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물 조심해”
툭 내뱉은 서봄의 말 한마디에 시끄럽던 회식 자리에 적막이 맴돌았다.
“…서봄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서봄은 정신을 차리자 모두가 자신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팀장님 죄송해요 살짝 졸았나봐요”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서봄을 바라보며 이팀장은 매우 못 마땅하다는 듯 서봄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신입사원이 첫 회식자리에서 졸면 쓰나, 자 받아요”
서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잔에 가득 찬 소주를 보곤 어떤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이팀장은 그런 서봄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소주잔 가득 술을 따라 주었다.
몇시간 후
모두가 정신을 잃고 3차 를 외치고 있던 그때 이팀장의 묵직한 손이 서봄의 어깨에 툭 떨어졌다.
“이봐! 봄! 이름도 이쁘네 봄! 3차 노래방 가는거지?! 거기선 내 옆에 앉는거다? 약속!”
그의 역겨운 술 냄새가 서봄의 코를 찌르는 순간 그녀의 마음 한 구석 끄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지만
여전히 억지 미소를 지은 채 서봄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선 안돼 좀만 참자’
그녀는 이팀장의 손을 툭 내려 놓고는 말했다.
“팀장님 많이 취하셨어요 오늘은 늦었으니 저 먼저 집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이팀장은 서봄의 손목을 탁 낚아 채며 그녀를 끌어 당겼다.
“가긴 어딜가 나랑 한 잔만 더 하고 가 한잔만”
이미 초점 없는 눈으로 비틀 거리는 이팀장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서봄은 그녀를 잡은 손목을 잡아 뺐다.
그리곤 그를 벽으로 밀치며 말했다.
“이봐,이덕진 팀장 내말 똑똑히 들어 너 다음주에 그여자랑 계곡가면 죽어,젊은 여자 들한테 찝쩍 거릴 시간에
집에가서 니 불쌍한 와이프랑 어린 아들래미나 한테나 잘해줘 그리고 한번만 내 몸 건드리면 그때도 죽어 알아듣겠니?”
이팀장은 고개를 떨군채 혼자 뭐라뭐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서봄은 스르르 미끌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새벽 한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그녀는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 놓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잠시 아까의 일을 돌이켜 생각에 잠긴 그녀는 두눈을 꼭 감으며 자책했다.
‘아… 순간 욱해서 말해버렸어…’
어릴 적 시골의 한 작은 수도원 보육원에 맡겨진 서봄은 종종 사람들의 미래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언제 죽는지,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환영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고 때론 소름돋는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 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한껏 쥐어 뜯은 후 침대 밑에 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오늘 하루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악마의 환영과 환청이 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담대하게 또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뭐야, 기도 내용이 너무 재미 없는거 아니야?”
순간 그녀의 작은 원룸 창가쪽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숨을 한껏 들이키며 눈을 뜨지
않은 채 다시 기도를 했다.
‘주님… 더 이상… 더 이상은 이런 악마의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감은 좋네 악마인건 어떻게 알았데? 뭐, 정확하겐 악인 이지만…”
다시 한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획 돌려 창가쪽을 바라 보았다.
그곳엔 검은 정작을 입은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의 한 남자가 창가에 기대 팔짱을 낀 채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악!!”
그녀는 큰 소리를 내며 놀라 자빠졌다.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점점 다가왔다.
“가..까까이 오지마!! 경찰에 신고할 거야!!”
“경찰? 좀 더 대단한 인간인줄 알았는데 고작 경찰을 부르겠다고? 이건 좀 실망인데”
남자는 서봄에게 시선을 고정하곤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서봄은 몸을 바르르 떨며 그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새까만 머리와 하얀 피부 그리고 그가 내 뿜는 담배연기가
달빛에 비춰 순간 매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죠? 원하는게 있으면 다 가져 가세요…”
“정말? 정말 다 가져가도 돼?”
남자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 보다 말을 이어갔다.
“내가 원하는건 넌데, 진짜 가져도 되는거야?”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는 곧 좁은 방안을 가득 채워 앞이 안보일 지경이였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그것만 빼고…”
서봄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고 그말을 들은 남자는 곧 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은 남자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악인이 된 이후로 이렇게 웃긴 인간은 너가 처음이야 그래도 대단하네 보통 날 보면 기절해 버리던데
세마디 이상 나눈 인간도 너가 처음이야”
남자의 얼굴은 서봄의 얼굴 가까이로 훅 다가 왔다.
남자는 흥미롭게 이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쓱 미소를 지었다.
“엄마랑 진짜 똑같이 생겼네? 뭐 그이야긴 됐고, 난 이노 라고해 눈치 챘겠지만 보통 사람 눈엔 내가 보이진
않아, 거두절미하고 지금 사후세계가 완전히 망했버려서… 아, 물론 내 잘못으로 망한거지만… 어쨌든 조만간
내 능력을 잃을 것 같은데 지금 나랑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야 나좀 도와줘야겠어”
서봄은 두눈을 깜빡거리며 그 남자를 멍 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봐? 내말 듣고 있는거야?”
“네….네… 너무 갑작스럽고… 그러네요…”
“좀 일어나서 앉아봐”
이노가 서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 서봄 의 얼굴을 읽기라도 한 듯 이노는
“걱정마, 안죽어, 안잡아먹어”
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이노의 손을 잡은 순간 이봄은 뜨거운 불이 가득한 허허 벌판 위
어린 남자 아이가 흐느껴 우는 모습의 환영을 보았다. 다행이 이노는 그녀가 본 환영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녀가 침대 에 앉자, 이노는 그녀의 책상위에 걸터 앉았다.
“원래, 이렇게 만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너가 도망갈 것 같더라고 그래서 집에서 만나야
겠다고 생각했어 놀랐다면 미안”
그의 표정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서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당신은 귀신 인가요?”
“귀신? 귀이시인?! 허, 나를 지금 그런 잡것들하고 비교하는거야? 너무 실망스러운데? 난 귀신이 아니야 악마지”
악마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서봄은 그녀도 모르게 헉 하며 두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아! 오케이 이해해, 세상 사람들이 악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근데 뭐 정확하게
말하면 난 악인이지만…”
“악인은 뭐죠?”
“뭐, 악마와 인간의 중간 지점에 끼어있는 불쌍한 영혼이랄까…”
이노는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했지만 곧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나랑 일 좀 같이 해줘야겠어, 지금 세상이 엉망이거든…”
“자…잠깐만요 지금 너무 갑작스럽고…혼란스럽거든요?”
“괜찮아 차차 서로 알아가면되지 어후 이런 재판에 늦어버렸네, 제림이 화가 많이 났겠는걸? 아무튼 조만간 날 다시 만나게 될거야 그때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금색 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것도 원대한 계획서의 일부라면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겠지만, 내가 너의 운명은 시간이 없어서 확인을 못했거든,
지금 그책이 나한테 없는 상태이기도 하고, 어쨌든 도와주는거다? 이런, 벌을 두배로 받겠어…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또 보자 서봄!”
담배 연기는 점점 방안을 가득 매우더니 남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올랐다.
“잠깐만요! 저기요….저기요!!”
서봄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떳을 때 자신이 침대위에서 골아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물 한잔을 들이켰다.
‘이상한 꿈이네’
그녀는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두근대는 가슴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가 시계를 봤을 때 새벽 5시 를 넘기고 있었고 자욱한 연기가 달빛을 가려 흩어졌다.
첫댓글 신이 내린건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