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는 하복을 입어야 했다. 하복은 파란 셔츠에 회색 바지, 그리고 하얀 운동화였다. 교복은 작년에 입던 것이 있어 일찌감치 꺼내서 못걸이에 걸어 두었다. 하지만 하얀 운동화가 없었다. 며칠 전,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건만 하루가 다 저물어가도 운동화를 사러 가자는 말씀이 없으셨다.
동그란 밥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새엄마 그리고 나는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 내일 하복 입어야 하는데 하얀 운동화가 없어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돈이 없으니 검은 운동화 신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3년 내내 입으라고 사 준 큰 교복은 비록 꺼벙하고 없어 보여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여름 하복에 동복 신발인 검정 운동화를 신고 가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내일 학교를 갈 자신이 없었다.
속이 너무 상해 손에 들고 있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셌다.
갑자기 머리가 흔들리고 볼이 얼얼했다. 아버지의 손이 내 볼에 닿았고 나는 흠칫 뒤로 밀려나갔다. 고개를 장판 무늬에 고정한 채 떨어지는 내 눈물 보아야 했다. “밥 먹기 싫으면 나가!” 아버지의 호령에 나는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보았다. 어둠이 노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부엌에 나와 등을 켰다. 이 어둠이 걷히면 나는 검은 운동화를 신고 학교를 가야했다. 죽기보다 싫은 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까지 나는 어떻게 하면 검은 운동화가 하얗게 변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생각한 건 하얀 크레파스로 검은 운동화를 빽빽이 칠하는 것이었다.
불그스레한 30초 전구등 아래에서 긴 시간 동안 검은 운동화에 흰 크레파스를 칠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제일 먼저 확인한 건 하얗게 변해 있어야 할 운동화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운동화는 하얀 크레파스가 지저분하게 묻은 검은 운동화였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직감했다. 내 운동화 때문일 것이라는 걸. 복도에 진열된 신발장에는 흰 크레파스로 뒤덮인 검은 운동화가 내 대신 아이들의 비웃음을 받아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뿜었다. 연기도 하얗고 뭉게구름도 심하게 하얬다. 중학교 때 이야기이니 이미 수십 년 전의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무지하게 쪽팔릴 일인데, 세월이 지나니 이렇게 웃으며 얘기하네".
한 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담배재를 털던 사내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앞에서 이야기를 듣던 동료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빠와 크레파스네”