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5 일 비오다 맑음
‘론세스바에스’에서 라라소아냐‘까지 (27.4KM 거리)
눈 뜨니 사방이 어둠이다.
봄비 그것도 밤새 봄비 내리는 소리가 곁에 다가와 소근거리니 낯선 땅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나게 한다.
아직 일어난 사람은 없다. 몇번이고 뒤척이다가 침낭 자크를 조심스럽게 열고 밖으로 나오니 누군가가 덧문 안쪽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 불빛 아래 글을 쓰고 있다. 어제 하산 길에 뵌 정 선생님이다.
실내와 격리되어 불을 켜도 되었지만 작은 불빛이라도 들어가 취침하는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불편을 감수하고 계셨다. 처마 밑에서 어둠이 빗물에 씻기는 것을 바라본다.
06:00 어둠속에 순례자들이 하나 둘씩 떠난다.
07:00 주방에서 간편식 누룽지로 아침을 해결하고 우리도 걷기 시작한다.
희미하게 보이는 교회건물을 돌아보며 어제 밤 호의를 베풀어 주신 교회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맘을 전해본다.
포장도로를 따라 옆 숲길로 연결된 순례자의 비포장 길은 비에 젖어 있다.
‘론세스바에스’은 '가시골짜기'란 뜻으로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스페인 나바라 지방의 깊은 산골 마을이다.
부술 부슬 비가 내려 다시 판초우의를 입는다.
뒤에 따라오던 순례자들이 물웅덩이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더니 앞질러 나간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제 일찍 도착하여 깨끗한 숙소에서 머물다가 아침 주방에서 만난 의정부에서 오신 김 선생의 알베르게 정보가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어느 곳이든지 가능한 빨리 도착하면 시설이 괜찮은 알베르게에서 머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새벽같이 출발하고 도착지 알베르게 관리자들이 오픈하기 전부터 알베르게 정문 앞에 배낭을 도착 순서에 맞추어 줄 세우고 기다리던 장면을 수없이 보았으니....
오늘을 좀 더 빨리 도착하여 더 편하고 안락한 잠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맘이 조급증을 불러일으킨다.
한참 뒤 숨 가쁘게 따라 오는 친구를 발견한다.
아서라 이제까지 육십이 넘도록 달려만 온 인생인데 뭐가 바쁘다고 순례 길에서 까지 바삐 걸어가야 한다니 .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업을 마친 후 직장에서 까지 온갖 경쟁으로 한 평생을 다 보내놓고 이제는 자신과 다시 경쟁하고 있다.
그 좋아하는 볼 가지고 노는 각종 경기들도 경쟁하기 싫어 이젠 그만 내려놓았는데...
하룻밤 자는 일에 그리고 다음 날엔 다 놓고 미련 없이 떠나는 일이 전부인 순례 길에서 까지 여유와 사색 없이 앞선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숨 가쁘게 걸어야 한다니...
조금 불편해도 그리고 조금 누추해도 하룻밤 지나면 또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하는 것이 순례길이 아닌가?
그렇게 영악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아직도 경쟁이라는 겉옷을 벗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또 한 번 발견한다.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자며 걸음을 늦추고 30여분 거리를 한 시간쯤 걷다보니 ‘부르게테’ 마을이 나오다.
이곳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종종 머물었다는 호텔이 있어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음 순례 길에는 이곳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가 썻다는 이곳 ‘바스크인’들이 프랑스 군대와 치른 전쟁이야기도 읽으면서...
그래선지 요새처럼 튼튼하게 지어진 집집마다. 빨간 창문틀이 인상적이다.
화단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봄비에 싱그럽게 피었다.
이른 아침에 문을 연 레스토랑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아침 식사를 한다.
잠시 모닝커피를 마시며 점심에 먹을 빵과 사과 그리고 바나나를 구입한다.
헤밍웨이는 이곳에 머물 면서 이른 아침에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 보면서 순례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했을까 ?
마을 끝 부분에서 콘크리트로 된 징검다리(우로비 강 상류)를 지나니 말들이 넓은 목장에서 자유롭게 방목하고 있다.
한 시간 쯤 더 걸으니 ‘에스피날’이라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창문틀이 뽀쪽한 삼각형의 독특한 현대식 교회가 눈에 띤다. 가이드북에는 이 마을의 역사가 1000여년 되는 오래된 마을에 교회 스타일이 어딘가 안 어울린다.
마을을 벗어나 다시 울창한 너도밤나무 숲을 지나면서 하늘이 맑게 개고 눈부신 햇빛이 푸른 초원을 비춘다.
새벽부터 걸친 판초우의만 벗어도 살 것 같다.
하늘에는 수많은 독수리들이 날아다니다.
맹금류가 많다는 것은 이곳이 다양한 조류가 살고 있고 그만큼 청정하여 사람들도 살기 좋은 표시다.
이곳저곳 이름 모른 야생화들이 피어있다.
맑은 바람이 언덕을 타고 지나가다.
순례자들도 발길을 멈추고 스마트 폰 카메라를 들어댄다.
오늘 순례 길은 몇 개의 봉우리만 넘으면 대체로 하행길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변 옆 숲길 사이로 순례 길은 이어지고 마을 마다 작은 교회가 있다.
푸른 넓은 목장을 지나면 잡목이 우거진 숲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배낭에 매달아 놓은
젖은 양말이 거의 다 마를 무렵 숲 속 그늘을 찾아 친구와 바켓트빵과 과일로 점심을 해결한다.
아이치 형태의 중세풍의 ‘라비아 다리’가 ‘수리비’라는 마을 입구에 걸쳐있다.
옛날 공수병이 유럽을 휩쓸고 갈 때 공수병에 걸린 동물을 데리고 가운데 아치 주위를 세 번 돌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다리 이름도 스페인 어로 공수병이라는 ‘리비아 다리’라 했다.
기독교가 삶을 지배하는 중세 유럽 생활 속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대책 없는 상황에서는 그들만이 살아가는 또 다른 믿음이 있었으니 인간의 나약한 면을 보는 것 같았다.
일찍 도착한 순례자들이 맑은 강물에 발을 담그면서 쉬고 있다.
말을 타고 돈키호테 복장을 한 순례자가 라비아 다리에 나타나자 여기저기에서 카메라 셋터가 눌러진다. 걷거나 자전거로 순례을 하는 사람만 보다 말을 타고 순례길을 따라 오는 사람도 있으니 세상 넓고 다양하니 여러 가지다.
가이드북에는 어제 산행의 여독이 풀리지 않으면 이곳에서 숙박하라는 안내가 있었지만
아직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으니 6km 더 걸어 ‘라라소아냐’까지 걷기로 했다.
목이 말라 시원한 캔 맥주라도 마시고 싶어 마을을 둘러봐도 오후 2시가 넘어 모두 닫혀있다. 낮잠 자는 시에스타 타임이다.
마을을 벗어나는 어귀에 황량한 마그네슘 파브리카(공장)의 높은 담벽을 따라 산 능선을 오르니 흐르는 강물과 도로가 같은 방향으로 산골자기를 따라 지나가고 있다.
새벽의 신비도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고 아침의 활기도 그림자 크기만큼 점점 사그라져 가는 오후의 발걸음은 담백하다.
길섶에 핀 잡초들도 이 시간엔 졸고 있다.
갈 길이 끝나가는 시간쯤엔 어제까지 그토록 갈망했던 햇빛인데 지중해의 5월 햇살은 우리네 여름 한낮 민낯이다.
4시가 넘어 도착한 ‘라라소아냐’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 한적한 산골마을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용하는 알베르게를 찾아 접수대에 크리덴샬(순례자여권)을 보이자 허리와 힙이 구분 안되는 아줌마가 숙박비(9유로)만 받는다.
저녁과 아침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란다.
지정된 2층 첫 번째 방에 갔더니 ‘ㄴ’자로 두 개의 침대가 상하로 구분되어 아래쪽은 이미 일찍 도착한 사람들의 침낭이 놓여있다.
덧문까지 있지만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창문틀이 잘 안 열린다.
친구와 나란히 윗 쪽 침대에 배낭을 풀고 사워실로 갔더니 지난해 많은 순례자들이 거쳐 간 후 그대로 방치한 것 같다.
샤워기 물줄기는 제 각각 알아서 뿌려지고 미지근한 물은 피로를 씻어내기 어림없다.
뒤뜰에서 세탁도 하고 비치파라솔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동네 슈퍼에서 레드와인과 하몽(돼지 뒷다리를 발효시킨 스페인 요리) 그리고 바켓트 빵을 구입해서 오늘도 무사히 도착하였음에 감사하며 저물어가는 석양 빛 아래서 건배를 한다. (계속)
첫댓글 경치는 우아하고 멋진데 순례자들의 숙식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군요. '왕후의 절경에 걸인의 숙식!' 경쟁은 그 곳에서도 있다니? 인간의 태생적인 모습일까요? 오롯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 속으로 본 듯, 그러면서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게 되는 곳이 순례자의 길인가요?
적절한 표현이십니다. 그 맛에 봄이 되니 절 다시 부르네요.
이미 아내와 선약된 장소가 있는데
황홀한 절경 그리고 그동안 'to have'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모든걸 다 내려놓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걸인의 숙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