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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東아시아 植物考古學 硏究의 現況과 課題
· 주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문화유산연구소 /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 熊本大學 文學部
· 일시 - 2011년 9월 23일(金)
· 장소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신양관(제4동) 3층 국제회의실
· 발표자 및 일정 - 이선복(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中沢道彦(長野県庁), 小畑弘己(熊本大學 文学部), 佐々木由香(株式会社パレオ・ラボ), Gyoung-Ah Lee(University of Oregon, Department of Anthropology), 김백범(가경고고학연구소), 정유진(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宇田津徹朗(宮崎大學 農學部), Sudarshan Bhandari(Tribhuvan University, Nepal), 真邉 彩(鹿児島大學博士課程後期), 庄田慎矢(國立文化財機構 奈良文化財研究所), 김민구(전남대 인류학과), 이희경(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안현중(전북문화재연구원), 안승모(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 批評
이게 얼마만의 글인지. 두달 전에 갔다왔던 학회 후기를 오늘에서야 마무리한다. 휴우...필자의 게으름을 스스로 다시 한번 탓하면서 나머지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오후 발표는 정유진, 宇田津徹朗, Sudarshan Bhandari, 真邉 彩, 庄田慎矢, 김민구, 이희경, 안현중, 안승모 선생님까지 총 9명의 발표자가 예정되어 있었다(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많은 것 같다. 하루에 10명이 넘는 발표라니). 발표의 순서는 오전에 이어 6번부터 책정하도록 하겠다. 잠깐 쉬는 시간에 발표자들의 사진 촬영이 있었다.
자아~그럼 오후 발표 시작!
6. '韓半島 先史와 古代의 稻作에 關한 一考察' - 정유진
이 발표에서 조금 새로웠던 부분은 '원삼국시대의 도작은 고고학 자료에 의존하여 추정하기 보다는 식물유체를 통해서 직접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던 발표자의 발언이었다. 음~듣고 보니 그게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왜냐하면 고고학상 분명히 원삼국시대에는 이전 시기와 다른 생산성의 향상이 확인되고 있지만, 실제 원삼국시대는 한랭기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삼국사기』나『증보문헌비고』의 기상 관련 기록들을 갖고 당시의 기후변동을 파악한 것인지라 100%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기원후 2~3세기는 한난 지수가 높은 뚜렷한 한랭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보면 원삼국시대 도작이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날씨는 추운데, 생산성은 향상했으니 말이다.
발표자는 몇몇 유적 출토 탄화미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청동기-초기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 갈수록 벼의 장폭비가 커진다. 둘째, 청동기시대에는 다양한 크기의 쌀이 확인되나 원삼국시대가 되면 크기가 대형화되면서 점차 정형화된다.
벼 낱알의 길이는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되지만 폭은 환경적 요인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청동기-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 각 지역별 작물조성을 살폅면 작물 비율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도작의 비율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고 한다. 즉, 청동기-초기철기시대에 비해 원삼국시대에 이르면 도작이 현저히 감소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남부지역보다 중부지역에서 폭이 더 컸다고 한다. 아!? 시기가 지날수록 도작의 비율이 증가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생산성이 증가해 사회적 복합도가 증가하는 원삼국시대가 갈수록 도작의 비율이 낮아진다고? 이 시기는 고대 삼국이 태동해 끊임없이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며 상쟁하던 시기인데?
실제 수도작 문화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후기문화인 송국리문화때에는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도작의 비중이 높아진다. 전체 생업경제에서 농경이 차지하는 비율 또한 어마어마하게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원삼국시대가 되면 기타 작물은 이전 시기에 비해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율이 높아진 반면, 유독 도작 비율만 감소한다는 것이다. 원삼국시대 유적에서 밭 유적은 많으나, 논 유적이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지형조건과 토목기술의 수준에 좌우되는 水田(논)과 달리, 밭은 지형조건보다는 개간과 경작에 투여되는 노동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수전 개발이 한계에 이르면 밭 개간이 활성화되어 밭작물이 늘어났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실제『삼국사기』초기 기록을 보면 벼보다는 밭 작물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아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산량의 증가를 양적인 면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찾고자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쌀이 대형화, 정형화된 것은 농부들의 끊임없는 개량과 선택적 재배에 의한 것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또한 기후변화(한랭화)로 인하여 더 이상 도작만으로는 생계가 감당이 돼지 않는 상황이 왔을 것이고, 다른 작물에 대한 관심과 개발 또한 꾸준히 이뤄졌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전과 다른 철기라는 존재가 알려지면서 생산력 확대에도 일조했을 것이고 말이다. 암튼, 원삼국시대 도작의 비율이 감소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흥미로웠다고 생각한다.
7. 'プラントオパールからみた日本列島稲作の開始と展開'(식물규산체를 통해 본 일본열도 내 도작의 개시와 전개) - 宇田津徹朗
다음은 宇田津徹朗 선생님의 발표(한국식 발음이 뭔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테츠루 우다추?). '식물규산체를 통해 본 일본열도 내 도작의 개시와 전개'라는 주제인데, 전체적으로 식물규산체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었다.
이날 전체적인 발표에서는 레플리카 셈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나왔는데, 전통적으로 많이 쓰인 방법은 역시 식물규산체 분석이다. 식물규산체는 잎의 세포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생산 공간에서 멀리 이동될 가능성이 낮아 토양에서 검출되면 채집지의 근방, 토기라면 제작 지역 내에 벼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그에 반해 레플리카 셈법은 종자의 혼입이 우연이라면 똑같이 제작 지역 내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종실이기 때문에 그 생산 공간은 보다 넓게 잡아도 무방하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식물규산체는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의도적으로 혼입되는 경우가 없으나, 종자의 경우는 인간의 의도성이 개입될 수가 있으므로 두 분석 결과를 잘 비교해서 판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레플리카 셈법은 시료가 오염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나, 식물규산체는 토양시료의 경우 나무의 뿌리나 상층의 영향(시료 등) 등에 의해 오염될 수가 있다(물론 최근에는 시료 오염의 영향도까지 파악할 수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양자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선생님은 일본 각지의 도작개시와 전개에 대해 분석하였다. 먼저 유구열도 전체에 도작이 행해진 것은 구스쿠 시대(12~14세기)이며, 북부 큐슈는 죠몽시대 후기~만기에 이미 도작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특히 유구열도의 경우 패총시대의 자료가 미검출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현시점으로는 남방 루트의 성립은 어려우며, 죠몽시대 후기 후반에 시작된 북부 큐슈의 도작은 큐슈 남부 및 주코쿠, 시코쿠 지방으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다.
또한 수전도작이나 저습지도작을 제외하면 화전이나 밭에서의 도작은 대부분 같은 토지를 연속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토양 내에 남아있는 벼 식물규산체는 극히 적은데,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수전도작이 시작되기 이전의 도작은 토기나 유적의 토양에 남겨진 식물규산체 및 종자의 압흔에 의해 파악할 수 있는 확률이 낮다. 하지만 적은 사례이지만 죠몽시대 후기에 벼의 존재를 보여주는 데이터가 얻어지고 있으며, 이를 선생님은 수전도작을 수용하기 이전의 '助走期(도움닫기)의 도작'이라고 해석하셨다.
전체적으로 이날 발표에서 여러번 나왔지만 식물규산체 및 레플리카 셈법을 통해 일본의 도작 시기가 죠몽시대까지 올라간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그 전파 방식이 대륙을 통한 한반도에서의 전파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둘째 치더라도 일단 기존의 상식적인 사실들이 많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자연과학적 분석방법은 전통고고학자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추후 더 많은 투자와 공력을 들여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8. 'Utilization of plant resources in a castle in the Middle Age'(중세시대 성곽의 식물자원 활용) - Sudarshan Bhandari(수다라산 반다리)
이번 발표자는 조금 의외였다. 네팔의 Tribhuvan University에서 오신 수다라산 선생님의 발표였는데, 주제는 독특하게도 일본이었다. 네팔 고고학은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었는데 상당히 신선했었다.
일본의 甲田城 내에서 시료를 추출하셨다.
총 31개의 enclosures 중에서 15개 구역(노란색으로 칠해진 부분)에서 dried sample을 추출하셨다고 한다.
그 결과, 도정된 쌀이 상당히 많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저장고나 창고가 불에 탔고 다량의 탄화미가 확인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셨다. 전체적으로 특정 유적에 대한 조사 사례를 소개한 것이어서 앞선 발표들과 비교했을때 크게 와닿는 부분은 없었다. 다만, 저렇게 광범위한 지역에 대해 곡물유체 확인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필자에게는 신선했다. 국내 성곽 연구시 이러한 연구는 없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발표 후 안에 콩과 팥이 섞여 있는데 혹시 잡곡밥을 먹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껍질까지 있어서 우연히 들어간 것 같다'고 답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잠시 거뒀다.
9. 'X線CT法による土器中の種子 · 昆虫痕跡の検出'(X선 CT에 의한 토기 내의 종자 · 곤충 압흔의 검출) - 真邉 彩(마나베 아야)
다음은 마나베 아야 선생님의 발표.
제목은 'X선 CT에 의한 토기 내의 종자 · 곤충 압흔의 검출'이다. 이 역시 이번 발표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 자연과학분석법인데, 관련된 연구가 앞으로 많이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기압흔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부분은 '종자와 곤충이 의도적으로 유입되었는지, 아니면 우연히 들어갔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기 태토 중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잠재압흔'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바로 X선 CT법이다.
마나베 아야 선생님은 분석 결과, 특정 종자나 곤충의 압흔이 같은 개체 내에 여럿 나타나거나 동일 유적 내에서도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점, 그리고 토기의 특정 부위에서 검출되는 사례가 확인되는 점 등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종자나 곤충류를 태토에 혼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 측면에 대해서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러한 식용식물의 압흔이 많은 이유는 대체로 풍작을 기원하거나 축복하는 식용종자에 대한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견해 정도만 밝혀두기도 하셨다. 더불어 바구미의 경우, 단순한 곤충을 넘어서 인간에게 해로운 해충임에도 불구하고 토기에 혼입된 것을 보면 뭔가 어떤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필자 역시 계속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암튼,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하면 계속 새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질 수 있는 것이 고고학이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발표였다.
10. '安定同位体分析から考える先史農耕における陸稲と水稲'(안정동위원소분석을 통한 선사 농경의 육도와 수도) - 庄田慎矢(쇼다 신야)
그날 전체적인 통역까지도 맡느라 고생한 쇼다 형 발표다. 오후 1부 발표의 마지막을 장식할...
이번에는 안정동위원소분석이다(정말 책에서 이론으로만 보던 다양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그날 발표에서 다 쏟아져 나왔다). 쇼다 형은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시대 시작과 함께 도작이 시작되었고, 당시의 도작은 화전이나 육도로 추정된다는 얘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죠몽시대에 화전 등의 육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 벼 자료가 출토된 바가 없어 논의되기 어렵다고도 하였다. 본 발표의 요점은 안정동위원소비를 통해 해당 벼가 육도인지, 수도인지를 가려내는 것으로서 실험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100% 그 결과를 수용하기는 힘들겠지만, 분명 의미가 있는 발표였다.
일반적으로 벼농사의 전파 경로는 위와 같다고 알려져 있다. 양자강에서 산동반도를 거쳐(중간에 요동도 거쳤을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한국-일본의 순서대로 전파된다고 말이다.
수도는 혐기적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혐기성 미생물의 작용인 '脫질소(denitrification)'의 영향을 받아 질소동위원소의 비율이 육도나 다른 밭작물에 비해 높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 및 조, 보리 등의 밭작물의 안정동위원소비를 측정한 후 수도 및 육도와 비교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는 소리다.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분석방법이었던지라 많은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은 발표이기도 했다.
BSD는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유명한 '백석동'유적의 영문약표기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이렇게 유적명을 이니셜을 딴 약표기로 자주 사용한다(예를 들면, 유물채칩봉투나 유물박스 등에 이런 식의 표기를 붙인다).
쇼다 형이 분석한 시료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강릉 교동 유적, 강릉 사천리 유적, 천안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 청동기시대 후기의 당진 자개리 유적, 원삼국시대의 완주 용흥리 유적, 김제 심포리 유적에서 확인된 벼, 조, 밀, 팥이었다. 벼가 육도라면 밭작물에 가까운 수치가 나올 것이며, 반대로 수도라면 밭작물보다 높은 수치가 나와야 할 것이다. 물론 유적에서 출토된 벼의 질소동위원소비는 현생 육생의 C3 식물보다 높은 수치를 보이나 조, 밀, 팥 등의 밭작물도 현생 육생식물보다 높은 수치를 보여 현생식물과의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는 것처럼 백석동유적에서는 조보다 벼의 질소동위원소비가 분명히 높은 반면, 용흥리유적에서는 측정수가 적지만 밀, 팥보다 벼의 질소동위원소비가 낮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왼쪽 상단부에 뭉쳐있는 마름모가 백석동유적 출토 벼이며, 그 아래 4.0~5.0 사이에 위치한 세모가 용흥리유적 출토 벼이다. 즉, 이를 통해 쇼다 형은 전자는 수도, 후자는 육도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 후기에 도작이 집약화되어 수도 농경이 확대되었다고 이해하는 흐름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이미 앞의 발표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반적으로 정유진 선생님의 발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처럼 위에서 언급했던 유적들의 시료들을 주욱 분석한 결과가 이와 같다. 원삼국시대의 장흥 상반촌 유적에서는 밭작물만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도작이 확대 보급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물론 이 방법은 측정 개체수가 한정되어 있고, 질소동위원소비의 값이 불규칙하다는 점이 문제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 새로운 방법론으로 적절하며, 다른 방법론들과 연계된다면 보다 정확한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대해서 몇가지 질문이 오고 갔는데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료를 뿌리거나 팥 등의 윤작식물을 경작해도 질소의 비율은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인위적인 것과 수도작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청동기시대때 대규모도 질소 비료를 사용해 농사를 지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래서 비료에 대해서는 제외한다는 전제하에 논지를 전개하였다'라고 답하였다. 또 탄소동위원소비를 이용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고 알고 있다는 질문에 '일단은 질소동위원소비에 대한 발표만 했고, 그 부분은 나중에 하겠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안승모 선생님이 현재와 과거의 시료들에 대한 차이가 있을텐데 그 부분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면서, 탄화되지 않은 것과 탄화된 쌀 역시 질소에 차이가 있을 것 같다는 질문을 하셨다. 그에 대해 '같은 유적 내에서 같은 종자들끼리 분석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답했다.
개인적으로 이날 들었던 발표 중 정말 오길 잘 했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 하나였다.
11. '馬韓政治體의 形成과 山林管理' - 김민구
중간에 10분 정도 휴식을 갖고, 오후 2부 발표가 3시 50분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발표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던 발표였다(그런데 발표문은 영문으로 된거 1쪽밖에 안 돼서...개인적으로 좀 실망을. ^^;;).
보는 바와 같이 대상 유적은 영산강 유역의 유적 14개소이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3개소는 파란색, 11개소는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전자는 꽃가루 분석을 실시한 것이고 후자는 화분 분석을 실시한 것이다(일본 내 1개소-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 유적-는 비교를 위한 지점이다).
이상의 분석 결과, 마한 지역이라고 불리는 해당 지역들은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농경집약화가 어느 정도 감지되고 있다고 한다. 밀과 콩, 보리, 팥 등이 확인되고 있는데(해남 신금 유적의 경우), 앞에서부터 이어져온 분위기를 보면 이러한 현상들은 원삼국시대의 한랭화와 맞물려 폭넓게 확산되지 못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단, 중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부지역이기 때문에 기후에 덜 민감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번 발표의 대상지역 자체가 최남단 영산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면서 산림과 같은 주변 환경과 농경의 상관관계를 그린 표이다. 1차림과 2차림, 그리고 농경과의 관련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 밤나무 3종이 가장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 소나무는 5종, 참나무는 13종, 밤나무는 1종이 자생하고 있다고 하며, 유적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은 밤나무라고 하신다. 즉, B.C 1세기 이후로 유적 내에서 밤나무가 급증하기 시작해 1~5세기에 밤나무가 가장 많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이렇게 밤나무의 비율이 높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일본의 그 유명한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클릭)을 보면 주거지가 700기 이상 확인되고 있고, 그 건축자재나 각종 목재 대부분이 밤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학자 대부분은 이들 유적의 사람들이 밤나무의 성장 촉진을 위한 인위적인 어떤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단다(헉! 필자는 그저 인위적으로 밤나무 숲을 조성하고 가꿨다는 사실만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뭐가 성장 촉진을 위한 농법상의 개량이라든가, 새로운 촉진제(?)의 존재 등이 밝혀져야 한다는 말 아닌가!! 조금 놀랐다).
이상의 결과를 놓고 봤을때, 마한지역의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1차림을 제거하면서 농지를 확보하고, 2차림을 의도적으로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마한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면 여기에서 '배만한 밤'이 난다고 했는데, 이는 분명 중국 내지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상품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개량에 의한 끊임없는 마한 농부들의 의지가 투영된 행위였다면, 이는 분명 의미있는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강진 양유동 유적 등에서는 밤 열매 등이 다량 확인된 바 있고 하니 말이다. 암튼, 마한지역 사람들이 왜 유독 밤나무에 주목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여기에서 강인욱 선생님이 질문을 하나 하셨다. 가야에서도 최근 목곽분이 석실분으로 바뀌는 이유가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는데, 국가적 수요에 필요한 특정 수종이 재배된다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과 같은 인위적인 것에 의해서도 수종이 바뀌지 않겠는가? 가 바로 그것이었다(일전에 올렸던 묘제 변화를 환경적인 요인에서 본 신선한 논문이라는 글을 참고). 단순히 어떨 것이다~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전제가 필요할 것 같다면서 다소 강하게 질문을 하셨는데 그에 대해 김민구 선생님은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만약 서남부에서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면 아마 밤나무가 그 대상자였을 것이다. 분석 시료가 소략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끝을 맺으셨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마한지역의 예를 살펴본다면 당시 위정자들이 광대한 범위에서 행해지는 벌목에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가야처럼 나무 다 썼으니 이제 돌 쓰자~라는 인식이 아니라 나무를 계속 관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예전에『삼국사기』의 재난 관련 기록을 모아 봤을때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난 대비 시스템이 잘 구축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것도 참고할만 하지 않나 싶다. 클릭).
12. '京畿道 地域 原三國~漢城百濟時代 貯藏 樣相의 特徵과 意味' - 이희경
이제 발표도 점점 후반부로 치닫고, 마지막 힘을 짜내서 열심히 발표를 들었다.
이번 발표는 '경기도 지역에서 확인되는 저장 수혈을 검토하기 이전에 수혈 유구가 저장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저장 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지를 실험 고고학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 것'이었다. 필자가 조사해서 관련 논문도 썼던 분야인지라 개인적으로 관심도 많이 갔고, 필자가 실시했던 실험고고학적 사례를 인용하고 있기도 해서 그 부분을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일단 이희경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수혈유구가 저장의 기능을 '했다'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물론 필자도 이에 상당부분 동의하는 바이다), 논지 전개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래서 경기 지역에서 수혈유구가 확인된 유적들을 총정리해서 시간순으로 비교한 다음, 경작유구가 같이 나온 유적지에서 수혈유구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근거 중 하나로 들었다. 예를 들면 일반 유적에서는 주거지당 수혈유구의 숫자가 1:1~1:2 정도인데 반해 경작유구가 나온 유적의 경우에는 1:5~1:9의 비율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기존에도 이렇게 주거지와 수혈유구의 숫자를 직접적으로 대응시켜 보는 접근법이 있었는데, 경작유구와의 상관성까지 논의하니 보다 이해가 쉽게 됐다. 단, 여기에서의 문제점이라면 수혈유구 내부에서 유물이 많이 출토되지 않는 편인지라 수혈유구의 시간성을 정확하게 부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혈유구와 주거지의 숫자만 비교할 것이 아니라 평면도 상에서의 공간구조도 같이 검토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은 필자도 추후 검토하고 논고로 작성할 부분인지라 평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어서 여기에 몇자 적어봤다.
또한, 경기 지역에서 확인된 수혈유구 내부의 작물유존체의 양상을 살펴봤더니 다른 작물에 비해 쌀과 조의 이용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쌀이나 조는 봄에 파종하는 춘파 작물이고, 보리와 밀은 가을에 파종하는 추파 작물이다. 경기 지역의 수혈유구에는 춘파와 추파 작물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발표자는 9~10월에 쌀, 조, 피, 기장, 팥을 수확한 이후인 겨울과 봄, 보리와 밀을 수확한 6월 이후인 여름과 가을까지 지속적으로 저장 수혈을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다만, 이 모든 작물이 각각 본래 그 종류의 작물을 저장하겠다는 목적에 의해 수혈유구 내에 보관되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출토현황을 놓고 봤을때 여름철을 제외한 다른 계절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암튼, 정리하자면 원삼국시대를 지나 한성백제시대로 넘어오면서 수혈유구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기원전후 무렵 교란의 지표인 소나무와 초본류가 증가한다는 자연과학적 분석결과를 놓고 봤을 때에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농업생산량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원삼국시대~한성백제 시대부터 농업생산량이 증가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발맞춰 국가 통제에 따른 식량 생산량이 급증하고(위기에 대비한 국가적 전략에 따라), 늘어난 저장량을 메우기 위해 저장수혈의 조성도 증가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더불어 발표자는 저장수혈에는 탈각한 이후의 상태로 곡물을 저장시켰는데, 그 이유로는 저장시 용적이 감소하여 저장시설을 축조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중량의 감소로 운반 비용도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탈각하지 않은 것보다 탈각한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한성백제 시대에는 선택적으로 이러한 방법이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대부분 탈각한 형태였다고 하더라도 분명 탈각하지 않은 곡물도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봤을때 탈각한 곡물은 국가 통제하의 것일 가능성이 있고, 탈각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에서 그렇게 저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탈각된 것이 운반이나 저장에 더 유리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질문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그와 달리 쇼다 형은 현재 확인되는 것이 다 탄화미이기 때문에 탈각되었다고 보는 것이 아닌지~라는 질문을 했다. 그와 덧붙여 레플리카 셈법의 초창기 연구자이신 히로키 선생님(2번째 발표자)는 탄화되면서 흙에 붙은 껍질이 날아겄을 수도 있고, 조사를 하면서 혹은 플로테이션 과정에서 껍질이 날아가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중요하다고 지적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안승모 선생님 역시 다른 나라의 탈각후 저장 사례를 확인할 필요가 있으며, 본인 역시 한여름에 보리나 밀을 저장할 가능성은 낮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즉, 탈각 여부는 현재 상태로는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좀 어렵다~는 것이 대세였는데, 필자와 생각이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3. '전북지역의 원삼국시대 작물조성과 특징' - 안현중
전북지역의 유적 19개소(신석기시대 4개소, 청동기시대 5개소, 원삼국시대 10개소)를 추려내어 그 안에서 나온 작물유체에 대해 살펴본 논고였다.
그 결과, 전북지역의 원삼국시대 유적에서는 탄화미의 출토빈도가 가장 높고, 다음으로 팥의 출토빈도가 높다고 했다. 이를 통해 원삼국시대 작물의 재배와 이용에 대한 비중이 다른 작물보다 쌀과 밀에 많이 투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봄 작물로 대표되는 밀은 춘궁기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작물이며, 쌀과 밀은 이모작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경제적으로도 중요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밭작물을 살펴보면 조와 팥의 비중이 높았다고 했다(일부 팥보다 콩의 비중이 높은 유적도 있지만).
또한 탄화미의 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은 최종 저장상태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껍질의 유무 차이가 아닐까~하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마 이는 앞에 발표했던 이희경 선생님의 논고에 보완적인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지역의 탄화 작물을 보면 대부분 탈각하지 않은 상태로 저장-보관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화재주거지의 경우에는 대부분 타면서 탈각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즉, 경기 지역과는 완전 상반된 결론이 도출된 셈인데 크게 2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첫째는 지역을 떠나서 탈각되지 않은 현상이 대부분인지, 둘째는 지역에 따라(지역이 다르다는 것은 정치체가 다르다는 의미로도 쓸 수 있겠다) 탈각 여부가 달랐는지...암튼 이 2개의 발표를 듣고 좀 혼란스러워졌다.
뭐 결론은 위와 같다. 왜 쌀의 비중이 더 높은지?? 는 아무래도 생산성과 활용도 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한데, 고고학적으로 단정지을 수 있을만한 결론이 없으므로 추후 연구성과를 더 기대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이준정 선생님이 질문을 하나 해주셨다. 식량자원으로서 도토리에 비해 밤의 양적 증가가 눈에 띄는데(필자가 따로 언급은 안 했지만, 앞서 김민구 선생님의 발표와 연계해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이는 생산체계에서 도토리에서 밤으로 교체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은가? 라는 질문에 '식량자원으로서 도토리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밤의 상대적 가치가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라는 답변을 했다. 한편 '밤은 수확을 자주 안 해주면 밤알이 길어진다'는 얘기를 했는데 순간 필자의 머리 속에 든 생각은 '그럼 밤알의 시기적 비교를 통해서 그 밤나무가 가공목재를 위한 것인지, 과실수로 쓰인 것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였다. 뭐 어디까지나 아이디어지만 말이다.
14. '韓國 先史ㆍ古代 堅果類 利用의 變化 - 도토리(橡)에서 밤(栗)으로' - 안승모
드디어 마지막 발표!! 어느덧 시계는 5시 반을 넘어서고...
이번 발표의 포인트는 도토리에서 밤으로 식량 이용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앞선 안현중 선생님 발표의 내용과도 어느 정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신석기시대때 낙엽성 참나무(Quercus sp.) 중심의 숲이 형성되면서 수정분석을 해보면 참나무속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창녕 비봉리나 울산 세죽유적 등에서 도토리 저장혈이 확인되는 등 이시기 도토리가 상당히 많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중에서 알이 둥근 상수리류가 많으며, 실제 수종분석 결과 상수리류가 졸참나무류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가래는 몇몇 유적에서만 확인되고 있어 많이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특이하게도 밤은 전혀 보고되지 않고 있다. 유일하게 창녕 비봉리 19호 저장혈에서 밤나무 목재가 1점 확인되었을 뿐이다. 이는 일본에서 이미 죠몽시대때부터 밤이 중요한 식재료로 쓰인 것과 아주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에도 도토리 이용은 지속된다. 실제 밤 열매가 확인된 유적은 없으며, 수종분석 결과 충주 조동리유적 등 7곳에서 소수의 밤나무가 확인된 바 있다. 역시 참나무속이 압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고 말이다. 즉, 청동기시대에도 밤이 우발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적극적인 이용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래는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에도 별로 활용된 흔적이 없다.
하지만 원삼국시대가 되면 밤이 폭발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낙랑고분은 물론 창원 다호리 1호분 등에서도 부장품으로 이용되고 있고, 원삼국-삼국시대 수종분석에서도 30건 중 21건으로 압도적인 비율이 확인된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시기는 대략 기원후 3세기 이후로 볼 수 있는데,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광주 신창동유적의 수종분석 결과만 봐도 여전히 참나무속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3~5세기로 편년되는 완주 용흥동, 무안 양장리, 강진 양유동유적 등에서는 하나같이 밤나무 비중이 압도적인지라 밤나무를 의식적으로 조영-관리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후 김해 관동리유적에서도 수침목 64점 중 39점, 목제유물 94점 중 27점이 밤나무인지라 밤나무 육성이 마한-백제 뿐만 아니라 신라, 가야 지역까지도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후의 한랭건조화도 있겠지만, 경작지와 취락이 확대되면서 인간의 간섭이 있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시기 강원도에서는 밤이 직접 사용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가 없고(열매는 없고 나무만 확인됨), 운산 지역에서는 밤나무가 증가하지 않고 있어 분명히 지역차는 존재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하셨다. 이유가 어쨌든간에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한반도의 전체적인 식생 변화는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큼 당대인들의 생업경제라든가, 사회도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상으로 모든 발표가 끝났다.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는데, 이런 학회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발표자가 발표한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다양하고 새롭고 많은 내용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학회도 처음이었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일정이 빡빡한데도 발표 시간이 칼같이 지켜진 학회 또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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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발표자들의 포쓰가 대단하군요.
얼마전에 재판갔다가 체감한 사법부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겸손해 보이는 인간군상들... 옛부터 학문의 세계를 최고로 치는 이유입니다.
헉! 다 안 썼는데, 벌써 다 보고 가셨군요!! 흐음. 마저 나머지 부분도 후딱 써야겠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