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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력(人歷)으로 500여 년, 현력(現歷)으로 1000여 년 이전에 지구에는 ‘인간’이라는 영장류가 존재했었다. 지능이 매우 높고 도구를 사용하는 데 능숙했다. 또한 의사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한 곳에 뒤섞여 생활해 왔다. 심지어 그들은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며 평화로이 생활했다. 모두가 행복했고 누구 하나 슬픈 이가 없었다.
-인간에 대해(번역본) 제1장 1절-
2.
2341년 ‘인간’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한낱 작은 ‘인간’들은 지구의 뜻을 거를 수는 없었다. 지구에서 수천 년간 살아오며 생명을 마구 주무르던 ‘인간’은 최고 결정자 ‘자연’에 버려지면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있듯 끈질긴 목숨으로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다. ‘동물’ 그들은 새로운 문명을 구축했다. 과거 자신들을 일컫던 ‘동물’, ‘짐승’이란 말은 사라졌다. 스스로 ‘노믹’이라 칭했다.
3.
방 안에는 무거운 공기와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이쯤 하면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높아 보이는 이가 자신의 갈기를 빗질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불안한지 그녀의 큰 귀가 덜덜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돈을 투자했으면 그만큼은 뽑아내야지.”
“그렇지만...”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빗을 내려놓으며 혀를 끌끌 차며 그녀에게 대 놓고 담배 연기를 뿜자 진한 연기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면서 주변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연기가 독한지 콜록거렸다.
“똑똑해서 데려왔는데 쓰레기 일 줄이야. 난 할 말 다 했어. 내보내.”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지지며 불을 끄고 손짓으로 그녀를 내보내라 했다. 잠시 저항이라도 했지만 이내 등 떠밀려 문밖으로 쫓겨났다. 홀로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던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곤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 밑으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이내 문 앞에 주저앉아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 문 앞 길거리에는 많은 이들이 걸어 다녔으나 그 눈물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4.
그렇게 크지 않은 방. 창가로 맑은 햇살이 내리 쬐었다. 온몸의 털은 까치집을 지었고 얼굴에는 기름기로 가득했다. 허리가 뻐근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크게 했다. 불쾌한 향이 입에서 나온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날 밤부터 읽은 책들로 난장판이었다. 분명히 엄마가 보면 크게 노 하실 게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창가를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것까지만 보자…. 이거까지만…. 하다가 이렇게 됬다.
이왕 이렇게 늦어 버린 거 그냥 낮에 자 버리면 되기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다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노믹’과 같이 가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었다. 그들은 모두 감정, 기억,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
책의 한 구절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감정을 공유한다……. 어떤 느낌 인걸까?’
사뭇 '인간'에 대해서 신비로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형이 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는지 알법했다. 책 내용에 깊게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그곳에서 끄집어내는 호통이 들려왔다.
“수! 밥 먹어라! 어서!”
엄마의 목소리다.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는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하다. 일어나기 싫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배배 비틀자 뼈마디에서 소리가 우두둑 들려왔다.
“너 안 내려오면 내가 올라간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말을 듣자마자 반자동 적으로 침대에서 튀어나왔다. 엄마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상황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전에도 한번 들이닥치는 바람에 신명 나게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에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하품을 연거푸 해대며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식탁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식탁은 전쟁터였다. 3남4녀의 집에서 평화로운 날을 기대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들은 서로에게 장난치느라 정신없었다. 그 옆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들은 맑은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손으로 죽을 휘저으며 장난을 친다.
“어서 먹어. 식기 전에”
“응”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이 없었다. 깨작거리며 먹는 걸 본 엄마가 또 한소리 한다.
“너 또 어제 안자고 책 봤어?”
“응”
“어휴! 진짜! 너 정신 좀 차려! 여보! 당신은 애한테 뭐라고 좀 해요! 애 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아빠는 나를 힐끔 쳐다보시더니 다시 시선을 신문으로 돌리셨다.
“내가 진짜 속이 터져서 진짜! 아휴….”
뭔가 엄마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안 하시는 것 같았다. 그때 문을 박차고 누나가 뛰쳐나왔다. 대충 털을 말리고 나온 게 티가 났다. 딱 봐도 또 오늘 지각해서 급하게 준비한 게 뻔했다.
“엄마 나 급해!”
“네가 늦게 일어나고 나보고 어쩌라고!”
“아 몰라! 나 이거 들고 간다?”
“야! 마실 거도 들고 가!”
“아냐 괜찮아! 나갈게!”
잽싸게 빵을 집어 들고 뛰어나가는 누나를 보자니 한심해 보였다. 더는 먹기 싫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벌써 다 먹었니?”
“아니 배 별로 안 고파”
“아니 그래도 조금만 더 먹으렴?”
“괜찮아 나 밖에 나갔다 올게”
“어디 가게?”
“산책”
“그럼 갔다가 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서 사과하고 채소 좀 사와”
“뭐?”
“나간 김에 사와 두 번 왔다 갔다 거리는 일없게”
“하…. 알았어 돈 줘.”
“용돈 있잖아?”
“아 진짜!”
“얘는 진짜 왜 짜증이야. 알았어 주면 되잖아! 저기 돈통에서 꺼내 가렴”
무거운 발걸음을 돈통 앞으로 옮겼다. 대충 지폐 몇 장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집을 나섰다.
밖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니 온몸이 홀가분하다. 요즘 집에서 운영하는 여관을 도와주느라 밖에 나온 적이 없었는데 정말로 오랜만에 나왔다. 일이 없는 날에는 혼자 멀리 까지 돌아다니곤 했다. 엄마는 그러는 내가 아빠 닮았다고 못마땅해 하신다.
마을 변두리를 통해 시장으로 들어갔다가 항구를 거쳐서 돌아오기로 했다. 작은 섬이라 그런지 얼마 걸리지는 볼거리는 그럭저럭 많았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산들바람이 콧잔등을 간질인다. 슬슬 시장으로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날 알아보는 이들이 몇몇이 인사를 했다.
“어 수 구나? 엄마 심부름 왔니?”
“아 네 안녕하셨어요?”
“그래. 형은 집에 들어왔니?”
“아. 아뇨. 아직 안 들어왔어요. 곧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다행이구나.”
“네…. 그럼 가볼게요”
웃으며 인사하는 것도 피곤해서 힘들다. 마을 노믹들은 너무 우리 집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매번 형에 관해서 묻지만 대충 둘러댄다.
얼마 안 가 과일가게에 도착했다. 우락부락한 주인아저씨가 웃으며 인사를 한다.
“어이고야! 이게 얼마 만이야!”
“안녕하세요. 심부름 왔어요”
“음 그렇구나. 늘 가져가는 대로 줄까?”
“네.”
주인아저씨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사과와 여러 과일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한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떻게 토끼가 저런 솥뚜껑만 한 손에 거대한 덩치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산적 출신이라 소문이 자자 하지만 생각보다 부드럽고 꼼꼼한 남자임을 가게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깔끔하고 종류별로 크기별로 잘 분류된 채소와 과일들, 그리고 항상 친절한 말투, 어색한 나머지 인지 부조화가 올 것만 같다.
저 손에 뺨이라도 맞는 날이라면 요단 강 건넌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자! 여기 받으렴. 오늘 계산은 어떻게 할래?”
“네? 달린 거라도 있나요?”
“음……. 네 이름으로 과일들이 좀 달려 있구나”
“예?! 저 몇 주간 여기에 온 적도 없는 데요?”
“그렇긴 한데 조그마한 여자애가 네 이름을 대고 외상을 많이 가져가기도 했지.”
“누구죠?”
“나도 잘 모르겠어. 난 또 네 친구인 줄 알고 그랬는데…. 모르는 일이니?”
“네…….”
누가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워낙 동내에 내 이름이 알려졌다 보니 그런 경우가 간혹 있다.
그래도 옛날에 그랬는데 요즘 이러는 노믹이 아직도 있는지 몰랐다.
“음…. 아! 그래 내가 배달 간 적이 있었거든?”
“배달도 하세요?”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서 배달 뛰어야 겨우 수지타산이 맞거든.”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싱긋 웃으며 주소가 적힌 주소를 건네 주었다.
“여기로 찾아가면 아마 있을 거다.”
“어떻게 생겼어요?”
“나도 잘 모르겠단다. 매일 온몸을 꽁꽁 싸매고 와서…. 목소리를 들으니 딱 여자아이 인 거 같더라고”
“일단 알겠습니다. 계산 한꺼번에 할게요?”
“괜찮겠어? 생각보다 양이 많은데?”
“괜찮아요. 가서 받아내면 되겠죠.”
“착하구나.”
호탕하게 웃으며 수에게 돈을 건네받았다. 집에서 나올 때 대충 돈을 집어서 나온 게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외상을 달지는 않았는데 조금씩 자주 외상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계산서를 보니 1달간 꾸준했다. 매주 토요일에 와서 외상을 했다. 누구인지는 화가 난다.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얼마나 잘난 놈이길래 그런 짓을 했는지 말이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거라.”
“그리고 앞으로 제 앞으로 외상 달려고 하면 팔지 마세요.”
“알겠다!”
가게를 뒤로하고 아저씨가 건네준 종이를 펼쳐보았다.
- 센톤 73 - 75번지, 1200 - 203호 -
난생 처음 보는 주소에 당황스러웠다. 아마 시장 골목에 숨어있는 건물인 듯했다. 거미줄처럼 처져있는 골목들 사이에서 찾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다.
'이거 귀찮게 됬네…….'
그냥 돌아갈까 했지만 그래도 누가 그랬는지 얼굴이라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소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대며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생각보다 과일 가게에서 멀지 않았다. 근처 골목을 좀 꺽어들어 가면 있는 건물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던 중 찾던 주소를 찾았다. 하지만 공사 중인지 거대한 천과 지주대로 가려져 있었다. 앞에서 둘러봐도 어떻게 생각해도 누군가가 살만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공사가 중단 된 지 좀 오래되 보이는 건물이다. 최근 몇 달 전부터 본 대륙에서 건너온 이들이 여기를 재개발한다고 붐이 회사가 도산되어 오히려 슬럼가가 되어 버렸다. 이 건물도 그런 건물 중 하나인 듯했다.
아래쪽 천이 다른 곳에 비해 느슨하게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딱 노믹 하나가 지나갈 만한 크기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또 생각보다 큰 문이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작게 '베르트랑 서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서점이었다.
책을 평소에 많이 보는 편이라 섬에 있는 서점이란 서점은 모두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심지어 주인이 누구인지도 안다.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서점에 의문점이 커졌다. 문을 닫았는지 오래되어 보였지만 여기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도용해 외상을 달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이 돋는다.
크게 한숨을 쉬고 바로 문을 벌컥 열었다.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꿉꿉한 곰팡냄새가 코를 찌른다. 판매대 위에 작은 촛불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먼지가 쌓인 판매대에는 여러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 장자 -
- 맹자 -
난생처음 보는 책들로 가득했다. 책 중 '맹자'라는 책을 집어 들고 한 소절을 읽어내려갔다.
“인간이 지나가는 곳은 모두 교화되며 머물러 있는 곳에서는 노믹을 교화시키는 힘은 신과 같았다…….”
앞뒤로 책을 보니 거의 노믹이 등장했을 때 적었던 책인 듯했다. 인간에 대해 이렇게 적어 둔 책은 또 처음 읽어본다. 책을 넘겨 다른 구절을 또 읽어보았다.
“인간은 근심에 살면서, 안락에서 죽는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들로 가득했지만 뭔가 묘했다. 주변의 다른 책들도 전부 전쟁 전 시대의 책들로 가득했고 전부 대부분이 인간에 관한 책들이었다. 내가 최근에 조사하고 있는 인간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구하기 어려웠고 대충 가벼운 내용만 담고 이곳은 달랐다. 뭔가 굉장한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그렇게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누구야?!”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뒷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져 왔고 눈앞이 흐려졌다.
이내 판매대를 붙잡고 버티려 했지만 힘이 빠졌다. 등 뒤로는 뜨거운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릿한 실루엣으로 자신과 같은 토끼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이 감겼다.
첫댓글 주인공이랑 소녀의 만남이 폭력으로 시작되는가 보네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