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하연은 멍하니 어두운 천장에 희미하게 보이는 석가래를 세고 또 세고 있다. 시계의 바늘은 벌써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지만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다.
"하연아, 자?"
잠들었다 생각했던 혜진의 낮은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세고 있던 석가래를 놓쳐버렸다.
"안 잤어? 아직도 속이 불편해?"
"아냐. 그냥 잠이 안와서. 너 불편하지 않아? 나랑 바꿀까?"
"됐어. 몸도 안좋으면서 그냥 자."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니가 고생이네."
"고생은.....너,.. 도현씨 걱정되서 잠이 안오는거야?"
"그런것도 있고...........넌 왜 안잤어?"
"그냥 싱숭생숭한게 괜히 잠이 안오네. 저 방에 누워있는 두 남자도 신경 쓰이고........ 참 이상하다."
"뭐가?"
"지금 이 상황! 석달 전 다이어리를 손에 넣었을때 이런 상황 같은 거 생각도 못했었는데, 지금 그 다이어리 주인이 니 방에서 자고 있다니 참 세상 요지경 속이다. 안그래?"
"정말 그러네. 단 석달만에 갑자기 상황이 변해버렸어. 삼년전 니가 여기로 올 때처럼."
하연은 혜진의 말에 삼년전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 놨을 때가 떠올랐다. 외진 시골 마을 대추나무가 심겨진 밭을 끼고 앉은 이 집 툇마루에 넋을 잃고 앉아있던 혜진을 봤을 때가..........
"여기 참 좋은 곳이야. 어리석게도 난 그걸 나만 느낀다고 생각했는데..........다들 똑같나봐."
"무슨 말이야?"
"도현씨, 여기가 맘에 드나봐. 여기서 살고 싶어하잖아."
혜진은 하연의 말뜻을 알아차렸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도현씨한테 맡겨. 도현씨가 하자는데로 해."
"하자고 하는데로....... 그럼 그 사람 자기가 가진걸 모두 잃게 될 텐데...........분명 시간이 흐른 뒤엔 후회 할 거야."
"후회 안해. 후회 같은거 안 할거야. 도현씨가 가진거 대단해 보이지만 실은 별 거 없어. 그냥 남들 보기에 좋은 떡일뿐이야. 먹어봤자 그게 그거인........"
"하지만......"
"부자라고 하루 네끼 먹지않아. 좀 더 좋은 음식 먹고, 좀 더 좋은 옷 입고, 좀 더 비싼 보석을 걸친다고 행복한거 아니잖아.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이 편해야지, 마음이 행복해야지, 그게 진정 행복한거야. 돈 같은건 먹고 살만큼만 있으면 되는거야."
"너무 쉽게 말한다."
"쉽게 말한다구?"
"삼년을 너하구 함께 살면서 가끔 이해하기 힘들었어."
"무슨 뜻이야?"
처음 공방 열었을때 거래처를 찾지못해 가슴이 타들어가는 나와는 달리 하연은 여유롭기만 했다. 가마에 온도를 못 맞춰 물건들이 모두 금이 갔을 때도 발을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 하는건 언제나 나였어. 하연은.........다시 작업하면 되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냐구 여유를 부렸고. 그때는 여유부리는 하연이가 참 부러웠어. 있는 집 딸이니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가보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까짓것 별거 아니라고 너무나 쉽게 말을 하는 하연이 원망스러워진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 하연을 보며 혜진 역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끔씩, 정말 가끔씩 널 이해할수가 없어. 니가 어떤 환경속에서 자란건지 모르겠지만 넌 모든걸 너무 쉽게 생각하는거 같아. 넌 너무 많은 걸 누려봐서 돈이라는 거, 너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찮게 생각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거..........보통 사람들한테는 아니야. 평생을 그걸 쫓으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그게 전부야? 니가 아는 나라는 사람........그게 전부야?"
"어쩔생각이냐?"
바닥에 나란히 이불을 깔고 누운 찬혁은 등을 보이고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한참 후에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눕는 도현의 대답은 무겁기만하다.
"모르겠다. 아무런 결론을 낼수가 없어."
"이쪽이든 저쪽이든 빨리 결정지어라. 질질 끌면 혜진씨만 힘들어져."
"어~휴........(혜진이 말고도 힘든사람 또 있다 이자식아.)"
"이번에 선 본 여자는 누구냐? 어떤 여자길래 집에서 밀어붙이는거야?"
"몰라."
"니 놈이 모르면 누가 알아? 하여튼 빨리 결정지어."
"넌 여기 오늘 왜 온거냐? 주말도 아닌데........요즘은 좀 한가해졌어?"
"한가해지긴, 하연이랑 의논 할 일이 있어서 온거야."
"뭐? 하연씨랑 살림이라도 차리게?"
"짜식이 생각하는거 하곤.......아니다 그 말이 맞네."
"뭐? 정말이야?"
"할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하연이 설득하려고 왔어."
뜻밖의 말에 도현은 놀란 얼굴로 찬혁을 빤히 쳐다본다.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쳐다봐. 사람 무안하게, 실은 회사에서 해외연수 프로그램 추천을 받았어. 2년정도 해외에 나가 근무하면서 학교도 다닐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
"뭐? 해외?"
"흔치 않은 기회야. 신청도 안했는데 나한테 이런 기회가 주어진걸 보면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하연이만 좋다면 같이 가고싶어서..........."
'알았구나!!! 하연씨 집에서 이 자식을...........그래서 떼어놓으려고.......'
그때 두 사람의 귀에 하연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 소리야?"
둘은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뛰어갔다. 불 꺼진 하연의 방에선 서로를 싸늘히 노려보는 두 사람이 보였다. 찬혁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냉냉한 분위기는 바뀌어지지 않았다.
"왜 그래? 둘이 지금 싸우는 거야?"
도현의 말에도 둘은 아무런 대답이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한다.
"사실이잖아. 너랑 3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번도 너네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지않았어. 아버지가 하시는 회사 이름도 모르고 가끔씩 서울에 들락거리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 막말로 니가 서울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난 널 찾아낼 방법이 없어. 니가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아버지 회사가 왜 중요해? 아버지 회사는 아버지꺼지 내꺼 아니잖아. 내가 이곳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곳에서 너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중요한거야. 다른건 아무것도 아냐? 너 다 알잖아."
"아니, 난 모르겠어. 니가 어느날 갑자기 이곳으로 온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어느 한순간 떠날 수 있다는 것 밖에 모르겠어. 그럼 난 널 어디서 찾아야하니? 누구한테 물어봐야하는거야? 너네 가족에 대해 아는게 없는데, 어느 동네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전화번호 조차 알수가 없는데!!!"
"나는 그렇게 한순간 떠나지 않아! 그럴거라면 그렇게 힘들게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어. 내가 이곳으로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뤄야했는지 알아!!! 근데 이제와서 아버지가 하시는 회사 이름이 중요해!!!! 서울에 있는 우리 집이 어디에 있는지가 날 아는 거냐구!!!! 여기와서 살면서 너랑 부대끼고 지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
"그만들 해!!! 하연씨, 나가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
둘의 대화를 듣던 도현이 냉큼 방으로 들어가 하연을 잡아 당겼다. 흥분한듯한 하연이 도현의 손을 뿌리쳤지만, 도현은 그런 하연을 억지로 데리고 작업장으로 나가버렸다. 찬혁은 도현이 혜진이 아닌 하연을 데리고 나가는 것에 순간 당황했지만, 남겨진 혜진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남겨진 혜진은 고개를 숙인채 침대 이부자락을 꼭 쥐고선 그렇게 앉아 있었다.
"괜찮아? 왜 싸우는 거야?"
"내가 잘못한거야? 나는 정말 하연이에 대해 아는게 없는데.........찬혁씨는 하연이에 대해 얼마나 아는 거야? 하연이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얘기해 줬어? 하연인 가진 것에 감사 할 줄 모르는 얘야. 그러니 도현 오빠에 대해 쉽게 말하는거지."
"무슨 말이야?"
"도현이 오빠, 날 선택한다면 가진 걸 모두 잃을 수 있을 거야. 근데 그걸 하연인 쉽게 생각해. 그게 별거 아니라고 말해. 어떻게 그게 별게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위해 평생을 죽어라 일하는거잖아."
여전히 이부자락을 꼭 쥐고선 뚫어져라 노려보던 혜진이 기어이 눈물을 떨군다. 혜진은 도현이 자신이 아닌 하연을 데리고 나간 것도 못내 속상하고 서운하다. 있는 집 사람들이라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가?
"찬혁씨도 그렇게 생각해? 그게 별거 아니라고? 남자들, 그걸 위해서 평생을 죽기 살기로 뛰는거잖아. 안그래?"
찬혁은 하연이 쉽게 생각한다는 혜진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쉽게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더니, 그래도 하연을 역성들어주고 싶은 찬혁이다.
"지 일 아니라구............"
"그건 아니구 다만 널 위하는 마음이 크다보니 도현이에게 무리하게 바라는 맘에 그런말을 했겠지. 하연이가 도현이 놈, 쳐다보기에 너무 높은 나무라고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말하면 기분 좋을거 같아?"
"그건 아니지만....."
고개숙인 혜진은 한참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마음이 격해져선 실수를 한거 같다. 위로한다고 한 말을 비틀어 듣고선 화를 내다니, 하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찬혁이 그런 혜진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도현이 자식, 쉽게 결정하기 힘들거란거 니가 이해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근데 그 자식 널 생각하는 맘 결코 가벼운거 아니야.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그 자식이라면 이런 고민은 아마 하지도 않았을거야. 근데 지금 저 자식, 니가 힘든만큼이나 힘들어. 죽을 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는거 뿐이야. 그리고 하연이도 마찬가지야. 누구든 숨기고 싶은 비밀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거잖아. 더구나 20년 이상을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사는 사람들인데 같이 살게되면 부딪히는것도 많고........."
"그러니깐 서로에 대해 더 잘 얘기해줘야하는거 아냐? 그럼 더 잘 이해하잖아."
"그 전의 생활을 알아야만 이해하는 거 아니잖아. 너 여지껏 하연이랑 살면서 불편했었어?"
"그건 아니지만.........가끔은 열등감 같은것도 생겼어. 뭐랄까? 하연이에게선 좀 다른게 느껴졌거든. 나같은 사람이랑은 다르게 어딘지 귀해보이는.........."
"그렇게 느낄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거 니가 그전에 들었던 하연이에 대한 말들로 인해 생긴 선입관일수도 있잖아.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채 둘이 만났다면 그런 생각마저도 안들었지도 모르잖아."
"그럴까? 근데 도현 오빠는 왜 하연이를 데리고 나간거지? 오빠도 있는데.........."
"글쎄 말이야. 저 자식 아무래도 널 너무 편애하는거 같다. 넌 편안한 침대에 두고 하연일 밖으로 데려간걸보면......."
찬혁은 혜진의 손등을 두어번 두드려주고는 밖으로 나가 하연과 도현을 찾았다. 이곳으로 오면서 치뤄야했던 댓가가 무엇인지, 힘들게 이곳으로 왔다는 하연의 말은 무슨뜻일까?
첫댓글 아무래도 하연이가 생각하는 물질에대한것과 혜진이 생각하는 물질적인 문제가 차이가 크게 나는건 사실인거
같네요 어릴적부터 돈에대해
크게 신경안쓰고 자라온 하연
어릴적부터 돈에 쪼달리며 살아온혜진 같은 돈이라도 느껴지는 마음은 서로가 틀리겟지요 ~~
즐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