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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東아시아 植物考古學 硏究의 現況과 課題
· 주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문화유산연구소 /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 熊本大學 文學部
· 일시 - 2011년 9월 23일(金)
· 장소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신양관(제4동) 3층 국제회의실
· 발표자 및 일정 - 이선복(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中沢道彦(長野県庁), 小畑弘己(熊本大學 文学部), 佐々木由香(株式会社パレオ・ラボ), Gyoung-Ah Lee(University of Oregon, Department of Anthropology), 김백범(가경고고학연구소), 정유진(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宇田津徹朗(宮崎大學 農學部), Sudarshan Bhandari (Tribhuvan University, Nepal), 真邉 彩(鹿児島大學博士課程後期), 庄田慎矢(國立文化財機構 奈良文化財研究所), 김민구(전남대 인류학과), 이희경(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안현중(전북문화재연구원), 안승모(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 批評
예전에 학회에 대해 한번 소개하기도 했는데(http://cafe.daum.net/yeohwicenter/5r7U/849),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내용들이 많아서 꼭 후기를 쓰자! 고 맘 먹었다가 이제서야 쓰는 것 같다. 필자도 식물고고학에 대해 간략하게 글을 썼던 적이 있는데(클릭), 이는 자연과학적인 기법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모든 고고학자들이 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그래서 이에 대한 글을 많이 쓰지는 못 했다!). 물론 플로테이션 기법을 이용한 간단한 유체 확인 및 실험 정도는 왠만한 사람들도 할 수 있지만, 그것갖고 어떤 정보를 얻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환경고고학』과 같은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식물고고학 혹은 동물고고학과 같은 분야는 단순히 토기나 철기로만 밝혀낼 수 있는 당대사 복원에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관심을 가졌었는데, 이번 학회를 다녀오고 나서 그런 마음이 더 샘솟았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물론, 필자가 직접 뛰어들 용기나 여력은 없지만 말이다. ^^
학회 후기는 일단 학회 일정에 맞춰 순서대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이 날 마침 서울대 법대학생 1명이 정문 구조물 위에서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차가 많이 막혀, 이선복 선생님의 기조강연은 듣지 못 했다. 그리고 첫번째 발표자이신 '나카자와 미치히코(中沢道彦)' 선생님의 발표도 앞부분을 약간 못 들었는데, 암튼 시작하도록 하겠다(이선복 선생님의 기조 강연은 못 들었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1. '近年の北陸 · 山陰および中部地方における植物考古学研究の進展'(北陸 · 山陰 및 중부지방의 최근 식물고고학 연구의 진전) - 中沢道彦(나카자와 미치히코)
나카자와 선생님은 죠몽시대 만기 후반~야요이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토기에 남아있는 종자의 압흔을 레플리카 기법으로 관찰-동정하고, 해당 토기의 편년을 토대로 벼가 각지로 전파하는 과정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특정 토기에 만약 볍씨의 압흔이 새겨져 있다면, 그 토기를 만들어 쓰던 사람이 그 볍씨의 존재를 알았다는 소리가 될테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서일본의 죠몽시대 만기 후반 돌대문토기군(2,700~2,500 BP)의 시기를 획기로 벼, 조, 기장의 작물과 함께 수전재배기술 및 밭농사 재배기술이 대륙에서 조선반도를 경유해 전파-확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절대 한반도에서 넘어갔다고 하지 않는다, 항상 경유했다고 할 뿐이지. 이는 한국 고고학자들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국내에서는 송국리문화가 넘어가면서 일본에서 야요이시대가 개시됐고, 수전재배기술이 확산되었다고 하니깐. ^^). 그렇기 때문에 나카자와 선생님은 일본 중부지방의 죠몽시대 만기 중후엽~야요이시대 전기 토기를 대상으로 위와 같은 분석을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山陰 지방에서는 돌대문토기군 시기에 생업활동의 한 형태로 벼 농사가 실시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밖에 조, 기장의 압흔도 확인되고 있고, 견과류의 저장혈도 확인되고 있어 농경을 지향하면서도 기존 생업경제를 계속 유지했다고 해석했다.
北陸 지방의 레플리카 조사는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는데, 역시 벼의 압흔이 확인되었고, 동시기 큐슈나 山陰 지방의 해안 평야부에서도 벼가 재배되었기 때문에 당시 벼 재배의 전파-확산에 있어 해안가 루트가 중요하게 취급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해당 지역에서는 조, 기장의 압흔은 검출되지 않아 밭농사의 실태는 불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발표에서 완전 신기했던 것은, 죠몽시대 조기에 해당하는 토기에서 바구미가 확인되었다는 사실이다!!! 바구미가!!! 아시다시피 바구미는 쌀과 같은 곡물에서 서식하는 곤충(클릭)이다. 그런데 죠몽시대 조기와 바구미라니, 언뜻 매칭이 잘 돼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딴 선생님들이 실험 잘못 된거 아니냐~는 말씀도 하셨는데, 실험 결과는 정확하며, 오히려 발표자는 비단 쌀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밤 같은 견과류를 먹었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벼의 압흔 연구는 1세기 가까이 축적되었지만(우와! 대단해!!), 조, 기장에 관해서는 몇 년밖에 연구되지 않아서 해당 연구 분야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는 말과 함께 발표는 끝이 났다. 당시 중부지방에서는 조와 기장을 선택적으로 수용했었는데, 이에 따라 耕起에 필요한 타제석부가 증가하는 등 석기조성에도 큰 변화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는 송국리문화 단계에서 취락 내 석기조성비율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과도 비슷한데, 樹林을 베어서 제거하고, 그 자리에 논을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석기들이 이전에는 안 보이다가, 특정 시기에는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암튼, 죠몽시대 조기로 보이는 바구미의 존재와 함께, 레플리카 기법에 대한 좋은 연구사례를 알 수 있어서 좋았던 발표였다.
2. '近年の圧痕法による縄文時代栽培植物の研究成果'(압흔 분석에 의한 죠몽시대 재배식물의 최근 연구성과) - 小畑弘己(오바타 히로키)
두번째 발표는 오바타 선생님의 압흔 분석 연구인데,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 해도 무방한 분이라고 한다(필자와 같이 간 식물고고학하는 후배의 전언에 의하면. ^^ 필자는 처음 뵜다). 여기서부터는 사진을 중간중간 섞어가면서 관련해서 후기를 작성하도록 하겠다.
이 분이 오바타 선생님이시다. 이제 발표 시작!
위의 슬라이드는 압흔 분석시 오바타 선생님이 따로 고안해낸 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후쿠오카 매장문화재 센터의 방식과 동일하지만, 속건성의 고무를 사용하고, 이형제로 물을 썼다고 한다(자세한 분석 방법은 필자도 잘 모른다. -.-;). 암튼, 그렇게 해서 압흔 분석을 한 결과, 기존 방식과 새로운 방식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했다. 아마 자세히는 모르지만 시간을 단축함으로써(비용에서도 절감 효과가 있는진 모르겠다) 실험이 좀 더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단, 어떤 실험도 마찬가지겠지만, 미숙한 사람이 하면 토기가 파괴될 소지가 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 말씀을 하셨다.
이건 앞에서도 잠깐 나왔던 얘긴데, 압흔 조사를 통해 바구미가 쌀과 함께 한반도에서 왔다는 기존의 견해가 깨졌다는 내용이었다(첫번째 발표도 그렇고, 두번째 발표도 그렇고 필자의 상식을 뒤엎는 쇼킹한 내용이 연이어 나와서 상당히 흥미진진했었다!).
오바타 선생님은 2008년부터 <레플리카 · 셈법에 의한 극동지역 선사시대의 식물재배화 과정의 실증적 연구>라는 프로젝트를 실시해 후쿠오카부터 오키나와까지 일본 각지 149개 유적 출토토기에 대한 압흔 분석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부 큐슈는 분명히 죠몽시대 조기 전반에 쌀과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구미 압흔이 확인(14,000여점을 조사한 결과, 7점에서 바구미가 확인되었다고 한다)되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다고 하셨다. 그래서 더 살펴본 결과, 바구미의 크기에 주목하게 되었고, 도토리나 밤에서 나오는 바구미가 쌀에서 나온 것보다 1.2배 정도 크다고 하셨고, 결국 '죠몽시대의 바구미는 건조된 도토리나 밤에서 영양분을 흡수했다'는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로 인해 기존에는 도작 전파의 증거로 여겨졌던 바구미는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작물 재배를 비교해보면, 콩은 일본에서 죠몽시대 전기에 나오지만 한국은 더 늦게 나온다고 했다. 얼마 전에 콩에 대한 포스팅을 몇개 남겼는데(http://yeohwi.egloos.com/1555914 / http://yeohwi.egloos.com/1556035), 콩의 재배지가 동북아시아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만, 그 최초 시원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그밖에 조와 기장은 한국이 더 이르며, 일본에서는 야요이 전기에서 확인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쌀과 보리는 한국이 더 이르지만, 일본이 얼마나 뒤늦은지는 알 수 없으며 양자의 차이가 크지 않은 듯 하다고도 했다. 압흔 분석으로 기존에 상식처럼 알려져 왔던 내용이 다소 수정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쌀이 전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아쉽다고도 하였다. 위의 슬라이드들은 각 작물의 일본 내 확산 과정과 위에 설명으로 쓴 각 작물의 등장시기를 표로 정리한 것들이다.
더불어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러한 압흔 분석에 필요한 조건(현미경 관찰에 필요한 훈련!)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압흔 분석의 통계기준에 대해서도 한말씀 하셨다. 기존에는 크건 작건 개개의 파편을 다 1점으로 인식했지만 이번에는 토기의 두께, 무게, 면적 대비하여 압흔 분석을 실시했다고 한다. 즉, 2개 유적(산나이마루야마 유적과 다른 한곳이었는데 지금 기억이 안 난다. 죄송. -.-;)에 대한 분석 결과, A 유적에서는 680점 중 1개의 압흔이 확인되었고, B 유적에서는 697점 중 1개의 압흔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토기 점수는 비슷하기 때문에 얼핏 보면 두 유적의 분석 결과는 비슷하거나 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토기의 면적 및 무게 비율로 따졌더니 A는 680점, B는 1,814점이라는 완전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A유적에서 압흔이 나온 확률은 B유적에 비해 2.7배 가량 높아지게 된 것이다. 오바타 선생님이 이 비율을 중요시한 것은, '모든 토기에 압흔이 남는 조건이 같다고 전제했을때 더 많은 압흔이 확인된 유적은 그만큼 해당 곡물이 재배됐을 당시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어떤 유적에서 조나 기장의 압흔이 더 많이 나오면, 해당 유적에서는 조나 기장을 더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되겠다.
마지막으로 한국 내에서도 압흔 분석이 활성화되길 바란다는 바램과 함께 발표를 마치셨다. 일단 두번째 발표까지 들으면서 그간 필자가 전혀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 엄청난 정보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와아~'하는 심정으로 발표를 들었다(그에 비해 식물고고학 전공하는, 동행한 후배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덤덤하게 -.-;).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압흔 분석이 실시된 바 있는데(손준호 · 中村大介 · 百原新, 2010,「복제(replica)법을 이용한 청동기시대 토기 압흔 분석」『야외고고학』 제8호,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관련 정보를 얻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replica.pdf
암튼, 두번째 발표까지 들으면서 정말 공부할게 너무 많구나, 그동안 이런 것들도 모르고...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었다.
3. '繩文時代における植物利用と栽培'(죠몽시대 식물이용과 재배) - 佐々木由香(사사키 유카)
그렇게 거침없이 세번째 발표로 돌입했다! 개인적으로 오전 발표에서 필자가 가장 흥미있게 들었던 발표가 아니었나 싶다. 여담이지만 정말 국제대회여서 그런지 외국 선생님들이 다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하셔서 정말 깜놀 & 부럽!! -.-;; 외국어를 역시 공부해야 돼~라는 생각을 거듭하면서 발표를 계속 들었다.
이 분이 사사키 유카 선생님이고~
이건 간단한 연구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직접 그린 그림까지 동원하면서~ 위의 내용은 죠몽시대때 이미 인간에 의해 취락 주변으로 인위적인 삼림 조성(나무를 심었거나, 아니면 선택적으로 나무를 사용했다는 의미)이 이뤄졌다는 슬라이드다. 예전에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때 정말 '헉!'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새삼 났다(온라인 상에서 몇번 얘기했던 것도 같은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소개해볼까 한다).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일부 지역에는 취락이 나왔지만 그 주변으로 아무것도 없는 공터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상한 마음에 공터에 대한 화분분석을 실시했더니 밤나무(너도밤나무였는지 분명치 않다. 기억이 잘~) 화분이 대량으로 나왔고, 결론적으로 그 취락에서 밤나무 숲을 인위적으로 조성해서 사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일단, 한국 고고학계에서 아무 유구가 없을때 그런 대단위 자연과학분석을 실시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유적 조사에 있어 좀 더 사고의 폭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났다. 암튼, 사사키 선생님은 죠몽시대 전기부터 이미 인간에 의한 삼림 관리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도표에 의하면 '1년생 재배식물(가장 자은 원) - 목본류 식물 재배 - 야생식물 재배 - 2차림 - 자연림'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취락 주변으로 자연을 계획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2차림이 죠몽시대 만기 이후에는 곡물자원 경작지로 변화한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시기에 따라 주변의 삼림을 이용하는 방식, 그리고 주거 환경이 변화됨을 보여주는 모식도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과도기에도 적용하면 적절한 모델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아직 그와 관련된 뚜렷한 유적 및 연구성과가 없어 무리가 있다.
사사키 선생님에 의해 일본의 식물자원 활용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죠몽시대 초창기~조기 : 후빙기의 온난화와 함께 혼슈에서 큐슈까지 낙엽광엽수림이 확대되며 여러가지 삼림 자원이 활용되었다고 하였으나, 혼슈 동반부의 식물 이용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견과류는 죠몽시대 초창기부터 여러 종류가 이용되었으며, 이중 인간에 의해 관리-재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옻과 삼이다. 하지만 주로 혼슈 동반부에 한정되어 분포하고 숫적으로 적기 때문에 재배 여부가 분명하지는 않다.
죠몽시대 전기 : 이 시기 혼슈 동반부에서 다양한 식물자원의 증거가 발견되어 전기 혹은 조기 단계에 다양한 야생식물 및 재배식물이 이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죠몽시대 전기 초두부터 삼림식생에 대한 인위적인 관여가 보여 취락 주변에 밤숲 및 옻숲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北陸 지방을 제외한 혼슈 서반부와 큐슈에서는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의 과실 이용이 주가 되며, 밤이나 옻나무의 적극적 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죠몽시대 중기 : 혼슈 동반부에서는 중기 중엽~후기 전엽에 걸쳐 해퇴(海退)로 인해 습지림이 형성되고 하도(河道) 주변에 성립한 하반림(河畔林-하천 주변 숲)의 이용이 확인된다. 특히 중기 후반~만기 중엽까지 하반림 중 칠엽수의 이용이 활발해서 水場(みずば-동식물이 물을 마시는 곳 혹은 식수가 있는 곳) 유구 구축이 활발해졌으며, 중기 후반~후기 초엽에 걸쳐 オニグルミ(가래나무)의 이용이 현저해졌다. 중부 고지 및 관동지방 서부에서는 타제석부가 급증하며, 동북지방에서는 피 재배가 이뤄진다. 또한 옻의 식물유체가 혼슈 동반부 뿐만 아니라 훗카이도 남부와 北陸 지방에서도 확인되며, 밤도 선택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北陸 지방을 제외한 혼슈 서반부와 큐슈에서는 여전히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를 주체로 한 도토리류가 이용되고 있다. 즉, 훗카이도 북부를 제외하면 죠몽시대 중기의 일본 열도는 밤+옻 이용권 및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 이용권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위의 슬라이드).
죠몽시대 후~만기 : 혼슈 동반부는 기후의 한랭화로 밤에서 칠엽수로 식용 자원이 변화한 것으로 여겨왔으나, 최근 저습지유적의 조사 결과 한랭화에 대응하여 여러 종류의 식물을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北陸 지방을 제외한 혼슈 서반부와 큐슈 지방, 동해지방 해안부에서는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를 주체로 한 도토리류의 저장혈을 통해 집약적인 식물이용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 이후 저장혈 내에서는 도토리류나 밤, 칠엽수 등도 일정량 확인되어 식물의 이용이 복합화된 경향이 나타난다.
죠몽시대 만기 말~야요이시대 전기 : 북부 큐슈에서 시작된 도작농경문화는 조, 기장 등 잡곡과 세트로 혼슈에 전해졌지만, 관동지역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식물이용은 죠몽시대의 다각적 식물이용을 기반으로 한다. 즉, 죠몽시대의 식물 재배, 관리기술의 확립은 수전농경을 도입하는 밑바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열도를 이분한 도토리+옻 이용권과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 이용권은 야요이시대 전기까지 확인되나, 전자는 수전도작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야요이시대 중기 이후 일부 산간부를 제외하면 급속히 사라지게 된다.
이상이다. 예전에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흥미롭다는 생각과 함께, 일본의 생업경제 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떤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다. 일본에 벼농사가 늦게 전파된 것은 어찌보면 풍부한 수렵-채집자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고). 그런데 이처럼 죠몽시대~야요이시대 전기에 걸쳐 일본의 식생 변화를 세분화해서 정리하고 보니 뭔가 한국 선사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변화상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암튼, 상당히 재밌게 들었고, 들으면서 계속 뭔가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주는 발표였기 때문에 필자도 질문을 하나 했다(실제 종합토론때도 가장 활발한 논의가 됐던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일단, 필자는 북부 큐슈의 정치체 혹은 집단이 도토리+옻 이용권에 포함되어 있고, 혼슈 지역은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 이용권에 포함되어 있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야요이시대 중기 이후가 되면 전자가 급격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혹시 수전기술을 가진 집단이 정착하면서 생겨난 현상이 아닐까 싶었다. 즉, 송국리인들이 야요이시대를 개시했다(한-일 대부분의 정설)는 또 다른 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정치적인 변화상까지도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냐고 질문을 했다. 하지만 사사키 선생님은 그러한 변화가 야요이 전기가 아닌 중기 이후에 일어났고, 도토리+옻 나무는 상수리나무류로 대체된다고 하셨다. 더불어 이때가 되면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 분포권이 더 동쪽으로 확산하게 되는데, 목재 이용 차원에서 효율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언급도 하셨다. 즉, 상수리나무와 イチイガツ(개가시나무)가 야요이시대 중기 이후 활발하게 쓰였으며, 이때가 되면 식용자원이라기 보다는 목재 자체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 것 같다. 암튼, 필자의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인 변화상까지는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오전 첫번째 타임이 끝났고 약간의 휴식이 이어졌다.
4. 'Archaeological Perspectives on Origins of East Asian Pulses' (동아시아 맥류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사고) - Gyoung-Ah Lee(이경아)
이경아 선생님의 네번째 발표가 이어졌다. 이 역시 얼마전 콩과 관련한 포스팅을 작성한 바가 있기 때문에 좀 흥미롭게 살펴봤다.
이 분이 이경아 선생님이고~
야생종과 재배종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wild와 weed에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좀 흥미로웠다.
콩과 작물이 확인된 동아시아 유적들을 표시한 지도다. 한중일 삼국에서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대개 비슷한 위도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콩이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중국 내에서도 이른 시기 확인된 콩의 크기는 서로 다르다고 한다.
중국(주로 푸른색)과 한국(그 오른쪽 윗부분)의 콩을 비교해보면 분명히 양자간에 차이가 큼을 알 수 있다.
한국 및 중국과 달리 일본의 경우, 콩의 크기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즐문토기시대 혹은 신석기시대(Chulmun-녹색), 무문토기시대 혹은 청동기시대(Mumun-검은색), 삼국시대(Three Kingdom-보라색) 등 한국내 각 시기별 콩의 크기를 분석한 것과 일본(japan-하늘색) 내에서 확인된 콩을 분석한 것, 그밖에 재배종(Domesticated-파란색)과 야생종(non-domesticated, weedy는 따로 구분-빨간색)을 분석한 것을 한군데에 실은 도표이다. 이를 통해 각 시대별 콩의 이용사례를 파악한 것인데, 신석기시대나 삼국시대 모두 야생종을 활용한 경향이 확인되고 있다. 단, 여기에서 기준이 되는 재배종의 크기는 현재 재배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오차는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이경아 선생님의 주장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콩은 인간의 손을 타면서 점점 크기가 커졌으며, 콩의 기원지는 단일하다고 볼 수 없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기원했다고 봐야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요즘 콩과 비교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크기에 있어서도 변화상이 감지되고 특히 섬나라인 일본에서는 한국-중국과 다른 계통의 콩이 자란 것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모든 작물이 중국-한국-일본의 방향대로 전해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특정 식물의 기원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5. '식물규산체 분석을 통한 유구 복원-서천 화금리 온수골 유적 출토 수혈유구' - 김백범, 김혜령
드디어 오전 마지막 발표가 다가왔다.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지식을 획득하느라 정신없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소 실망스러운 발표였다.
김백범 선생님이 먼저 간단하게 식물규산체 분석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게 서천 화금리 온수골 유적에서 확인된 원형수혈이며, 안에서 약 120kg의 탄화미가 확인되었다(건조하고 나니 60kg으로 줄었지만). 아마 소형 수혈유구 내에서 나온 탄화미로는 최대 수치가 아닐까 싶다. 탄화미는 유구 상부부터 바닥면까지 약 25cm 두께로 퇴적되어 있었는데, 층위양상을 통해 수혈유구 내부에 쌓인 채로 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물규산체 분석 결과, 탄화된 쌀은 탈곡 후 도정된 상태에서 저장되었는데, 이때 쌀만 저장한 것이 아니라 잎을 이용하여 만든 가마니나 용기 혹은 잎을 깔아놓고 그 안에 쌀을 저장했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즉, 당시 쌀을 도정한 후 가마니에 담아 저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면서 도정한 쌀과 도정하지 않은 쌀 중 후자가 더 긴 시간 저장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봤을때, 해당 유구 주변에 쌀의 소비가 비교적 빠르게 이뤄지는 행위를 담당하는 취락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하기도 했다.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쳐도 거기서 더 나아가 많은 곡식을 재배하기 위한 경작지도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추론에는 고개가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다.
뭐 도정 여부를 두고 소비가 빨리 이뤄져야만 했을 것이다~정도야 추론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취락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거기다가 경작지도 있어야 한다는 추정은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쌀의 소비기간에 대해 물어봤더니 도정된 것은 반년, 안 된 것은 1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해당 유적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할텐데 반드시 그 주변에서 생산-소비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안 갔다. 더군다나 해당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와 조선시대 토광묘 4기와 함께 이 원형수혈유구 1기만 달랑 나왔기 때문에 주변에 취락-경작지가 있을 것이다~라고 추론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해당 수혈유구의 탄소연대측정치는 1220±50~1290±60 B.P, 즉 A.D 660±60~730±50(삼국시대 말~통일신라시대 초)라는 소리가 되는데 해당 유적 내에서도 이 동떨어진 유구를 기준으로 너무 크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주변에서 이러한 수혈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면, 그나마 유통경제 단계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했던 유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고...분석 자료가 딸랑 1개라는 점도 좀 걸렸다. 좋은 자료가 소개된 것에는 뭐 고마울 뿐이지만, 무리한 해석을 시도한 것은 NG였던 것 같다. 암튼, 이렇게 오전 발표는 다소 뒷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채 끝이 났다. 오전 발표의 총평을 하자면, 일본의 식물고고학 수준이 상당하다는 점을 새삼 느꼈던 것, 그리고 레플리카 기법으로 기존에 상식처럼 알려져왔던 사실들에 수정이 요구된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럼 오후 발표는 다음 글에서 밝히도록 하고,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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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름의 불청객 쌀벌레가 식물고고학에선 중요한 손님인가요? ㅋ 사진을 보니 콩얘기도 나온거 같고, 이래저래 흥미로웠던 듯 합니다. ㅎ
이거 아직 다 못 올렸습니다. 여기는 글 중간에 비공개 설정해놓는 게 없어서...일단 이렇게 해놓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마저 올리지요. 콩 얘기도 있었고, 쌀부터 조, 보리 등 다양한 곡물자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죠.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아주 미세한 부분이지만, 당대사를 복원하는데 있어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기 다 올리면 그때 한번 더 읽어보심 좋을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