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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이게 무슨 날 벼락이냐, 둘이 밥 잘 먹고 사이좋게 손 잡고 들어갔으면 조용히 잘것이지 왜들 갑자기 쌈질이야? 그리고 그렇게 흥분해서 아무말이나 막 떠들면 어떡해! 들키고 싶어? "
하연을 끌다시피 작업장으로 데리고 나온 도현은 지금의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싸움이라면 벌써 초저녁에 한바탕 치뤘다고 생각했는데 이 새벽에 또 뭔 싸움이람. 더구나 남의 일도 자기 일인양 열을 내고 나서주는 그렇게 죽고 못사는 두 여자가 말이다. 하지만 도현의 투덜거림이 들리지않는지, 한숨을 토해내며 천정만 바라보던 하연의 눈에 금새 눈물이 고여 벌겋게 충열이 된다. 하연이 억지로 눈물을 삼키다 답답한듯이 서성이기 시작했다.
"혜진이가............혜진이가 날 모르겠대. 3년을 같이 지냈으면서 단지 내가 누구집 딸이고 아버지가 뭐하시는 분인지를 몰라서 날 모르겠대. 그럼.........그럼 여지껏 같이 지낸건 뭐야? 여기서 3년을 지낸 난, 난 아무것도 아니란거야?"
이성을 잃은듯 흥분한 하연은 딱히 도현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게 아니였다. 허공을 향해서 소리쳤고, 도현을 보면서도 소리쳤다. 명확한 대상을 알수는 없지만 중얼중얼 작업장을 서성이며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이 무척이나 흥분한듯 보였다.
"진정해. 하연씨, 안에서 다 들리겠어."
"어떻게 진정 할 수가 있어!!! 혜진인......혜진이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날 잘 알아. 아버지보다 윤 비서님 보다도 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구. 온갖 명품으로 치장해서 인형처럼 세워놓는 아버지도, 하루종일 따라다니는 윤 비서님도 혜진이한테처럼 마음을 내보인 적이 없다구. 3년 동안 나는.......나는 마음을 줬어, 혜진이한테......혜진이랑 함께한 이 공방에......."
"알아. 지금 니 심정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니깐 제발 진정하고...........아~ 후 정말 뭐 같다."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는 하연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먹이는걸 보며 도현은 왠지 그녀가 측은해 보였다. 어떻게 유일 그룹의 상속녀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녀가 유일 그룹의 상속녀라는 것을 알고도 색안경을 끼지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숨기고 싶어서 숨긴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도현이기에 하연이 안타깝기만 하다. 도현은 그런 하연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감싸 안아주었다. 이럴땐 어떤 위로의 말이 도움이 되는건지 도현은 알지 못했다. 그로써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들이었으니깐. 그저 이렇게 감싸주고 다독여주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찬혁이 밖으로 나온 건 그때였다. 둘을 찾아 밖으로 나오던 찬혁은 작업장 창문을 통해 도현에게 안겨 울고있는 하연의 모습을 보고는 흠짓해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작업장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내가 이 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내방 천장으로 나온 석가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마당에 핀 구절초도 좋아하고 돌절구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좋아하고.........비오는날 소파에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는걸 좋아한다는 걸 다 알면서................"
"그래, 그래. 혜진이가 다 알면서 속상해서 괜한 화풀이를 너한테 하는거야. 지금 우리 어머니때문에 속상해서 너라면 다 받아줄거라 생각해서 맘에도 없는 소릴한거야. 그러니깐 하연이 니가 이해해."
"뭐가 중요한건데............. 도대체 뭐가..........난........난 없는거야? 내 껍질만 있는거야?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구..........나는 아는데..........혜진이가 돌절구에 핀 수선화를 좋아하는것도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호박죽을 좋아하는것도 나는 다 아는데....."
"하연씨, 그거랑은 다르잖아."
"뭐가!! 뭐가 다른건데!!!"
도현은 흥분해선 소리치는 하연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런 도현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하연이 제풀에 기가 죽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어버린다. 도현은 하연의 하소연에 무턱대고 맞짱구를 쳐 줄 수가 없다. 그러기엔 하연이 가진 껍질은 너무도 두껍고 단단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말을 하고 있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껍질이 얼마나 두껍고 단단한 것인 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그녀 앞을 가로막는 벽들이 더욱 견고한 성을 쌓아 갈 것이라는것 역시 잘 알고 있기에 둘은 그렇게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었나보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면 하연씨 말에 동조 해주었을거야. 하지만 내가 알고있는 하연씬.....하연씨가 가진 껍질은 너무 두껍고 단단해."
무슨 말일까? 하연이 가진 껍질이 너무 두껍고 단단해 그녀 편을 들어줄 수 없다니, 찬혁은 작업장에서 흘러나오는 둘의 대화를 엿들으며 둘 사이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걸 직감했다. 처음 하연을 감싸안는 도현을 보며 혹시하는 생각에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둘의 대화는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도대체 뭐길래 하연은 무거운 수레를 혼자 힘으로 밀고 있는듯 힘들어하는걸까?
"알아!!!! 나도 안다구............나도 다 알고 있다구."
"저 안의 두 사람에게 하연씨를 이해해 달라고 하기엔 아직은 무리가 있을거야.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해 못해 줄 수도 있어. 내가 하연씨를 그 호텔에서 봤을때 놀랐던건 저 두사람이 하연씨에 대해 알게됐을때 받을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호텔?'
"만약에 찬혁이나 혜진이가 하연씨가 유일그룹의 외동딸이라는걸 안다면.......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더구나 나랑 선본 사람이 하연씨란걸 안다면, 장담하건데 난 최소한 사망이야."
'!!!!!!!!!'
찬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도현이 뭐라고 했지? 듣지말아야 할 말을 엿듣다 귀가 잘못되었나보다. 유일 그룹이라니, 게다가 도현이 선 봤다는 그 유일그룹의 외동딸이 하연이라니.......찬혁은 어딘가 세차게 머리를 부딪힌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몸 속에서 뭔가 급속히 빠져나간 것처럼 중심을 잡지못하고 휘청거렸다. 찬혁은 심하게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잡으려 작업장 문을 잡았다. 덜컹 소리와 함께 인기척에 놀란 하연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다 문에 기대선 찬혁을 보았다. 몸을 돌리던 도현 역시 작업장 문앞에 선 찬혁을 발견하곤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심한 충격을 받은듯 하얗게 질린 찬혁의 굳은 얼굴을 보며 하연은 섬짓하게 밀려오는 불안감으로 온 몸이 얼어붙는것만 같았다. 저 표정, 저 눈빛, 찬혁의 굳어버린 표정과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에 하연은 그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확신 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당황한듯한 도현은 하얗게 질려가는 하연을 보며 먼저 찬혁에게로 다가갔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설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찬혁아! 언......언제부터 여기에......"
"언제부터 엿듣고 있었냐구? 한참을 들었는데도 귀가 잘못되었는지, 아님 머리가 잘못되었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하연이가 누구라구? 지금 너희 두사람 무슨 얘기를 한거야?"
"찬......찬혁아.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이게 어떻게 된거냐면........."
"유.일.그.룹?"
찬혁은 도현의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작업장으로 들어왔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않는다는 듯 하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더 이상 그의 눈동자에 하연이라는 여자는 존재하지않았다. 정 회장의 외동딸, 유일그룹의 유일한 상속녀만이 비쳐지고 있을 뿐이였다.
"유일그룹 정 회장의 외동딸?"
찬혁은 도저히 믿기지않는다는듯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대답따위는 기대하지 않는듯, 그렇게 겁에 질린 하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무서운 얼굴의 찬혁이 다가올수록 겁에 질린 하연의 몸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순간 찬혁의 손에 멱살이 잡혔다.
"유일그룹 외동딸이라구? 유일그룹? 내가 유일그룹에 다니는 걸 알고 있었잖아."
"오......오빠!"
하연은 점점 죄어오는 그의 손아귀에 통증을 느꼈지만 그보다 그의 눈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도현도 뜻밖의 찬혁의 행동에 당황해 어쩔줄을 모르면서도 하연을 잡은 그의 손을 가로막고 나섰다.
"찬혁아!!! 제발 내 말 좀 들어!"
"비켜!!!"
찬혁은 도현의 손을 뿌리치고는 잡고 있던 하연을 거칠게 내팽겨쳤다.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듯 복잡해진 머리는 생각이라는걸 할수 없을정도로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복잡해진 머리속에서도 오직 한가지,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 사랑한 그녀가 유일그룹의 유일한 상속녀라는 사실만은 또렷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일그룹의 유일한 상속녀!!!
순간 찬혁의 머리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실타래에서 한가닥 실마리가 떠올랐다. 그것이었구나! 자격도, 대상도 아니면서 신청도 하지않은 미주지사 해외 연수 기회가 왜 자신에게 오게됐는지, 그것이었어. 바로 정 하연!
입사이후 지금까지 밤낮없이 뛰어다니면서 인정받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유일그룹의 상속녀인 정 하연이 때문에 넘어온 기회였단 말인가? 이럴수는 없다. 찬혁은 인정하고 싶지않은 현실에 머리를 흔들어대며 비틀비틀 작업장을 빠져 나가려고 하였다. 도현은 그런 찬혁의 팔을 낚아챘며 뒤돌려세웠지만 돌아오는건 주먹세례였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업장 문에 부딪치며 도현이 벌러덩 쓰러졌다. 그 소리에 방안에 있던 혜진까지 놀라 뛰쳐나왔다. 하연은 도현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온 찬혁의 얼음같은 시선에 몸이 굳어버린듯 움직일 수 없었다.
"찬혁아!!!! 기다려!!!!"
바닥에 쓰려진 도현이 벌떡 일어나 돌아서 가려는 찬혁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런 도현의 행동은 오히려 찬혁을 부추기는 것 밖에 되지못했다. 도현의 멱살을 잡고선 화를 참지못한 찬혁이 절망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결국 니가 선본 여자가 하연이였단말이야? 하연이와 널 결혼시키려고 니네 어머니가 혜진일 찾아온거란 말야!!!!"
"그.......그게......."
"넌 얘기 했어야지!!!!!! 하연이가 못했어도 넌 했어야 했어!!!! 내가......내가 흔치않은 해외연수의 기회를 잡은게 내 능력이 아니라 단지......단지 그 이유였어. 하연이에게서 떼내기 위한 구실이었단 말이야!!!! 으아아악!!!"
잡고 있던 도현의 멱살을 있는 힘껏 뿌리치며 찬혁은 비명같은 절규를 내질렀다.
"찬혁아.......콜록 콜록!!!!"
찬혁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난 도현은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듯한 기침을 뱉어냈다. 찬혁의 얼음같이 굳어선 꼼짝하지못하는 하연을 노려보곤 허공을 향해 허탈하게 몇번 웃어보인다.
"참 대단하다. 니들 가진자들이 하는 일이란게 참 대단해."
"찬혁아........"
"하하핫............에잇~ 제길럴!!!!! 뭐야, 결국 그거 였던거야. 여지껏 앞만 보고 달려온건 아무것도 아니구 단지........단지 너한테서 날 떼놓기 위한거였어?"
"오빠........."
"나한테 주어진 기회가 내 능력과는 상관없이 단지 하연이 옆에서 날 치우기위해 방법에 불과한거였어."
찬혁은 어이없다는듯이 중얼거리며 거칠게 차문을 닫고선 힘껏 엑셀레다를 밟았다. 거북한 마찰음을 내며 그의 차는 공방을 빠져나갔고 여지껏 찬혁에게 내팽겨쳐진채 작업장 바닥에 주저앉아 석고상마냥 얼어있던 하연은 그 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들은것처럼 작업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곤 그의 차가 빠져나간 공간을 향해 뛰어갔다.
"오빠!!!!! 기다려 오빠!!!!"
"혜.....혜진아!"
때아닌 소동에 밖으로 나온 혜진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명같은 찬혁의 절규에 다리 힘이 풀려버리는것 같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찬혁이 흥분해 떠들고 있는 말이 머리속에서 쉴새없이 맴을 돌고 있다. 얼이 나간듯 서 있는 혜진을 본 도현은 머리속이 아득해져 왔다. 무슨 일이 이렇게 한꺼번에 봇물터지듯 터져버리는건지, 갈수록 감당하기 버거워진다. 여전히 믿기지않는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내젖던 혜진이 휘청휘청 집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도현은 휘청거리는 혜진의 뒷모습과 찬혁의 차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하연을 번갈아 보며 절망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버린다. 이 놈의 입!!! 하연에게 말조심해라고 주의를 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벼운 입은 그대로 열린 상태였다. 망할놈의 입!!!!
"하연씨, 괜찮아?"
"가버렸어........가버렸어."
"그래. 망할 자식이 사람 말도 안듣고 가버렸네. 너무 걱정하지마, 저 자식 지금 많이 놀라고 화가 나서 가버렸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마 널 이해해줄거야."
"이해? 정말 이해해줄까? 정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왔지만 하연은 닦을 생각도 않는다. 다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도현의 한마디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며 그를 바라볼뿐이다. 하지만 스스로 내뱉은 말에 자신이 없다. 도현은 주저앉은 하연을 일으켜 세웠다. 새벽 추위에 하연의 온몸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걸 알지못하는듯 하다. 넋이 나간듯 비척비척 도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하연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고 있다.
"우선 방으로 들어가자. 몸부터 녹이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생각? 그래, 생각을 해야겠어......생각을......아주 많이 생각해 봐야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하연을 보며 혹시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당장에 어떻게 해줄수가 없다. 비틀비틀 방안으로 들어가는 하연의 걸음이 딱 멈춰서 있다. 집안에서 버티고 서 있는 또 하나의 벽, 도현의 눈에 혜진이 들어왔다.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방으로 들어가려는 혜진을 붙잡은 도현이 소파로 혜진을 끌어당겨 앉혔다.
"너까지 이러지마. 안그래도 우리 너무 힘들어."
"우리? 우리라니? 누굴 말하는거야?"
"혜진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뭘 이해하라는 건지도 모르겠어."
"혜진아. 어쩔수 없었어. 하연씨나 나 둘 다 등 떠밀려 간거야."
"그래. 그랬겠지. 오빠는 나때문에 하연인 찬혁씨때문에, 어머니 말씀이 맞았어. 찬혁씨와 내가 만나는게 맞는거였어. 찬혁씨랑 나, 정말 비슷한데가 많은데 말이지. 지금 찬혁씨 기분도 이런 기분이겠지?"
"혜진아......."
"유일그룹 외동딸이라니.......어떻게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과 3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았을까? 참 대단하다."
"혜진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의 혜진은 장승처럼 서 있는 하연에게 단 한번의 시선조차 주지않은채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세차게 닫혀버리는 방문을 보며 도현은 막막하기만하다. 멍하니 서 있던 하연이 비틀비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린다. 닫힌 하연의 방문을 잠시 바라보며 망설이던 도현은 혜진의 방문 앞으로 갔다.
"혜진아! 찬혁이 자식한테 가 봐야 될거 같아. 너도 많이 놀랐겠지만, 어쨌든 친구잖아. 찬혁이 자식 보고 금방 다시 올테니깐 그때까지 하연씨 좀 부탁할께."
혜진과 하연도 걱정스럽긴하지만 찬혁이 더 걱정스럽다.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거 같았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봐 불안하기만 하다. 도현은 찬혁의 안부만 확인하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공방을 빠져나갔다.
벽을 기대고 앉은 하연은 천정의 석가래를 세고 또 세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의미없이 천정에 있는 석가래를 세고 있지만 순간순간 비집고 들어오는 잡 생각들이 숫자놀이를 방해했다. 하연은 목이 아파왔다. 고개를 숙이자 뺨을 타고 눈물이 한방울 뚝 떨어진다.
'내가 잘못한게 뭐지? 내가 잘못한게 뭘까? 내가 원해서 아버지 딸이 된게 아니야. 원해서 부모를 선택한게 아니야.'
스르르 쓰러지듯 옆으로 몸을 뉘인 하연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베게를 젖시고 있었다. 어둠에 휩싸였던 방안이 조금씩 밝아올때까지 그렇게 누워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덜컹'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혜진아....."
방을 뛰쳐나오다시피 뛰어나온 하연은 물 컵을 들고 서 있는 혜진과 눈이 마주쳤다. 하연과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혜진의 눈 역시 벌겋게 충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뭔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하연과는 달리 차갑게 시선을 돌린 혜진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버린다. 그녀의 마음처럼. 더 이상 혜진은 어제의 혜진이가 아니다. 그녀에게 자신 역시 어제의 하연이 아닌것처럼. 닫힌 방문 안에서의 혜진은 너무도 멀게만 느껴진다. 손을 뻗으면 금방 열수있는 저 방문이 이젠 철옹성마냥 굳게 닫힌채 자신에겐 한치도 허용하지않을듯 그렇게 버티고 서 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은 하연이 사랑하던 그곳이 아니다. 천장에 석가래도, 마당의 돌절구도, 비 내리는 창도 이제 더 이상 사랑할수 없게 되어버렸다. 방으로 들어간 하연은 손에 잡히는데로 겉옷을 걸쳤다. 유령처럼 방을 나온 하연은 탁자위에 있던 차키를 들고 그렇게 소리없이 집밖으로 나가버렸다.
부르릉, 모두가 잠들어 있는 고요한 새벽에 얼어붙어있던 자동차 엔진이 서툰 기침을 토해낸다. 그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있던 혜진이 벌떡 일어났다. 끼이익 거북한 바퀴마찰음을 들은 혜진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뛰쳐나갔다. 거실 유리창을 통해 하연의 차가 빠르게 공방을 빠져나가는게 보였다.
"하연아..........."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하연의 차를 바라보며 혜진은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마당 한구석을 항상 차지하고 있던 하연의 차를 다시는 볼수 없을것같은 불안감이.......
두번 다시 하연의 얼굴을 볼수없을것 같은 불안감에 혜진은 고개를 떨구었다.
첫댓글 허 갑자기 한꺼번에 진실이 들어나버리니까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원망과 불신으로 등을 돌리게 되네요 앞으로 이들 네남녀가
어떻게 이난관을 풀어갈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