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도련님
......
창 밖으로 지는 해가 보였다.
첫날부터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별로 한 건 없는데 정신 없는 일들로 심신이 고단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파스타 몇 개를 만들었다. 중간에 온 손님 한 테이블(그마저도 옆집 가족)을 받았고 나머지 뒷정리를 했다.
시간은 훌쩍 가버렸고 다리에서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정리를 마치고 할머니와 차를 마셨다. 구미는 창가 자리에 앉아 대추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감상에 젖어 한동안 창 밖만 바라보던 할머니에게 말을 꺼냈다.
“저희 내일은 뭘 만들어볼까요?”
“뭐든 좋아. 오늘 정말 즐거웠어. 내일두 기대된다, 얘.”
“다행이에요. 그럼 내일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낸 구미는 미리 생각해둔 요리 동영상을 할머니께 보여 주기 위해 준비했다.
그런데 그 때, 가게 문이 덜컥 열렸다. 남자 하나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옥탑방의 그 남자인가 싶어 구미는 황급히 고갤 돌렸다. 그런데 인사 하는 목소리가 전혀 달랐다.
“저 왔어요. 잘 지내셨죠?”
“아니, 이게 누구야? 유신이가 왔구나.”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버선발로 걸어가 남자를 반겼다. 그 남자가 아니란 사실에 안도한 구미는 그제야 고갤 돌려 현관을 바라봤다.
그는 옥탑방의 그 인간이라 오해한 게 미안할 정도로 반듯한 외모에 단정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가게가 낮아 보일 정도로 훤칠한 키에 할머니에게 설핏 내비치는 짧은 미소가 눈에 띄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걱정돼서 와봤어요. 지난번에 병원 가실 때도 저 안 부르셨잖아요.”
“어유, 그게 뭐 별일이라구 바쁜 사람을 불러.”
“근데...손님이 계셨나 봐요.”
관람객처럼 두 사람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구미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갤 돌렸다.
“아, 서로 인사들 해. 여긴 내 둘째 손주, 유신이. 그리구 저쪽은 오늘부터 나한테 음식 가르쳐주는 고구미 선생님.”
처음 들어보는 선생님 호칭이었다. 당황한 구미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아..안녕갑습니다. 아니, 안녕하세요. 고구미에요.”
“네. 안녕하세요. 최유신입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할머니는 유신을 잡아 끌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 와서 앉어. 밥은? 먹었어? 안 먹었음 차리구.”
“괜찮아요. 저녁에 약속 있어요.”
“그래. 그럼 차라도 한 잔 해.”
할머니는 두 사람만 남겨둔 채 차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사라졌다. 덜렁 소개만 시켜주고 가버리다니.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숨이 턱 막힌 구미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단둘이 있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그런 적이 있긴 있었던가.
차마 그를 쳐다보기 어려워 구미는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때 유신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희 할머니께 음식을 가르쳐주신다구요?”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유신의 태도는 상당히 의아한 듯 보였다.
할머니가 어디 가서 음식을 가르쳤으면 가르쳤지 배울 수준은 아닌데 한참이나 어린 구미가 선생처럼 보이지 않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의 의문을 단번에 알아차린 구미는 서둘러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아...가르쳐드린다기보다는...할머니랑 같이 새 메뉴를 개발하고 있어요.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아, 그런 거군요.”
“그래서 오늘부터 할머니랑 이것저것 만들어보고 있어요.”
좀 더 대화를 이어나가 보려했지만 도무지 할말이 없어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구미는 그가 어려웠다. 처음 만난 사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쉽게 말을 나누기 어렵게 했다.
잘생긴 외모와 깊은 눈빛은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게다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품위가 넘치는 유신은 구미의 마음 속 잠재되어있던 하인근성과 굽신거림을 불러일으켰다.
금방이라도 도련님이라 불러줘야 될 거 같은 기분을 느끼며 구미는 괜스레 대추차만 홀짝였다.
“저....”
“예, 도련님.”
“....”
“예? 아뇨...예?”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온 구미는 허겁지겁 말을 주워담으려 애썼다.
수치스러웠다. 뺨과 귀가 달아올라 화끈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하지만 정작 유신은 신경 쓰지 않았다. 테이블에 차를 흘린 구미에게 티슈를 찾아 건넸다.
“어우,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제가 갑자기 돈까스 도련님 도시락이 너무 먹고 싶어서...”
뭔 소리야, 고구미!!!
급조한 변명 치고 상당히 별로였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간 더 큰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 구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딱히 잘 보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는 건 싫었다.
그런데 유신은 진심으로 믿는 듯 진지하게 고갤 끄덕였다.
이렇게 그냥 도시락 좋아하는 여자가 된 건가.
좀 더 그럴싸한 대답을 하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아, 네. 근데 지금 입고 계신 옷, 혹시..”
유신은 구미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가리켰다.
역시 너무 커서 이상해 보이는 건가. 구미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 이거 제 옷 아니에요. 오늘 어쩌다 일이 있어서 할머니께서 잠시 빌려 주신 거에요.”
“어쩐지, 저희 형이 입던 거랑 비슷하다 했어요.”
유신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은 구미는 천장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형이요? 혹시 여기 옥탑방 사시는 분?”
“네.”
“네에? 정말요?...아니, 어쩌다가. 아니, 왜....그러시구나....”
형제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구미는 도무지 두 사람이 같은 집에서 함께 자란 형제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잠시 머릿속으로 두 사람을 세워놓고 비교해봐도 외모하며(물론 옥탑방 남자는 수염에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보여지는 이미지가 극과 극이라 비슷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찾자면 둘 다 키가 크다는 점?
“그 옷, 형이 무척 아끼는 옷이거든요.”
“아, 정말요?”
유신의 말을 듣자 자신이 아끼는 옷이니 꼭 도로 가져오라던 옥탑방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였구나. 그냥 그 남자가 심술을 부리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다니.
같은 말이라도 더 신뢰가 가는 유신의 말을 들으니 괜히 옷에 뭐 흘린 건 없나 다시 살펴보았다.
딱히 명품이라거나 비싸 보이진 않았고 그저 흔하디 흔한 티셔츠 같은데.
구미가 옷 이곳 저곳을 꼼꼼히 살피던 중 할머니가 차를 내왔다.
“유신아, 자주 좀 들러. 밥 먹으러 와두 좋구.”
“네. 그럴게요. 근데 들어보니까 무슨 메뉴를 새로 만드신다고.”
“어, 요즘 장사가 통 안되니까. 뭐라두 해볼라구. 내가 구미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했지. 오늘은 그 뭐냐, 파?”
“파스타요.”
“어, 그래. 그거 만들었어. 내 입맛엔 영 아닌데 그래두 구미랑 같이 이것저것 하니 재밌어. 신기하구. 오랜만에 일 좀 한 거 같아 좋아.”
할머니는 들떠서 오늘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유신에게 얘기했다. 중간중간 ‘파스타’라는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 구미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신은 웃는 듯 마는 듯 하는 특유의 미소를 띠며 할머니의 얘기를 진지하게 귀담아들었다.
“근데...그렇게 장사가 안되면 그냥 집으로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 건강도 안 좋으시잖아요. 아버지도 많이 걱정하세요. 무리하시다 또..”
“어휴, 됐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기가 제일 맘 편해. 그리구...”
할머니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 그만두었다.
구미는 그 다음 말이 궁금했지만 유신은 더 묻지 않았다.
조용해진 가게 안은 해가 지면서 점점 더 어두워졌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던 구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가게의 불을 밝혔다. 그러자 유신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전 이제 가봐야겠어요.”
“벌써? 왜, 좀 더 있다 가지.”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그럼. 참, 가는 길에 구미도 좀 태워줘. 옷이 저래서. 차 갖고 왔지?”
할머니는 유신과 함께 일어나며 구미를 부탁했다. 집에 갈 생각이 없었던 구미는 할머니의 뜬금없는 제안에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유, 아니에요. 저 걸어가면 금방이에요.”
“괜찮아요. 모셔다 드릴게요.”
“그래. 타구 가.”
“저 진짜 괜찮은데...”
미처 자리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구미는 할머니의 손에 떠밀려 가게 밖으로 나왔다.
정신 없이 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골목 길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올라탔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의 차를 이렇게 막 타도 되나 싶었지만 구미는 어느새 유신에게 목적지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가만히 말을 듣던 유신은 몸을 숙여 구미의 안전벨트에 손을 뻗었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그 전개.
좁은 차 안에서 가까워지는 두 사람.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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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러다가 할머니 손주들과 삼각관계로 엮이는건 아닐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