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타이밍
티셔츠 꼴이 왜 저 모양이지?
구미는 침대에서 헐레벌떡 일어나 유미에게서 옷을 낚아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노란색 귀여운 티셔츠였는데 지금은 그냥 군데군데 푸른 물이든 걸레 짝이었다.
“이거..이거, 이거, 이거...이거 왜 이래? 색이, 색이 이상해졌잖아.”
“뭐야, 네꺼야?”
“내꺼 아냐!!! 아니, 왜 이렇게 됐냐고!!”
“이게 어디서 언니한테 승질이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난 그냥 어제 빤 청바지들 널려고 가보니까 있어서 물어본건데. 청바지때문에 물든거겠지, 뭐.”
청바지라니. 어제 세탁기 안에 돌아가고 있던 게 청바지였다니.
세탁실의 불을 켜지 않은 터라 어두워서 세탁기 안에 뭐가 돌아가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구미는 티셔츠를 다시 한 번 펼쳐서 살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까지 봤지만 도무지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딱 의류 수거함에 넣기 좋은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망연자실한 구미는 머리를 감싸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오, 이거 어떡해애애. 난 망했어. 완전 망했다고.”
“으이구, 그러게 잘 좀 보고 넣지. 암튼 난 출근해야 되니까 잘 해결해보소.”
잘 해결해보라니. 이미 곰팡이 핀 식빵마냥 푸르게 물들어버린 이 옷을 어떻게 잘 해결해야 할까.
할머니께 죄송하기도 했지만 제일 두려운 건 옥탑방 남자가 보일 반응이었다. 사과하면 받아주려나.
하지만 옥탑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는 상상만으로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와 더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그냥 할머니에게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건네주고 이 사건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꼬여도 너무 꼬여버렸다.
“아이고...아이고...”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던 구미는 혹시나 비슷한 옷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서둘러 인터넷 쇼핑몰을 뒤졌다.
요즘같은 개성시대에 인터넷 쇼핑몰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이런 티셔츠 하나 없을까?
없었다. 검색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했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무지 그 옷과 비슷한 티셔츠는 없었다.
파랑새 종류가 어찌나 다양한지. 또 조금 비슷하다 싶으면 옷에 노란색 옵션이 없었다.
그렇게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마우스를 흔들어가며 검색에 온갖 성의와 열정을 다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구미는 더 찾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몇 년을 늙어버린 듯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냥 이대로 할머니와 연을 끊을까. 하지만 가게가 망해도 말없이 도망치지는 않겠다던 할머니의 말이 귀에 맴돌며 심장을 콕콕 찔렀다.
“그래...가서 사과하자.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줄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 구미는 엉망이 된 옷을 곱게 접어 쇼핑백에 담았다.
.....
“아냐, 받아줄 리 없어...분명 개지랄할거야.”
식당 앞 골목에서 구미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이나 주변을 서성거렸다.
최대한 좋은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막상 식당이 눈앞에 보이니 좋은 수가 없어 답답했다.
아끼는 옷이 걸레짝이 되어 돌아왔는데 옥탑방 그 남자 성격에 절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사냥개처럼 사납게 으르렁 거리는 그 얼굴이 떠오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왜 하필 거기에 청바지가 들어있었던거야. 울상이 된 구미는 어제 자신가 저지른 무신경한 행동을 후회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때 식당 안에 계신 줄 알았던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든 채 골목으로 들어왔다.
“일찍 왔네? 문이 잠겨있어서 못 들어 갔구나?”
할머니때문에 깜짝 놀란 구미는 서둘러 쇼핑백을 뒤로 숨겼다.
반갑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니 엉망이 된 티셔츠를 도저히 건낼 수가 없었다.
만약 이걸 보여드리면 어떻게 반응 하실까. 아무리 할머니라도 기분 나쁘시겠지. 어쩌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화내실지도.
수만가지 부정적인 미래가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옥탑방 남자에게 쥐 잡듯이 잡히기도 하고. 할머니가 대문에서 소금을 뿌리며 자신을 내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잠깐동안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 구미는 일단 할머니가 보지 못하도록 쇼핑백을 철저하게 감췄다.
그리고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마냥 이상한 표정를 지으며 할머니 뒤를 따라 쭈뼛쭈뼛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는 이것저것 요즘 사람들이 뭘 좋아할까 고민하며 샀다고 시장에서 사온 재료들을 구미 앞에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식당 한쪽 구석에 내려놓은 쇼핑백때문에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해도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시작해보자며 할머니는 힘차게 두 팔을 걷어 붙였지만 구미는 어정쩡하게 서서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어찌하여 요리를 시작하긴 했지만 구미는 중간중간 할머니가 불러야 정신을 차리곤 했다.
“구미야?”
“....”
“구미야?”
“..네, 네?”
“무슨 일 있어? 오늘따라 고민이 많아보여, 얼굴도 피곤해 보이구.”
“아뇨, 전혀요.”
“그래? 무슨 일 있는거면 오늘 좀 일찍 끝내구 들어가서 쉬어.”
“어우,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진짜. 하하하하.”
구미는 입꼬리만 올라가는 어정쩡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애써 괜찮은 척했다. 겉으로 티 내지 말아야 하는데 거짓말에 영 능숙하지 못했다. 누가봐도 안색이 어두웠다.
오늘 안으로 옷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긴 해야겠지만 도무지 언제쯤 말하는게 좋을지 몰랐다.
‘그래, 일단 지금은 아니야. 요리는 다 하고. 그러고 나서 말하자.’
사실대로 말하기를 뒤로 미룬 구미는 할머니가 사온 재료를 가지고 목살 스테이크 만들기에 집중했다.
알맞게 굽힌 목살에 갓 만든 간장 소스와 구운 채소를 곁들여 접시에 담아내자 그럴듯한 요리가 완성됐다.
한참 동안 불 앞에 서 있어서 얼굴이 달아오른 할머니는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어유, 맛나겠다. 얼른 먹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너무나 좋아하는 할머니를 보자 구미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아직 아니야.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또 다시 타이밍을 놓친 구미는 호두까기 인형처럼 턱만 움직여 의무적으로 음식을 씹었다.
맛은 있는데 도무지 맛을 음미할 기분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없게 음식을 먹으며 구미는 틈틈이 얘기할 기회만 노렸다.
하지만 오늘따라 할머니는 이야기를 끝없이 술술 풀어 냈고 결국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적절한 때를 찾지 못했다.
배는 부르고 속은 답답했다. 언제까지 미룰 참이야.
그렇게 스스로 꾸짖으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내뱉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할머니가 상을 치우기 위해 일어나는 바람에 또다시 실패했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따라 일어난 구미는 눈치만 살피며 초조해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는 자꾸만 핑계가 늘어갔다.
‘그래. 설거지만 끝나면 하자. 일단 다 정리하고 말하는거야.’
그렇게 설거지를 끝내고, 냉장고 정리에, 냉동실 성에 제거, 주방에 찌든 때 청소, 내친김에 홀 바닥 청소까지 마친 구미는 막 화장실 청소를 하러 갈 참이었다.
그 때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할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유신에게서 온 전화였다.
벨은 계속 울리는데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게 안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어디로 가신 건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구미는 고무장갑을 재빨리 벗고 전화를 대신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마문희씨 핸드폰 아닌가요?”
전화를 건 사람은 유신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구미는 서둘러 대답했다.
“맞아요. 저 구미에요. 할머니랑 같이 일 하는.”
“아, 구미씨군요. 근데 저희 할머니는....”
“지금....여기 안 계세요. 잠깐 나가셨나봐요. 옥상에 가셨나? 무슨 일이신데요? 제가 할머니께 전해 드릴게요.”
“할머니께 지난 번에 병원 가서 약을 받아오셨는지 여쭤 보려구요. 오늘 담당 의사 선생님한테 연락이 와서.”
“아...약이요? 잠시만요. 제가 지금 나가서 할머니를 찾아볼게요. 아마 옥상에 가셨을 거에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지 않은 채 구미는 할머니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현관문이 활짝 열리지 않았다.
마치 문 뒤에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문이 열렸다. 고장이 난 건가.
수상하게 생각한 구미는 열린 틈으로 겨우 빠져나와 식당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 뒤를 살폈다.
첫댓글 아 현관문이 외 고장이난걸까?
구미의 덜렁거림이 문에 무언가 받쳐져 있는걸 모르고 그냥 열어서 그런걸지도 ㅡㅡ
아무튼 귀추가 궁금해집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