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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과 혜진은 벗어놓았던 작업복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뿌옇게 말라붙은 진흙이 잔뜩 묻어져 있었지만, 밖으로 들고가 벽에 대고 탁탁 두어번 털어버린다. 말라있던 흙들이 뿌연 먼지를 내며 떨어져 나가자 다시 두어번을 확확 털어내고선 아무렇게나 걸쳐 입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둘은 어색함에 피식 웃어버린다.
"기분 진짜 묘하네. 맨날 둘이 있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덩치 큰 남자가 둘씩이나, 그것도 이 밤에 집안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깐 기분이 이상해"
"나도 그래. 예전에 상상은 한번 해 봤지. 나중에 혜진이 너랑 나 결혼하면 어떻까하는 생각을 한적은 있는데, 근데 진짜 같이 있게 될 줄은 몰랐어."
"결혼? 결혼하고도 여기서 살려구?"
"안될게 뭐 있어?"
"하긴 안될것도 없다. 근데 저 둘 그냥 놔둬도 될까? 내가 보기엔 저 남자들 설거지도 한번 안 해 본 것 같은데, 맨날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빵쪼가리나 먹고 다녔을거 같은데,"
"굳이 하겠다는데 말릴 이유 없잖아. 뭐~ 깨져봤자 그릇인데."
"하긴 여기 널린게 그릇인데 깨졌봤자지. 잘 하고 있겠지?"
장난기 가득한 혜진의 질문에 하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도현은 모르겠지만 찬혁은 틀림없이 잘 할거라 생각이 든다. 종종 둘이 찬혁의 집에서 지낸다고 하니 어쩌면 도현도 제법 능숙하게 잘 할지도 모른다. 와이셔츠를 입은 두 남자가 고무장갑을 끼고 있을 상상을 하자 혜진은 절로 웃음이 난다. 웃는 혜진을 보며 하연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시장에서 도현을 처음 만났을때만 해도 영 어색하고 의기소침해 보여 걱정했는데, 식사하는 내내 도현과 티격태격 장난도 제법 치는 것 같고, 아까와는 많이 달라진게 눈에 보였다. 시장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진게 효과가 있는듯 하다.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흙덩이를 물레에 올려놓고선 컷팅을 시작하는 혜진을 지켜보던 하연은 자신의 작업대로 돌아와 앉았다.
"웬 한숨?"
"응?"
"방금 한숨 쉬었잖아. 무슨 걱정있어?"
기분 좋아 보이던 혜진을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나보다. 하긴 시장에서 오는 내내 온통 머리속을 헤집고 있는 걱정거리가 말만 하지 않을뿐 온 몸으로 보여지는 건 당연지사 같다. 은근슬쩍 웃음으로 떼우곤 서둘러 화제를 바꿔본다.
"배 불러서 그래. 간만에 포식했더니 소화가 안되서. 너 오늘부터 대 접시 작업 들어갈거지."
"그래볼까해. 핀칭 작업은 아무래도 투박해서 말이야. 물레로 대 접시 작업을 할까해. 좀 있으면 봄인데 화사한 꽃 그림 한폭 그리고 싶거든. 넌?"
혜진의 반문에 뭘 할까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하연의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그림이 있긴하다. 여린 잎을 달고 소담스럽게 옹기종기 모여 흰색과 연분홍색의 꽃잎을 하늘하늘 흔들며 수줍게 유혹하는 구절초. 아버지의 생일 선물로 머그잔에 그렸었던 구절초가 조금 있으면 담벼락 아래서 소담스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하늘하늘 여린 잎사귀를 흔들면서.....
"너 지난번에 그렸던 들국화 좋던데."
"들국화?"
"그래, 지난번 가마에서 꺼낼때보니깐 느낌이 좋던데, 샘플 아니었어?"
"들국화가 아니라 구절초야. 아버지 생신선물로 그린거야."
구절초를 상품으로 낼 생각은 없다. 돌아가신 엄마가 유일하게 좋아하시던 꽃이었다. 집안 곳곳을 환하게 장식하던 값비싼 꽃과 손질 잘된 정원을 가득 채운 값비싼 나무를 제쳐두고 뒷마당, 아뜨리에 테라스 앞을 가득 채우던 꽃이었다. 봄이면 그렇게 만개한 구절초 사이에서 햇살처럼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시곤 하셨는데, 엄마가 떠오른다. 아직 그 꽃들이 그대로 남아있을까.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꽃이였어? 괜찮아보였는데 아쉽네. 꼭 들국화처럼 생겼던데......그럼 니 이불에 놓여진 수도 구절초야?"
"이불? 아니 그건 들국화야. 니말처럼 비슷하게 생겼잖아."
"처음 니 이삿짐 속에서 그 이불 봤을때 참 너랑 닮았다는 생각 했었어. 수수하지만 굉장히 있어보였거든. 너 처음 여기 오겠다고 했을때 사실 얼마나 버틸까 그 생각 했었거든. 근데 벌써 3년이나 지났네."
"그래 벌써 3년이 지났네."
3월이면 그 테라스 앞을 가득 채우던 흰색과 연분홍의 구절초를 보며 이런 곳에 들국화가 필줄은 몰랐다며 달갑지않은 미소를 지어보이던 세라가 생각났다. 집과 어울리지않는 꽃들을 모두 뽑아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이 머리속을 떠나질 않는다. 그러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구절초가 그려진 머그잔을 들고 있는 세라의 모습이 떠올라 미간이 찌푸려졌다.
달가닥, 달가닥 몇개 되지않는 그릇들이 커다란 손때문인지 여자아이들 소꼽 놀이세트처럼 작아보인다. 어울리지않게 제법 앞치마까지 두른 도현이 서투르게 그릇들을 씻어내고 있다. 설것이를 하겠다며 먼저 자청하는 도현때문에 식탁 뒷정리와 커피를 만들고 있던 찬혁은 서투른 그의 손놀림을 불안한듯 팔짱을 낀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렇게 오랜시간 도현을 보아왔지만 설것이는 커녕 물컵 하나 씻는걸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오피스텔에 와서도 샤워를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물을 손에 묻혀본 적이 없던 녀석이다. 차라리 배달 음식을 먹었으면 먹었지, 요리나 뭐 그딴거랑은 거리가 멀었던 녀석이 자진해 제법 빨간 고무장갑까지 끼고선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설것이에 열중하고 있다. 참 연애는 하고 볼일인가보다.
"혜진씨랑 얘기가 잘 풀렸나보네. 아까와는 사뭇 다르다."
"그게 말이야, 하루에 열두번도 더 바뀌는게 여자의 마음이라더니 남자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내가 오늘에서야 알았다."
"오~ 이 도현, 많이 변했는데."
"원래 남녀 사이라는게 금방 싸웠다가도 또, 금방 화해가 되는거거든. 혜진이는 내가 하연씨한테 맘이 있는걸로 오해한거 같아. 그리고 그 날 있었던 일도 술김에 내가 실수한거라 생각하더라구. 사실은 그게 아닌데 말이지."
"오해가 풀렸단 말이네."
"오해는 무슨, 그냥 잠깐 서로의 생각이 달랐던거 뿐이지. 하여튼 사람은 대화가 필요해. 생각이라는게 혼자 오랫동안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안드로메다로 가기 쉽상이잖아."
"혜진씨에 대한 니놈 마음이 진심이라는 말인데, 그 말인 즉슨, 너의 어머니와 맞설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거지?"
흥얼거리던 도현의 손길이 일순간 멈칫한다. 금새 어두워지는 도현의 얼굴을 보며 찬혁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긴했지만, 현실을 바르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물론 혜진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장애물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일테니깐.
한숨을 푹 내쉬던 도현이 애꿎은 찬혁을 노려보며 낮게 욕지꺼리를 내뱉는다. 기껏 시장에서 혜진과 시간을 만들어준 그에게 고맙다 생각했더니 꼭 막판에 초를 치고 있다. 고민은 나중에 해도 늦지않는데, 지금은 혜진을 생각하며 한껏 들뜬 기분에 젖고 싶었는데 말이다. 물론 책임질일을 했다면 사내로써 책임을 지는게 마땅하지만, 앞으로 혜진이 겪어야 할 수 많은 고난을 생각하다면 이쯤에서 그만두는것이 어쩌면 그녀를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너 지금 내가 김 여사한테 말도 못꺼낼거라 생각하는거야?"
"결말이 보이는 싸움이니깐."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있잖아!"
"너희 어머니, 자식 이기고도 남을 분이라는 건 네가 더 잘 알텐데. 그 싸움 시작은 할 수 있겠어?"
냉정하기도 한 찬혁의 말이 결코 시샘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찬혁처럼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접고 싶지는 않다. 찬혁의 말처럼 지금 이 시간이 폭풍 전야처럼 고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이라도 혜진을 생각하며 행복하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그 고요함을 휘저어버리는 찬혁이 못내 원망스럽다.
"너희 어머니 기준에서 혜진씨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잖아."
"알아! 나도 잘 알고 있다구. 다 알고 있는데도 혜진이가 자꾸 생각나는 걸 어떡해. 일을 하다가도 이곳이 생각나고, 여기 생각하면 당연한듯이 혜진이 얼굴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미친 놈처럼 히죽히죽거리는 내 모습이 나도 어색해서 미치겠다구."
"단단히 탈이 났구나."
"네 놈도 탈이 나긴 마찬가지잖아."
"내가 너냐? 나나 하연씨는 건널 수 없는 외줄 다리에 서 있는 사람들 아니야.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여기까지다. 나머지 모두 네 몫이야."
"인정머리 없는 새끼, 커피나 타!!"
"자~ 커피 왔습니다."
드르륵, 작업장 문을 열고 찬혁과 도현이 양손에 하나씩 머그잔을 들고 들어오는게 보였다. 밥 얻어먹은 답례라며 설것이를 자처하던 두 사람은 마지막 서비스로 커피까지 대령했다. 먼저 작업장에 나와있던 혜진과 하연은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커피가 반갑게 느껴졌다. 습관처럼 식사후 오랜동안 둘이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곤 했었는데 생략하려니 왠지 아쉽기만 했던 두 사람은 작업장에 있는 커피라도 만들어 마실까 하다 설것이 하는 두 남자에게 미안함이 있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뭐하는거야?"
하연의 물레틀 위에 놓인 큰 대 접시를 보며 찬혁이 물었다. 흙덩이가 놓인채 돌아가고 있는 물레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궁금하기도 하겠지.
"물레!"
"물레?"
"영화 사랑과 영혼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다 알던데."
"아~ 그거 나도 알아. 음....명장면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찬혁과는 달리 도현이 옆에서 아는체 제법 고개까지 끄덕이며 거들고 나섰다. 허세부리는 도현을 보며 '풋!' 하고 혜진이 입안에 든 커피를 뱉어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는건지 아님 몰라도 아는체를 하는건지 하여튼 리액션 하나는 대박이다. 도현과는 달리 TV 나 영화를 잘 안보는 찬혁으로써는 유명한 영화라 제목만 알고 있는 터였다.
"흙덩어리가 이런 모양이 된단말이지? 되게 신기하네. 하여튼 손재주들이 좋아."
"매일 먹고 하는 일이 그건데. 오빠 만들어 볼래?"
"내가?"
"해봐. 초짜라 물레는 힘들겠지만, 간단하게 할수 있는 것도 있어. 콜링 작업이라고 해서 이렇게 흙을 길게 굴려서 늘려. 그걸 차곡차곡 쌓아서 만드는거야. 초등학생들 미술시간에 찰흙으로 많이 하는 거야."
"그럼 한번 도전해 볼까?"
찬혁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소매를 걷고 하연의 옆에 앉는다. 덥썩 겁없이 만진 흙의 감촉이 초등학교때 쓰던 찰흙과는 달리 입자가 미세하고 부드럽다. 하연이 가르치는대로 흙덩어리를 조물락 거리던 찬혁은 마치 초등학교 미술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듯 기분이 묘해진다. 그때도 찰흙을 조물락거리며 동물이며 탱크를 만들곤 했었는데, 물론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때와는 달리 무척 마음에 든다는 것만 다를뿐이다.
"굉장히 어색하네."
조금은 민망함에 옆을 보니 언제 시작했는지 혜진 옆에 딱 붙어앉은 도현도 흙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어느새 작업용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는 폼이 사뭇 진지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 모습에 하연 역시 웃어보이며 찬혁에게도 작업용 앞치마를 줄까 물어보지만 뭐 그렇게 까지 할것 있나 싶다. 그냥 손으로 조물락 거리는거 뿐인데....
"하연아, 우리 오늘 이 남자들 때문에 작업은 다 했다. 초등학교 공작시간이 따로 없네."
"에잇!!!!"
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도현이 맘대로 되지않는 작업에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나버린다. 제법 컵 모양을 갖춰가는 찬혁과는 달리 쌓아올리면서 이리저리 이그러진 컵 모양에 짜증이 나나 보다.
"와~ 진짜........인내심이 완전 초정밀이구만. 게다가 손재주도 없어요!"
"됐어, 난 원래 미술시간 안 좋아했어. 답답한데 바람이나 쐬려가자."
벌떡 일어나 앞치마를 휙하니 풀러버린 도현이 혜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 나이에 이거 배워 뭘 하나 싶다. 이런 걸로 아까운 시간 낭비하는것보다 혜진이 얼굴 한번 더 보는게 낫지 싶다. 투닥거리며 도현과 혜진이 작업장을 나가자 찬혁도 만지고 있던 흙에서 슬며시 손을 뗐다.
"하기싫어?"
"그러네, 나도 별로 소질이 없는거 같네."
하연은 그런 찬혁을 보다 쓱쓱 습관처럼 앞치마에 흙손을 문지르고는 아직 커피가 남아있는 머그잔을 집어들었다. 아직 하연의 손에 남아있던 흙이 머그잔 고리에 자국을 남기고 있다. 혹시나 신경이 쓰이는 찬혁과는 달리 커피잔 안에 손을 넣는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는 하연은 언제나 그렇듯 태평하니 잔에 남은 커피를 홀짝 마셔버린다. 하긴 그렇기도 하다. 매일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그때마다 손을 씻어댄다면 아마 손이 남아나질 않겠지. 찬혁은 하연과 마찬가지로 흙묻은 손으로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모음 마셨다. 다 식어버렸을거 같았던 커피에선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사무실에서 머그잔을 쓸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 커피잔은 커피를 담으면 잘 식지 않는거 같다. 아무래도 두께가 있어서 그렇지 싶다.
"전에 혜진씨가 준 머그잔 사무실에서 잘 쓰고 있어."
"그거말고 다른거 하나 줄께. 구절초가 그려진 거."
"구절초? 구절초가 뭐야?"
"있어. 엄마가 좋아했던 유일한 꽃이야. 들국화랑 비슷한 생김새지만 더 애절한 꽃이지. 깊은 향기를 품고 있고 기품스러움도 가지고 있는 그리운 향수를 일으키는 꽃이야."
구절초를 이야기하고 있는 하연에게서 꿈을 꾸는듯한 따스함이 흘러나오는걸 느끼며 찬혁 역시 눈빛이 따스해진다.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는 꽃이겠지만, 분명 하연처럼 애절하고 깊은 향기가 있는 꽃일것이다. 처음 봤을때의 그 느낌처럼 따뜻함을 품고 있는 그녀.
"너처럼......"
커피향이 가까이 다가왔다. 하연의 손에 들린 머그잔을 받아 내려놓은 찬혁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의 입술 사이로 짙은 커피향이 그윽하게 퍼져나갔다. 입안 가득 짙은 커피향이 느껴진다.
"오빠.........옷에 흙이........"
"씻으면 된다며."
흰 와이셔츠에 조심스럽게 허공을 헤매던 하연의 손이 자국을 남긴다. 하연의 틀어올린 머리를 감싸는 찬혁의 손길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찬혁의 목소리가 하연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머리속을 헤집는다.
"사랑해 하연아."
"사랑.....해"
"추워?"
"좀.........아직은 쌀쌀하잖아."
밖으로 나온 도현과 혜진은 텃밭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울과는 공기부터가 다른 이곳의 쌀쌀함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어깨를 움추리며 옷깃을 추스리는 혜진을 보며 도현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감싸안았다.
"여기 참 좋다. 서울이랑은 공기부터가 달라. 별도 많구"
"응. 하연이도 가끔 서울갔다오면 그런 얘기해."
대화가 끊어졌다. 아무런 말이 없는 도현을 힐끔 쳐다본 혜진은 그에게서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그냥 별을 보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어둠속에 쌓인 텃밭을 향해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그를 보며 혜진은 막연한 불안감이 언습해왔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시골 집 텃밭은 작업장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어슴프레하게 두 사람의 얼굴 윤곽만 비춰주고 있었다.
"나 여기서 살까?"
"왜 오빠 집 놔두고 여기서 살아?"
"그냥........여기 뭐 공기도 좋구 경치도 좋구 그리고 너도 있구."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심각한 그의 표정에서 혜진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건지 이런 심각한 분위기, 정말 싫다. 피식 웃어 넘기듯 혜진은 도현의 등을 찰싹 때려준다. 화들짝 놀라는 그를 보며 혜진은 아이 나무라듯 도현을 나무란다.
"더운 밥 먹여줬더니 실없는 소릴 하네. 확 쫓아낼까부다."
"뭐가 실없어. 뭐 넌 언제까지 하연씨랑 여기서 둘이만 살거야?"
"그런건 아니지만....아직 그러려면 한참은 남았구만 뭐 벌써 그런걸 걱정하냐?"
"야! 나 서른이야. 결혼......해야 될 나이라구."
정색을 하는 도현을 보며 괜히 무안해진 혜진이 말을 더듬는다. 물론 언제까지 하연과 둘이 이곳에서 살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걸 생각 할 시기는 아닌거 같은데,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도현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듯 결혼이란 말이 나오자 혜진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건 알겠는데...........그래도 우리 만난지 한달도 안됐는데........."
"아~ 그렇지. 아직 한달도 안됐지. 그래도 한번 생각은 해봐. 결혼에 대해서............."
"나중에, 그런건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생각해도 돼. 뭐가 그렇게 급하다구.요즘은 서른 대여섯살에 결혼하는 사람도 많은데 서른이 뭐 많다구."
도현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혜진이 서운하다. 아니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모르는 혜진으로써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도현은 왠지 원망스러워진 혜진을 흘겨보았다.
"자기는 아직 이십대라 이거지. 좀만 있어봐라 서른 되는거 금방이다."
"알아. 나도 4년뒤면 서른인거. 근데 그건 4년뒤에 생각할래."
"아우~씨! 직장 그만두고 여기와서 살까보다."
"아이구~ 누가 받아준다구 여길 와? 남자는 자고로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게 제일이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더 늦기전에 가."
"어딜가? 우리 오늘 여기서 잘거야."
도현의 말에 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 여기서 자?"
"내일 일요일인데 여기서 자도 돼지. 그러려고 토요일에 온건데."
"누구 맘대로!!!! 여자들만 사는 집에 남자들이 왜 자고 가!!!"
"지난번에도 잤는데 새삼스럽긴........."
"안돼!!! 얼른 일어나."
혜진은 앉아있는 도현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도현을 잡아 끌고는 작업장으로 밀어넣으며 소리쳤다.
"하연아!!!! 이 아저씨들 여기서 자겠대."
"야! 혜진아 지금....."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혜진의 눈에 키스를 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연과 찬혁은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혜진을 보자 황급히 떨어지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줄 몰라 쩔쩔매며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런 둘의 모습에 혜진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으이그~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도현은 그런 혜진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곤 찬혁과 하연을 향해 웃어보이고는 혜진을 작업장 밖으로 끌어 당겼다. 어느새 홍당무가 되어버린 혜진은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있었다. 그런 혜진을 작업장 밖으로 떠밀며 도현은 장난스럽게 찬혁을 향해 웃어보인다.
"야~ 너 와이셔츠에 흙 묻었다."
장난스런 도현의 말에 어쩔줄 몰라하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등을 돌리는 하연을 보며 찬혁은 손에 잡히는대로 흙덩어리를 던지며 주먹을 내밀어보였다.
첫댓글 이제는 둘이서로 마음이 통하는가 보네요 서서히 사랑에 물들어가는 시기인데
앞으로 이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아무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