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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경과 준이 처음 만난 곳은, 시골구석에 위치한 어느 교도소였다.
근 3년 만에 바깥세상을 영접한 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자유를 만끽했다. 남들처럼 흔한 가족도, 손에 들린 두부도 없이 돌아서는 그때였다.
“이 악마!”
처절한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왜소한 몸집의 여자 하나가 방금 막 출소한 중년 남성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번쩍이는 커터 칼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순간이었다.
“놔! 저 새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 거니까 이거 놓으라고!”
대기 중인 경찰들이 달려와 재빨리 여자를 제압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발악했다.
준은 보았다.
바닥에 엎어진 채 오열하는 그녀를 보며, 조소를 흘리는 남성의 표정을.
준은 그대로 남성에게 달려가 주먹을 꽂았고, 출소한 지 10분 만에 경찰서로 향했다.
“몇 번 와봐서 그런가, 제2의 고향처럼 마음이 편안하네.”
겁에 질린 건지, 분노를 삭이는 건지 모를 정도로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여자의 곁에 앉은 준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다가온 형사 하나가 준의 머리를 파일로 툭 치며 말했다.
“자랑이냐? 출소하고 여기로 출석한 게 자랑이야? 뭐 출석부라도 만들어주리?”
“그럼 좋죠. 도장도 받고, 선물도 받고.”
“미친 놈.”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형사는 노트북을 켜고,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향해 물었다.
“이름.”
“…지세경.”
지세경이라, 이름은 꽤 예쁘네.
“왜 달려들었어요? 커터 칼까지 들고.”
“…….”
“이런 경우도 살인미수인 건 알죠?”
준은 형사와 세경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윽고 세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반드시 죽여야만 하니까.”
“예?”
세경의 음성은 살의와 독기로 가득했다.
“그 인간은, 인간이라고 언급하기도 더러운 짐승이에요.”
“…….”
“우리 엄마아빠의 남은 인생을 몽땅 앗아가 놓고, 정작 그 짐승은 십 년도 채 살지 않고 나왔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이제 보니 알겠다. 세경은 분노에 떨고 있는 것이다.
딱히 건넬 말이 없는지, 형사는 급작 시선을 준에게 옮기고 물었다.
“그럼 넌 왜 때렸어?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저도 짐승인 줄 알고 때렸는데요.”
황당한 대꾸가 들리자, 세경의 시선이 준 쪽으로 움직였다.
“진짜예요. 다른 이유 없는데?”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린 형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량껏 넘겨줄 테니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말란 말과 함께 둘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준은 앞으로 걸어가는 세경을 붙잡고 물었다.
“저녁 같이 안 먹을래요?”
그런 준의 손을 휙 뿌리친 세경은 잔뜩 붉어진 눈매로 날카롭게 말했다.
“누가 당신더러 도와달라고 했어? 고맙단 인사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착각하지 마, 그 짐승과 같은 교도소에 있었단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니까.”
충분히 화가 날만 한 소리였지만, 준은 멀어지는 세경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
준은 집으로 향하다 말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좁은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한 남자 때문에.
“네가 왜 여기 있냐?”
살벌한 눈빛으로 묻자, 한 발 늦게 준을 발견한 남자는 짤막한 미소와 함께 손에 든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짓밟으며 답했다.
“두부라도 사오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남자의 이름은 권태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준과 둘도 없는 친구였던, 아니. 그런 척했었다. 단순히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많이 힘들었지? 대신 고생하느라. 아는 교도관 시켜서 더 챙겨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제대로 했나 모르겠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코웃음이 쳐졌다.
그것도 잠시, 준은 망설임 없이 태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내 인생 이렇게 말아먹지 않았어. 알아?”
“준아,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태주는 여유로웠다.
“네 인생을 망친 건 내가 아니라 네 아버지야. 잊었어? 넌 살인마 자식이라는 거.”
그래서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치켜들고 태주의 얼굴로 돌진하고 싶었지만, 준은 이를 악 물고 참으며 잡고 있던 멱살을 거칠게 내려놨다.
“와, 거기 있으면서 인내심도 늘었나 보네.”
태주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준에게 쥐어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제부터라도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 네 아버지처럼 되기 싫으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두려웠다.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어도, 돈 많은 도련님 앞에선 뭐든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돈이라는 게 그렇다. 있는 자일수록 더 많은 특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죄 없는 사람을 3년씩이나 썩힐 만큼.
“빌어먹을!”
준은 손에 쥔 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겉 포장지가 찢어지자, 안에 가득 들어있던 수표뭉치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동시에 눈물도 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재수 없게도.
***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 넘도록 준은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다섯 평도 채 안 되는 단칸방이라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지만, 이렇게 보니 지내왔던 교도소와 다를 바 없는 삶 같았다.
늦은 밤이 돼서야 잠에서 깨어난 준은 외투 하나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둘 또는 셋씩 붙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준은 홀로 걸었다.
“어머, 너 출소했구나?”
준은 그나마 저를 반겨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단골로 지냈던 어느 노래방 주인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나야 맨날 똑같지. 출소 기념으로 무료 넣어줄 테니까, 실컷 부르고 나와.”
준은 짧은 목례와 함께 빈 방으로 들어섰다.
제 집보다도 넓은 소파에 앉아 기계를 켜고, 옆에 놓인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워낙 오랜만에 방문이다 보니 잡히는 것조차 익숙지 않았지만, 최대한 옛 기억을 되살려 자주 불렀던 노래 번호를 입력했다.
비틀즈의 <Hey, jude>가 재생되고.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이봐, 주드. 나쁘게만 보지 말고 슬픈 노래 하나를 골라서 좋은 노래로 만들어봐…)”
천천히 노래를 부르며, 준의 시선이 문 위로 보이는 투명한 유리창으로 향했다.
동시에 그 옆을 지나가는 남자와 여자.
세경이었다.
단번에 그녀를 알아본 준은 노래도 끄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모르는 남자와 함께 한 세경은 복도 맨 끝 방으로 사라졌다.
준은 멈추지 않고 그들이 들어선 방 앞에서 안쪽을 쳐다봤다.
노래를 부르며 세경의 허리를 더듬는 남자와, 애써 아닌 척하는 세경을 보는 순간 머릿속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준은 그대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 그녀를 더듬는 남자를 붙잡아 옆으로 날려버렸다.
“악!”
남자의 비명과 함께 놀란 세경이 벌떡 일어나며 준을 바라봤다.
“당신…!”
“나와.”
가냘픈 세경의 손목을 잡으며 움찔했지만, 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끌고 노래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서는 준을 있는 힘껏 뿌리친 세경이 소리쳤다.
“미쳤어?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러는 넌 뭐하고 있었는데?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겁이 없어!”
상관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화가 치밀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경은 기막힌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받아쳤다.
“이게 내 일이야. 내가 내 일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러면서 왜 이런 데로 왔는데? 그런 일할 거면 노래방이 아니라 빠로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세경은 순간 멈칫하며, 말없이 준을 노려봤다.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어. 돈만 벌 수 있다면 난 뭐든지 해!”
준은 그런 세경의 어깨를 세게 붙잡고 외쳤다.
“네 부모님은 어쩔 건데?!”
“뭐…?”
“억울하게 돌아가신 네 부모님이 너 이러는 꼴 보고 싶어 할 거 같아?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퍽 소리와 함께 준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날아온 세경의 작은 주먹이 그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네가 뭔데 우리 부모님을 들먹여?”
“…….”
“뭐나 된 것처럼 굴지 마. 결국 너도 같은 범죄자 쓰레기에 불과하니까.”
세경이 돌아서는 순간, 다시금 그녀를 붙잡아 벽으로 밀친 준은 그대로 세경의 입술에 짙게 키스했다.
놀라 밀어낼 틈조차 없었다.
숨이 막힐 만큼 빠르게 입을 맞추며, 어느새 세경의 입술은 립스틱으로 번져 있었다.
곧이어 입술을 뗀 준이 말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뭐든 한다고?”
“…그래.”
“그럼 따라와. 내 돈 내고 기꺼이 즐겨줄 테니까.”
***
준은 세경을 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좁디좁은 단칸방에 세경을 들어앉히자,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도망칠 생각 말고 잠자코 있어.”
세경이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대는 걸 확인한 준은, 작은 냄비 하나를 꺼내 무작정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솔솔 불어오는 맛있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지만, 세경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윽고 팔팔 끓는 라면을 작은 밥상 위에 올린 준은 세경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먹어.”
“…싫어.”
세경이 젓가락을 내던졌지만, 준은 그것을 다시 가져와 조금 더 세게 쥐어주었다.
“먹어. 먹고 살아. 네가 살면, 필요한 돈 줄게.”
그때, 세경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목 놓아 엉엉 우는 세경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른 놈들처럼 굴어. 이딴 식으로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준은 눈물과 함께 번지는 화장을 하염없이 닦아내는 세경의 두 손을 막아서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그럼 같이 죽을래?”
일순 정적이 흐르고, 준의 시선 위에 놓인 세경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같이 죽자, 그럼.”
첫댓글 준과세경 이런걸 우연으로 만낫다고해야하나 아니면 필연으로 만났다고 하는건지
아 오 머리아플려고하네 ㅡㅡ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아마... 필연일 거예요ㅎㅎ
온영님 오랜만이네요~^^ 생각많이 났는데 ㅎㅎ 세경이의 기구한 운명 앞으료도 기대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설탕님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이에요ㅠㅠ 감사합니다!
즐감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즐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