새가 나. 갓 짠 신선한 우유 냄새가."
"킁 킁........안 나는데?"
"나."
킁킁거리며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려는 하연을 보며 찬혁은 두 팔에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찬혁은 하연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린다. 어떻게 이렇게 작고 부드러울수 있을까? 간지러운듯 까르르 웃는 그녀를 보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원하면 무엇이든 해줄수 있을것만 같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잡은 찬혁은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말이 있었지만 어떻게 받아들일까 망설여진다.
"왜?"
말끄러미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찬혁은 이내 결심을 한듯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침대 사이드 탁자의 서랍에서 꺼낸 작은 상자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찬혁이 손에 쥐어준 작은 상자는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반지라는 걸 알수가 있었다. 놀란 하연은 찬혁을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상자를 열었다. 두개의 작은 링이 하얀 빛을 내며 모습을 들어내자 하연은 감동 받은듯 입을 다물줄 몰랐다. 언제 준비한건지, 분명 오늘 만날거란건 생각지 못했을텐데.....
"좀 유치할지 모르지만 샀어. 비싼거 아니야. 뭐 다들 커플링이라고 여자친구한테 이런거 주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멋쩍어하는 그는 진심으로 기쁜듯 미소를 짓는 하연을 보며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 서울로 돌아온 뒤, 어색함을 무릎쓰고 쥬얼리 샾을 찾은 보람이 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끼워줘."
그는 기쁜 표정의 하연을 보곤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하연의 손에 끼워주었다. 푸석하고 까칠하기는 하지만 하얀 하연의 손에 흰색의 반지가 반짝인다.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무척이나 신기한듯 이러저리 자랑스럽게 살펴보던 하연은 아직 상자속에 들어있는 나머니 반지를 꺼내 그의 손에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그의 손에 나란히 펴보이며 행복하게 웃어보였다.
"고마워. 너무 예쁘다. 이로써 오빠 영원히 내꺼가 됐네?"
"나중에 나보다 더 좋은 남자 나타났다고 무르지나 마라."
손가락을 쫙 펴선 여전히 신기한듯 이리저리 보고있던 하연이 샐쭉해선 눈을 흘겼다.
"그럴까? 그럼 그 말 취소해?"
"으이그~ 한번 낀 이상 끝이야. 넌 영원히 오빠거야."
"고마워. 오빠꺼 할께. 영원히........."
하연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보이곤 찬혁에게 키스를 했다. 찬혁은 다시한번 하연을 힘껏 끌어안았다.
첫댓글 드디어 찬혁과하연이 본격적잇 사랑놀이가 시작 되는가봅니다 ㅎㅎ 청춘은
참아름답고 소중한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