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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오전 일찍, 오랜만에 교수님 이하 여러 연구원들과 함께 아차산을 방문했다. 얼마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 아차산 4보루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홍련봉 2보루 및 아차산 3보루 발굴조사때문에 아차산에 자주 올라왔었는데, 그 뒤로는 처음 가 보는 것이었다. 역시나 오랜만에 등산을 하니 안 쓰던 근육이 놀라 쉽게 퍼졌다. 어쨌든, 아침 일찍 산을 오르니 기분도 상쾌하고 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서울 경치도 아주 일품이었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약수터로 올라가는 길을 이용했는데 그 날은 답사차 들린 것이기에 아차산성부터 주욱 살펴보기로 하고 매점 옆으로 난 등산로를 이용했다. 아차산은 일찍이 백제때부터 축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요충지이지만, 출토되는 유물들은 하나같이 신라 유물 일색이다. 분명히 백제가 초축하였고, 이를 탈취한 고구려군은 아차산성 아래에서 개로왕의 목을 벤다. 이후 남쪽의 몽촌토성 및 한강 주변의 보루군에 상당기간 고구려군이 주둔하였으며, 551년 이후 신라군이 한강에 진출하기까지 아차산성은 삼국의 한강 쟁탈전의 현장으로서 생생한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한 상식적인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출토되는 유물에서 고구려, 백제적인 성격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초축자와 축성시기가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성이기도 했다. 어쨌든, 아차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인 아차산성은 한강과 서울 시내를 조망하는 요충지로서 중요하게 취급되던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아차산성 성벽과 보호시설, 일찍이 보호시설이 설치된 이후 제대로 관리가 안 된 모습이 역력했다.
성벽 앞에서 교수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연구원들의 모습.
아차산성 성벽을 따라 일행은 갈길을 재촉했다. 그날 마침, 중학교에서 아이들이 소풍을 왔는지 산길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비좁았다. 아차산성 성벽을 따라 가던 아이들은 저마다 성벽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했다. '누가 이렇게 쌓았을까?' '어떻게 쌓았을까?' 등등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피해서 산길을 가는 내내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등산로였다. 등산로 곳곳에는 적지 않은 양의 수키와편들이 박혀 있었는데 문양으로 봤을때 적어도 고려 이전시대의 기와들로 보였다. 아마 아차산성에서 쓸려왔거나 조사 당시 훼손된 유물들이었으리라. 같이 가던 러시아 유학생 Maxim에게 웃으면서 바닥을 가리키니,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기와, 기와!"를 외쳤다. 물론 상태가 양호하거나 학술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은 전부 수습하여 보존처리가 끝났겠지만 이렇게 유물이 등산로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은 썩 기분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신라시대 석곽묘의 일부. 지금도 산 속에 무덤을 만들듯이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아차산은 곳곳에 이와 같은 석곽묘가 남아있다.
카메라 가방만 들고 올라갔는데도 산 올라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평소 체력단련 좀 해 둘껄, 산성 조사 수없이 다닐텐데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쨌든, 계속 산을 올라갔고 산 중턱쯤 왔을때 역시나 시원한 전경이 펼쳐졌다. 예전에도 매일 산을 오를때마다 이 지점에서 뒤돌아보며 감탄사를 금치 못 했는데, 그 날도 여전했다. 주인장이 배낭에 물통을 메고 양손에 도시락을 싸들고 산을 올라갔듯이, 그 옛날 고구려군 또한 각종 짐보따리를 들고 이 산을 올랐을 것이다. 갑옷과 무기까지 착용하고 말이다. 그렇게 매일 산을 오르면서 그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상상해보곤 한다. 비가 오면 어떻게 했을까, 눈이 오면 어떻게 했을까, 어느 길로 올라왔을까, 마소같은 동물이 다니는 길은 제대로 만들었을까~하고 말이다.
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전경, 이 곳을 오르던 고구려군도 산 아래에 펼쳐진 백제인들을 바라봤을 것이다.
등산로 한쪽에 남아있는 성돌들, 아차산 1보루에서 유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등산로 조성으로 인해 상당수가 파괴되었을 것이다.
보통때라면 30분 정도 걸렸을 거리인데(빨리 올라오면 20분 정도) 사진도 찍고 중간중간 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느새 45분 가량이 소요됐다. 그렇게 재작년 말, 1차 발굴조사를 마무리했던 아차산 3보루에 당도했다. 등산로 한가운데를 막아 발굴조사를 하느라 유적 주변으로 동그랗게 등산로를 돌려서 만들었었는데 이번에 와보니 유적 주위에 목책도 두르고 표지판도 세워놓는 등 나름 유적 정비를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달의 연고지로서 아차산성을 내세웠지만, 단양에게 온달 관련 역사와 전승을 뺏겨버리고 내세울만한 역사와 유적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구리시였다. 덕분에 구리시는 고구려 보루군에 상당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학술비 지원 등 재정적인 지원에 있어서도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표지판을 보니 아마 구리시에서 목책과 함께 설치해놓은 것으로 보였다.
아차산 3보루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목책들, 주변의 나무를 이용해 조성했는데 간혹 이것도 유적의 일부가 아니냐고 묻는 등산객들도 있었다.
목책 한켠에 난 문을 따라 유적 안으로 들어가봤다. 당시 조사가 12월 말까지 진행되는 바람에 상당한 추위 속에서 작업이 이뤄졌고, 어렵게 보온덮개 등으로 유적을 감싸고 그 위를 복토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가보니 아예 헬리콥터와 장비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복토를 진행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매일 장비나 헬리콥터가 있었으면 흙 치울때 얼마나 편할까~라는 고민을 했었는데(아무래도 현장이 산 정상부에 있어서 모든 작업이 인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결국 예산 문제로 상상 속에서만 그쳐야 했었다. 하지만 그 날 보니 역시 재정적 여유만 있으면 못 할 것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 있을 당시 헬기 레펠을 위해 한번 헬기를 띄울때마다 60만원 가량의 돈이 든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그 날 헬리콥터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한강변에서 흙을 담은 포대를 싣고 아차산 4보루까지 날아다녀야만 했으니 어느 정도의 돈이 들었는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겠다. 구리시가 정말 적극적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헬리콥터로 흙을 나르는 모습과 복토가 진행 중인 아차산 4보루 현장
아차산 4보루는 아차산 3보루에서 도보로 5~7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차산 4보루 역시 등산로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서 등산로와 산 정상부의 헬리콥터 이착륙장을 치우고 발굴조사가 진행된 곳이었다. 97~9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1차 조사할 때는 보루 내부 건물지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이뤄졌었는데 이번 2차 조사에서는 성벽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여러차례 기사화되어 알려졌듯이 기존에 2개로 알려졌던 치는 3개가 더 추가로 발견되었고 온돌유구 2기 및 건물지 석축기단 등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북쪽 성벽에서 치 2개소, 남쪽 성벽에서 이중구조의 치 1개소가 새롭게 확인되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남쪽 성벽에서 확인된 이중 구조의 치였다.
치는 성벽과 직각으로 연결되는데, 전체길이가 13.2m에 이르고 2.5m의 중앙부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북편과 남편의 치로 구분되고 있었다. 빈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용마산 2보루와 구의동 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는 고구려보루의 독특한 구조로 추정되는 바, 향후 정밀한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출입시설이냐, 아니면 출입시설을 겸한 방어시설이냐 등등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벽을 살펴보면 후대에 보축된 석축단과 기존 성벽은 성돌이라든가, 축조방식에 있어서 확연히 구분되었는데 보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성벽 위에 올라 다른 연구원들과 20여분 가량 토론을 해 봤지만 역시 뚜렷한 해답을 찾지는 못 했다. 가운데 빈 공간에 사람이 들어갔느냐, 아니면 그 안에 뭔가 구조물이 있었느냐, 아니면 성벽 윗부분을 활용했느냐...등등 다양한 부분들을 언급했지만 역시 전체적인 틀을 추정하기에는 무리였다.
아차산 4보루 남쪽 성벽에서 추가로 확인된 이중 치의 가운데 공간, 원래는 넓은 공간이었는데 보는 것처럼 네 귀퉁이를 후대에 보축하였다.
그 다음으로 주목할만한 성과는 내부 평탄면의 3호 건물지 하부에서 확인된 '一'자형 온돌유구 2기를 들 수 있겠다. 벽면을 절개한 결과, 층위상 3호 건물지보다 선행하는 유구로 밝혀졌는데 이는 아차산 4보루의 내부 구조물이 동시기에 축조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증거로서 향후 한강유역 고구려유적 연구는 물론 삼국시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래 토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적갈색토층 위에 회백색토층이 보이고 다시 황회색과 적갈색토층, 표토층을 확인할 수 있는데(토양은 직접 긁어보지 않아서 자세히 모르겠음) 온돌유구는 가장 마지막 토층과 비슷한 높이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니 기존의 유구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임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보루 축조 이전까지 소급되지는 않았을테고 어떤 이유에서 내부보다 외부에 건물지가 먼저 축조되었던 듯 싶다.
발견된 '一'자형 온돌유구와 그 옆의 층위 양상.
오른쪽 온돌유구의 연통이 놓였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 돌이 잘 남아있어 당시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른쪽 온돌유구를 정면에서 찍은 모습, 지각으로 보이는 돌까지 유구의 형태를 추정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돌이 잘 남아있었다.
왼쪽 온돌유구의 모습. 판석이 무너진 것으로 봐서 전체적인 형태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오른쪽 온돌유구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一'자형 온돌유구의 전체 형태. 보시다시피 왼쪽 온돌유구의 경우 앞부분이 많이 유실되었는데 오른쪽 온돌유구를 통해 본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온돌유구 바로 옆에서 확인된 불명유구였다. 남-북으로 '9'자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머리 부분은 동그랗게 조성되어 안에 불탄 흙 등이 있었고, 꼬리 부분은 '一'자로 이뤄져 있는데 양옆에 단이 지고 바닥에 판석이 깔려 있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조사할 당시 내부 건물지들과 바깥 성벽 사이가 공백지대로 남아있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그 사이에 이른 시기의 건물지가 있었고, 이처럼 불명유구도 있었으며 목책렬이 다수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보루 바깥쪽 시설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성벽을 밖에서 안으로 보축하듯이 여러겹 쌓은 석축단이 확인됨으로써 보루의 구조를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는 일주일 정도만 더 있으면 마무리된다고 하는데 차후 꾸준한 조사와 복원작업으로 인해 남한의 거의 유일하면서도 엄청난 고구려 유적이 잘 보존되기를 바랄 뿐이다.
온돌유구 옆의 불명유구, 성격을 알 수 없었다.
성벽을 따라 확인되는 목책열들. 보다 정확한 아차산 4보루의 구조가 확인된 셈이다.
그렇게 7시간 정도 소요된 답사는 끝을 맺었다. 내려오다가 보니 아차산 3보루 즈음에서 재밌는 광경이 벌어졌다. 기존에 구리시에서 세운 표지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옆에 광진구에서 나온 사람들이 또 표지판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웃으면서 "아주 바람직한 모습이야~"라고 말씀하셨지만, 주인장이 보기에는 조금 씁쓸했다. 그간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을 조사하면서 구리시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에 동조했었지만 광진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아차산이 서울시 광진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어서 어떠한 행정적인 소요를 피하기 위함일지는 모르겠지만, 표지판의 내용만 보더라도 구리시가 만드니까 광진구가 뒤늦게 급조해 설치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정치적인 이유에서든 뭐든 유적에 대해 널리 알리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만은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얼마나 장기간 이렇게 지속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구리시가 기존 발굴결과를 정리하여 설치한 아차산 3보루 표지판.
아차산 3보루에 대한 개설적인 내용을 담은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광진구 사람들. 멀리 구리시에서 세운 표지판이 보인다.
아차산 4보루 2차 발굴조사에 대한 것은 차후 발굴조사보고서가 만들어져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물어보니 출토된 유물이 많지 않아서 보고서가 빨리 나올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그래도 1년 정도는 걸릴테니 아마 내년 이맘때쯤에야 자세한 사실들을 접할 수 있을 듯 싶다. 오랜만에 산에 올라간 것도 그랬고, 모습이 많이 변한 아차산 보루들의 모습도 그렇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부쩍 늘어난 것도 보기 좋았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유적인만큼 단순한 보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보존작업을 거쳐 문화공간으로서 활용되어야만 하는 보루군이기에 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가해야만 할 듯 싶다. 앞으로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을 다 조사하려면 10년 이상은 걸릴텐데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