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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원문보기 글쓴이: 天狼星主
표 12. 15세기초 조선 각도(道)의 미두(米豆) 생산량 |
도명 경작토지 (결) 수확량(쌀/콩) 결당수확량 |
경상도 301,147 169811석 0.56석 |
전라도 277,588 (논 11만) 158184석 11두 0.57석 |
충청도 236,300 90451석 12두 0.38석 |
경기도 200,347 (논 76,173) 37390석 3두 0.19석 |
황해도 104,072결 41573석 10두 0.40석 |
강원도 65,916결 20099석 13두 0.32석 |
평안도 308,751결 54746석 12두 0.18석 |
함경도 130,413결 29244석 8두 0.22석 |
출처: <世宗實錄> 地理志
이를 합산하면 당시 조선의 1년 총생산량이 약 60만 1504석 9두가 된다. 이에 비하여 승정원일기에는 한양의 도시민들이 소비하는 양이 연간 100만석이라 하였으니 세종재위시보다는 생산량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건 50만석을 하나의 거점성에 축적하려면 거의 수십년간 생산량의 일정부분을 떼어 창고에 저장하여야 한다. 이는 유사시를 대비한 군량미(軍糧米)이니 함부로 전용하지도 못할 것이기에 식량은 물론 파종할 씨앗으로도 쓰지 못하는 일종의 ‘기회비용’이 되는 것이다.
요동성은 대성(大城)이어서 저장할 식량의 양이 많기는 하지만 이보다 앞서 함락된 개모성(蓋牟城)도 10만석의 식량을 저장하여 두고 있었다고 한다. 요동성과 개모성이외에도 고-당 전쟁의 기록에서 보이는 병력을 보면 비사성(卑沙城)에서 전사한 자들이 8천, 신성과 국내성에서 동원한 군사가 보기(步騎) 4만, 건안과 신성의 무리 10만, 당군에게 점령된 요주(요동성)+개주(개모성)+암주(백암성)의 주민은 7만이라고 되어있다.[3] 대체로 군사 수천에서 1만에 성에 사는 성민(城民)으로 구성되어있다. 고구려가 구축한 성만 해도 200여처가 넘으니 고구려가 유사시 전쟁준비를 위하여 소요되는 비용은 국가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저장된 식량을 모두 소비한 다음에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공급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병사의 수를 최대한 줄여보아 1천명이라고 가정하여도 이들이 1개월동안 소비하는 식량은 미곡기준으로 675g×1000×30=2025만 그램, 즉 20250kg이다. 이를 200으로 곱하면 405만 kg이라는 엄청난 수치가 도출된다. 이에 12를 곱하여 1년치를 산출하면 4860만 kg이다. 톤으로 환산하면 48600톤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는 군사들만 주둔하고 있을 경우의 수치이며 요동성의 군사-남성민간인-여성민간인 비율 1대 1대1로 계산하면 그 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남성 675g+여성 540g=1215g을 더하여 다시 계산하면 일인당 하루 675g+1215g=1890g이 되며 한 달 소비치는 5670만g, 또는 56700kg이다. 이를 200으로 곱하면 1134만kg, 또는 11340톤이 된다. 이를 일년치로 계산하면 13만 6080톤이 된다. 위의 세종실록지리지의 수치를 도정되지 않은 나락 120kg을 기준으로 하여 계산하면 7218만 kg, 또는 72180톤이다. 고구려의 성(城)당 군인 1천에 남녀 민간인 합쳐 2천이라는 최소한의 가정만 하여도 15세기 조선의 총생산량보다 많은 양이 소요되는 것이다. 이처럼 ‘제국’은 그 위정자들에게 있어 결코 화려하기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팽창이 둔화된 상태에서 제국의 운영에 소요되는 자원을 조달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상당한 행정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1] 김성곤 김일환 한양일 박홍현 이규한 김을상 조만희, 「우리나라 쌀의 칼로리, 무기질 및 아미노산 함량」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Vol. 13, No.4, 1984), 373쪽
[2] 都下人民, 今爲二十萬餘口, 而日計二升, 則一年當食百萬石米…<承政院日記> 正祖 7年 9月 9日 (丁酉)
[3]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寶藏王 4年
첫댓글 이 천랑성주라는 분의 글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일깨워 주는군요.
생각해보니 과연 제국의 행정력이 필요하군요. 서로는 요동으로부터 남으로는 아차산까지 성곽과 소규모 보루까지 이어지는 병참선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좋은 작품 하나 나올만도 합니다. 역사자료가 없는 곳엔 창작의 자유가 있고....
ㅋㅋ 저랑 개인적으로 친한 형님인데, 이 제국 체제에 대해서는 국내의 왠만한 학자들보다 많은 연구를 했죠. 개인적으로도 공부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구요. 특히 제국 운영은 곧 돈놀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했습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