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님,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네요. ^^
저 역시 독고씨를 선비족 성씨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다음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아직 원사료는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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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지배 하의 흉노
북위에 선행하는 시대 이래 탁발씨 선비족은 여러 부를 각각의 대인 밑에서 분할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흉노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사(北史)> 독고신전(獨孤信傳)에는 북위가 흥했을 무렵부터 탁발씨를 중심으로 하는 46부족 가운데 중심 부족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독고부(獨孤部)에 관하여,
"위(魏)의 초창기는 46부였다. 그(독고신)의 선조 복류둔(伏留屯)은 부락의 대인이 되어서 위(魏)와 더불어 일어섰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독고 부족은 탁발씨에 의해 오르도스에서 내몰렸던 앞서의 혁련씨와 마찬가지로 후한시대 남흉노 연제씨(허련제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진(晋)대의 5부 흉노의 북부사 유맹(北部師 劉孟)의 후예로서, 오래전부터 탁발씨에 협력하며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북위의 핵심 씨족인 선비 탁발씨와 흉노 독고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탁발규의 시대였다. 말할 것도 없이 탁발규라는 인물은 북위의 시조 도무제로, 탁발규의 선대 소성제가 전진의 부견(재위 352~385)의 군대에 패하여 대가 일시적으로 끊길 무렵 탁발규는 독고부의 유고인(劉庫仁)으로부터 비호를 받았다. (<위서> 유고인전) 또한 탁발규가 386년(등극 원년)에 대국(代國)을 부흥시키기 위해 위를 건국했을 때에도 독고부가 탁발씨에 협력하여 싸웠다는 것이 <위서> 유고인전에 함께 기록되어 있다.
흉노 독고씨의 중국 귀족화
이상과 같이 북위 건국 무렵부터 탁발씨에 협력했던 흉노 독고부 사람들은 북위 귀족의 일원으로서 번영하게 된다. 예를 들면 노고(路孤)의 손자 나진(羅辰)의 경우, 정동장군정주자사(征東將軍定州刺史)로 임명된 이래 그 역직은 나진의 자손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 나진의 여동생은 탁발규의 황후가 되어 명워제(재위 409~423)를 낳고 북위 황실의 외척으로서 그 입지를 굳혀갔다.
독고씨의 번영은 북위의 동서분열(535년) 후에도 계속되었다. 좀더 설명하면 독고신은 서위(535~556)의 중신(대종백, 위국공)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딸들은 각각 북주 명제의 황후, 수 문제의 황후, 당 고조(이연)의 어머니가 되어 독고씨는 북주 · 수 · 당의 3대에 걸쳐 외척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흉노 선우의 피를 이은 부족장의 일족이 중국의 명문귀족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흉노 부중의 농민화
앞 절에서 흉노 부족장들의 중국 귀족화 과정을 추적해보았다. 그렇다면 흉노의 일반 부중은 어떠한 경로를 밟아갔던 것일까? 앞서 5부의 흉노 부민 일부가 한인 지주의 소작인으로 되거나, 아니면 귀족의 노예로 팔려갔다고 기술한 바 있는데(225쪽), 그 후 그들의 동정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북위의 도무제는 종래 오호의 여러 왕조에서 채용했던 한인과 여러 유목민에 대한 이중 정책(한인에게는 군현제 정치, 북방 부족들에게는 부족제의 온존)을 폐지하고 일원화 정책을 실시했다. 물론 그것은 황제에게 권력의 집중을 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그 와중에서 흉노부족이 해산으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역대 북위의 황제들은 옛 흉노 부민을 옛 선비 부민과 함께 군현민으로 편성하였으며, 강제적으로 국도 주변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채용하고 농업과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 정책을 따르는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에는 국가로부터 인구수에 따라 전토(田土), 농구(農具), 경우(耕牛) 등이 지급되었다. 이는 북위 정권이 일관되게 수행했던 권농정책의 일단인 계구수전제(計口受田制)로, 후에 균전제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위 정권의 권농정책에 의하여 유목민의 농민화가 손쉽게 진행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특히 북쪽 경계 지역 거주민의 농민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위 말에 고평진민(高平鎭民) 출신의 흉노 혁련은(赫連恩)과 유현진민(柔玄鎭民) 출신의 흉노 만사씨(万俟氏) 등이 부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들은 북위 정권의 사민정책과 권농정책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수 · 당에 이를 무렵에는 유목민의 농민화는 거의 완성이 되었고, 농민화를 거부하는 자들은 북으로 도주하여 연연(유연), 돌궐의 부민으로 흡수되어 갔던 것이다.
첫댓글 저도 몰랐는데, 흉노 일족의 하나인 독고씨 집안은 탁발 선비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었더라고요. 제대로 파트너를 정한거죠. 암튼 흉노 귀족들은 이처럼 중국의 명문귀족으로 발돋움했지만 일반 흉노족들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네요. 어느 민족이든 흥망성쇠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